[4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0화. 버림받은 황자 (6)
"명심해, 아카키오. 오늘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 비밀이 새어 나가는 순간, 우리 가족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약속해 줘, 오라버니. 난 처음부터 코어를 가지고 태어난 거야. 저주받은 쌍둥이 따위가 아니었던 거라고...."
그날, 하론과 율란은 간절하게 부탁했다. 각자의 이유로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필사적이었다.
"그래, 약속한다. 일이 어떻게 되든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내 입으로 밝히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아카키는 기꺼이 형제들의 공범이 되기로 했다.
비밀스러운 의식의 성공 확률은 반반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아카키는 그토록 바라던 복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오늘로 유리아 황후의 마지막 희망이 부서질 테니까.
'미안하다, 로베르. 그런데 어쩌겠어. 너도, 나도 이 빌어먹을 황실에 태어난 것이 죄라고 생각하자.'
아카키는 하론이 내민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러고는 제 피를 타고 흐르는 힘을 한곳으로 모았다.
"신이시여, 제가 당신이 내린 힘을 형제와 나누는 것을 허락하소서."
주문과 함께 투명한 구가 푸른색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티팩트가 완성된 순간, 아카키는 율란의 심장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아, 아악! 아파, 아프다고!"
율란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론은 힘줄이 솟은 팔로 그녀를 단단히 결박했다.
"조금만 참으렴, 율란. 고통 끝에 새로운 삶이 있을 테니."
"새로운 삶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아카키는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며 더욱 강한 힘을 불어넣었다.
아티팩트가 닿은 자리를 따라 환한 빛이 일며 그것이 율란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쳇, 아타나스처럼 몇 초 만에 끝날 줄 알았더니만. 경험의 차이인가.'
신성력으로 아티팩트의 경계를 감싸 사람의 몸속으로 밀어 넣는 일은 그가 경험해 본 의식 중 가장 까다로웠다.
고작 주먹만 한 크기의 아티팩트를 넣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그동안 율란은 고통스레 울부짖다가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카키의 얼굴에 잠시 죄책감이 서렸다. 그러자 하론이 그를 재촉했다.
"망설이지 마라, 아카키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주저하는 자는 평생을 그렇게 한심하게 살게 될 테니."
"예, 주저할 이유가 없지요."
분노에 눈이 먼 아카키는 결국 제 손으로 무엇을 부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의식을 끝마쳤다.
"수고했다, 사랑하는 아우야. 오늘 네가 우리를 위해 해 준 일을 반드시 기억하마."
하론은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증스러운 감사 인사를 남긴 뒤 기절한 율란을 품에 안고 떠났다.
"후회하지 마, 등신아. 잘한 거야.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이게 맞는 거라고...."
홀로 남은 아카키는 자신을 타이르며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율란의 고통에 찬 비명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 탓에, 한동안 깊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꿈에 나온 율란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것을 빼앗아 갔다고 비난했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아카키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불안은 이윽고 현실이 되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날의 비밀스러운 의식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동안 율란은 심한 열병에 시달려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황후의 명령으로 그 사실은 철저히 감추어졌다.
"황자, 율란이 너무 괴로워합니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단순한 각성통이길 바라 보는 수밖에."
실제로 율란의 증상은 일부 각성자들이 앓는다는 증상과 유사했다.
그녀는 어느 날은 횡설수설하며 취한 사람처럼 굴었고, 어느 날은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을 보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정신을 놓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아카키는 아타나스와 함께 첫 순회에 나섰다.
"아카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자꾸 이상하게 구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카키는 궁에 남겨 두고 온 동생을 잊기 위해 낮에는 악마를 찾아 나섰고, 밤에는 낯선 이들과 어울려 흠뻑 취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악몽을 꾸는 일도 없었다.
몇 달 뒤, 하론과 율란은 순회를 마치고 궁으로 복귀한 아카키를 마중 나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씁쓸한 기색을 띤 율란의 미소를 본 순간, 아카키는 그녀가 끝내 희망을 찾아내지 못했음을 직감했다.
'실패인가. 차라리 잘됐어. 그 기록까지 쓸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아카키는 평소처럼 그들을 대했다. 그리고 또 순회에 나섰다.
그즈음부터 로베르는 자수정궁에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아카키는 동생을 향한 강렬한 증오를 빠르게 잊어 갔다.
그 후로 종종 터무니없는 복수를 계획했던 어린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아카키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결국 아카키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제 손으로 쌍둥이에 관한 기록을 태웠다.
"언젠가 밝힐 날이 오려나."
가능한 한 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렇게 아카키는 그날의 일을 철없던 어린 날의 실수로 여기게 되었고, 눈에 띄지 않는 로베르를 잊고 살아왔다.
로베르에게 기적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
"그러니까, 어이없는 복수심에 그런 일을 벌여 놓고, 멋대로 잊어버렸다는 말이지?"
비로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로베르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 이유 모를 강한 분노에 사로잡힌 채.
* * *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뭐야?"
아카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찰나의 빛이 시야를 채우자 금세 전투로 인한 고통이 가셨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로베르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로베르? 어떻게...."
그리고 로베르를 마주 본 순간, 아카키는 직감했다. 제 동생이 모든 진실을 알아 버렸다는 걸.
"그건 알 거 없고, 일단 좀 처맞자."
로베르의 힘에 감응한 저주 검이 옅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이 허공을 가른 찰나, 아타나스는 곧장 아카키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물러났다.
쾅! 그러기를 무섭게 직전까지 아카키가 있던 자리에 검이 꽂혔다.
"방해하지 마라, 사제."
로베르가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명백한 분노를 느낀 아타나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설명부터...."
쉬이익-. 검이 매섭게 돌진해 왔다. 아타나스는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또다시 공격을 피했다.
검 끝이 바닥 위를 스치며 먼지바람이 일었다. 펑-! 그 자리를 따라 자색 광선이 번졌다.
'저건....'
아타나스는 곧장 한쪽 눈을 감고 멀리 있는 바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지지대 삼아 높이 도약했다.
쿵! 아카키는 아타나스의 힘에 이끌려 바위 위로 함께 안착했다.
'신성력과 마력을 구분도 하지 않고 막 쏟아 내는군.'
아타나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로베르의 상태를 살폈다. 뜻밖에도, 저주 검은 그 두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뒤이어 자색 광선이 그들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쿠구궁-. 바위가 흔들리며 두 사람의 몸이 휘청였다.
"잡았다."
어느새 그들의 코앞까지 쫓아온 로베르가 검을 휘둘렀다. 콰광! 폭발이 일며 바위가 산산이 조각났다.
"좀 봐주세요, 황자님. 저라고 체격이 비슷한 성인 남자를 들고 도망 다니기가 쉬운 줄 아십니까."
로베르의 뒤편으로 이동한 아타나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아카키를 지탱한 팔이 옅게 떨렸다.
"내가 상대할 테니, 놔."
"지금 저 황자님을 상대했다가는 우리 둘 다 죽습니다. 대체 뭘 봤길래 저러는지...."
아타나스는 로베르가 그토록 화가 난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로베르가 피식 웃으며 검을 어깨에 진 채 뒤돌았다.
"뭘 봤냐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린 치졸한 형님의 실패한 복수를 보고 왔다. 형님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겠지."
"...그래, 알아."
"아, 그렇군요."
아카키가 아타나스의 팔을 쳐 내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타나스는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비켜. 나란히 처맞기 싫으면."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그렇다고 한들 황자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넌 그게 대체 뭔 소리냐? 로베르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자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죠. 왜 화가 나신 건지 말씀해 보세요."
대체 왜 당신이 진짜 로베르라도 된 것처럼 화를 내는 거지?
아타나스는 그런 질문을 돌려 하는 것이었다. 의도를 알아차린 로베르는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왜 내가 화를 내냐고?'
황실이 아카키를 버렸듯 아카키가 로베르를 버렸기 때문이다.
제 코어에 남은 로베르의 영혼이 아카키에게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걸 배운 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인간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로베르의 이름과 육신, 코어를 가지고 살아갈 자는 이제 자신이기 때문이다.
로베르는 그 수많은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야 내가... 로베르니까."
"그러십니까. 알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타나스가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 로베르는 저주 검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러나 너의 주인이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지."
"...뭐? 주인?"
아카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타나스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주장을 하려거든 분발하셔야 합니다. 아직 제자의 역할도 다하지 않는 분이...."
퍽-. 저주 검이 날아와 꽂혔다. 그러나 미처 아타나스에게 닿지 못하고 결계에 박혀 옅게 진동했다.
"속박."
로베르가 씩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검이 순식간에 촘촘한 그물로 변해 결계를 뒤덮었다.
"뭐...."
아타나스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파사삭-. 결계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부서졌다. 상반된 힘이 실린 그물이 그대로 아타나스를 덮쳤다.
"윽...."
그는 거대한 무게에 떠밀려 넘어졌다. 그물이 꿈틀거리며 그를 단단히 옭아맸다.
로베르는 축약 주문을 단번에 해낸 것은 물론 아타나스를 속박하는 데 성공했다. 아카키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타나스가 짜증스레 망 사이를 벌리며 시야를 텄다.
"언제 성공하셨습니까?"
"방금. 오늘 전투로 감을 잡았거든. 이 정도면 무성의한 스승 밑에서 나오기 힘든 아주 훌륭한 제자 아닌가?"
"반년 치 힘을 하루에 몰아 쓰고도 무성의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군요."
"그건 종으로서 한 일이지, 스승으로서 한 일은 아니잖아?"
로베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응수하며 아카키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에 실린 마력이 대지를 울렸다.
"자, 형님. 이제 실패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야."
쿵, 쿵. 울림이 가까워지는 동안 아카키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뒤늦게나마 받아들이려 했다.
찌이익-. 아타나스가 신성력이 실어 그물을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베르의 시선은 여전히 아카키를 향했다.
로베르가 손을 뻗자 찢긴 그물 조각이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다시 검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냥 몇 대 때리신다면서요."
"때릴 거야, 물론 검으로."
툭. 뒤이어 저주 검이 아카키의 어깨에 닿았다.
"속박."
아카키의 어깨를 타고 흐른 검기가 순식간에 두 팔을 단단히 결박했다.
퍽! 로베르는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 아카키를 꿇어앉혔다. 아카키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비명을 삼켰다.
"로베르 황자님, 황자님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형님을 죽이시면 안 됩니다. 그게 인간의 법도니까요."
아타나스가 그물을 찢는 속도를 높이며 다급하게 설명했다. 로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법도라는 걸 모든 인간이 당연히 지키는 건 아니잖아? 지금껏 내가 본 인간 중 법도를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인간은 없었는걸."
"죽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아카키 황자님이 황자님을 죽이려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지. 단지 자기처럼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을 뿐."
"...."
아카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침묵으로 긍정의 답을 대신한 셈이었다.
그 얼굴을 본 로베르는 더 강한 분노에 사로잡힌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패한 줄 알았겠지만, 훌륭히 이뤘어. 내 일기장은 죽고 싶다는 말로 도배되어 있었거든."
"...나 때문에?"
"특히 형님에 관한 부분 중에 생각나는 건, '아카키 형님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라는 거야. 어때, 우습지?"
로베르의 힘이 흘러 들어간 검날이 빛을 발했다. 차가운 자색 빛이 아카키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황자님! 두 분이 서로를 미워하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사실 두 분의 탓만은 아닙니다. 그러니 황자께서 먼저 저 모자란 형님에게 이해와 관용을 베푸시는 게 어떠세요."
"하하, 난 그런 걸 몰라."
아타나스는 어느새 그물을 꽤 찢어 놓은 뒤였다. 로베르는 그가 금방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는 걸 눈치채고 검을 단단히 잡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저를 향해 떨어진 순간, 아카키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로베르."
"그런 말은, 진즉 했어야지. 들어야 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로베르는 이를 악물고 끝내 검을 내리쳤다.
[41]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1화. 버림받은 황자 (7)
황후궁과 나란히 위치한 페리도트궁. 궁의 주인인 율란은 응접실에서 하론에게 체스를 배우고 있었다.
"율란, 비숍은 대각선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고 했잖아. 바로 앞에 있는 말은 잡을 수 없어."
"아, 너무 어려워요, 오라버니."
하론의 설명을 듣고도 율란은 엇비슷한 기물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비숍을 앞으로 이동시키거나 룩을 내어주고 폰을 잡는 어이없는 실수를 반복했다.
"판을 읽는 게 어렵다면 그저 가장 진귀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면 된다. 네가 지금 손에 쥔 퀸이 바로 그것이지."
하론이 나이트를 율란의 진영으로 밀어 넣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는 몸이 어떠니? 전처럼 열병을 앓는 일은 줄어든 듯한데."
"많이 나아졌어요. 그런데 자꾸... 뭔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요."
율란이 하론의 눈치를 살피며 퀸을 움직여 흑색 나이트를 잡았다. 그러자 하론이 살짝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해 줄래? 잃어버린 것인지, 잊어버린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둘 다인 것 같아요. 십 년 전쯤 크게 아팠던 뒤로 이즈음만 되면 늘 이러네요."
과거 심한 열병을 앓은 후유증으로 율란은 그때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만큼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렇구나. 요새 너무 지치는 일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 로베르로 모자라 아카키까지 함께 순회에 나섰으니...."
하론이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자 율란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오라버니, 그 둘이 저와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을 품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물론 두 사람이 절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정말 저한테 해를 끼칠 것처럼은 보이지 않아서요."
"또 실수를 했구나, 율란."
하론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비숍을 움직여 퀸을 잡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체크메이트를 만들었다.
"어? 언제 여기까지...."
"판을 읽지 못하면 이렇게 쉽게 가장 귀한 것을 잃는 거란다. 너는 기어코 로베르에게 패배하고 싶은 거니?"
"저는...."
로베르가 싫지만, 로베르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율란은 그런 진심을 삼킨 채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하론은 율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판 위에 올랐단다. 그러니 먼저 잡지 않으면, 잡아먹힐 뿐이야. 아직도 이렇게 게임에 서투니 걱정스럽구나."
"오라버니가 자주 찾아오셔서 가르쳐 주세요."
"그래, 율란. 내가 언제나 네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너는 끝내 홀로 행복해지려 하는 로베르가 우리의 적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네. 먼저 절 찾아와 주는 분은 오라버니밖에 없으니까요."
율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 *
"당신은 이제 이름 없는 하급 악마가 아니라 나태 일족의 마왕, 벨페고르입니다. 왕께서는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부 이룰 수 있으십니다. 그런 힘을 손에 넣으셨으니까요."
그것이 새로운 벨페고르의 유일한 측근이었던 이슈타르가 준 가르침이었다.
'그러니까,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거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갖는다.
이겨야 한다면 반드시 이긴다.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인다.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지금의 로베르는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간만에 진심 어린 분노를 느끼게 한 형님이 눈앞에 있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다, 로베르."
그러나 아카키가 짧은 사과를 내뱉은 순간, 무언가에 붙들린 듯 팔이 멈추었다.
그사이 낯선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로베르는 연무장 구석에 숨어 황자들의 훈련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론이 놓친 단검이 로베르를 향해 날아왔다.
'로베르!'
아카키가 본 적 없는 속도로 달려와 어린 로베르를 감쌌다. 푹-. 뒤이어 단검이 그의 팔에 내리꽂혔다.
아카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검을 뽑아냈다.
'혀, 형님....'
'엿보지 말라니까. 돌아가.'
'조심해야지, 로베르.'
멀리서 하론이 책망하듯 중얼거렸다. 아카키는 혀를 차며 하론을 노려봤다.
어린 로베르는 덜덜 떨며 피로 물들어 가는 옷자락을 바라봤다.
'혀, 형님. 피가 계속....'
'넌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왜 계속 질질 짜? 꺼져, 진짜 험한 꼴 보기 전에.'
아카키는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어린 로베르의 이마를 툭 밀었다. 그러고는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죽이지 말라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아카키 형님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제 안에 남은 옛 로베르의 일부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로베르는 자포자기한 채 눈을 감은 아카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엿본 그의 수많은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어머니를 잃고 울부짖던, 버림받지 않기 위해 숙부를 붙잡고 사정하던, 끝내 자신을 버린 가족에게 분노하던, 복수를 코앞에 두고도 망설이던.
기뻐하거나 마음 편히 웃는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한 탓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쳇."
푹-. 아카키의 목 끝을 스친 검이 땅에 박혔다.
아카키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여전히 산 채로 동생을 마주했다.
"이 꽉 물어, 형님."
로베르는 아카키의 멱살을 틀어쥐고 곧장 주먹을 날렸다.
퍽-.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아카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터진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훌륭하십니다, 황자님. 이해와 관용이라는 중요한 덕목을 배우셨군요."
이제 막 속박을 푸는 데 성공한 아타나스가 태연한 얼굴로 다가왔다.
"웃기지 마. 나는 갚을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다."
로베르가 짜증스레 대꾸하자 아카키의 푸르른 눈 위로 안도가 드리웠다.
"고맙다, 로베르."
덕분에 해묵은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된 아카키가 살짝 웃어 보였다.
퍽! 뒤이어 로베르의 주먹이 다시 한번 내리꽂혔다.
"한 대로는 분이 안 풀리네. 몇 대를 때려야 풀릴지 시험해 봐야겠어."
"자, 잠깐...."
여전한 살기를 느낀 아카키가 간신히 입을 연 순간, 주먹이 연달아 꽂히며 입술을 짓뭉갰다.
퍽, 퍽, 퍽, 퍽. 한동안 로베르의 가차 없는 주먹질이 이어졌다.
"으윽, 야, 아, 아타나스. 뭐라도 좀...."
"하하, 제가 왜요."
아카키를 죽일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아타나스는 굳이 폭행을 말리지 않고 지켜만 봤다.
덕분에 로베르는 마음껏 분을 풀었다. 성한 곳 없이 불어 터진 아카키의 얼굴이 힘없이 떨구어질 때까지.
"휴, 이제야 다시 형님을 볼 자신이 생기는군."
로베르가 상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아타나스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저래서야 뭐 한동안 볼 게 있을지...."
"네가 낫게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삼십 분 안에 끝내셨다면 노력해 봤겠지만, 이미 반나절이 지났거든요."
"벌써 그렇게 됐나? 한동안 남의 의식 속에 있었더니 시간 감각이 망가져서."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이야기를 못 들었군요. 우선 숲을 나가서 마저 듣도록 하죠."
로베르는 그제야 그들이 여전히 악마의 숲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기절한 아카키를 짐짝처럼 질질 끌고 숲의 초입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아카키를 눕혔다.
"이쯤이면 되겠군요."
그들은 아카키가 갑자기 깨어나는 일을 대비해 나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법 긴 대화를 나누었다.
로베르는 대뜸 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러니까, 난 원래 이름 없는 하급 악마였다고. 누가 낳았는지도 모르고, 전투 능력도 없어서 마왕성 청소나 하던. 그러다 전대 마왕의 변덕으로 하루아침에 벨페고르가 됐지만."
그러나 계승 의식에 문제가 생긴 탓에, 벨페고르의 기억은 이어받지 못하고 오직 힘만을 넘겨받게 되었다.
"아무튼 요점은, 애초에 벨페고르라는 이름도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냥 벨페고르라고 불리니 벨페고르가 된 거야. 그런데 지금은 로베르라고 불리니... 로베르가 된 게 맞잖아?"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당신이 악마의 본능과 감, 지능 같은 건 갖추었으나 연륜과 지혜는 부족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아타나스는 이제껏 지켜본 로베르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베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악마가 맞긴 한가? 네가 그랬지, 코어에는 인간의 영혼 일부가 들어 있다고. 나도 그게 자꾸 느껴지거든."
그 감각은 계속해서 로베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그런 게 제 안에 있다면,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악마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인간이 될 수는 있을까?
"그건 이제부터 당신이 선택하기에 달린 것 아니겠어요."
고민이 무색하게도 아타나스는 간단명료한 답을 주었다.
"넌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것처럼 말한다?"
"딱히 상관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세요."
"로베르 황자와는 빚지는 계약 따위 할 필요 없었던 거 아닌가."
"말씀드렸듯 저는 그저 자유를 바랄 뿐입니다. 로베르든, 벨페고르든, 지금 그걸 이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당신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싱거운 놈."
로베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뒤편에는 여전히 강한 마기를 품은 악마의 숲이 있었고, 눈앞에는 푸르른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자신은 이제 벌판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로베르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를 머금자 복잡한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난데없는 자아 찾기 시간이 끝나셨으면, 이제 뭘 보고 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황자님."
"그래,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거니까."
* * *
로베르는 제가 보고 온 것을 대충 간추려 설명했다.
"-어머니와 율란은 신성력 각성을 간절히 바랐고, 하론이 가져온 아티팩트로 그게 가능했다는 거지. 아카키 형님은 복수를 위해 받아들였고."
"전대 황제께서 당시 황자들과 함께 신성력을 대체하기 위한 연구를 하셨던 건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런 아티팩트가 만들어졌다는 건 일리가 있군요."
신성력에 의존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는 신성 영웅 에버그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버그린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연구가 이어졌으나,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전대 황제는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해 그들 중 일부를 은밀하게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황자들과 함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수도와 대공령을 잇는 철도를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업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황실마저 이단의 낙인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교황청과의 전례 없는 대립으로 위기에 몰린 황실은 '황자의 난'을 계기로 결국 모든 연구를 중단했다.
"하지만 하론 황자가 직접 그걸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게 이상하네요. 제가 알기로 하론 황자는 늘 신성력을 가진 아카키 황자님을 경계했거든요."
"황족이 신성력을 가지면 뭐가 좋은데? 아카키 형님만 봐도 교황청에 끌려가서 악마 사냥이나 하고 있잖아."
"아카키 황자님은 당시 악재가 겹친 탓에 어쩔 수 없이 특권 사제가 되신 겁니다. 로베르 황자님만 해도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이상의 의무는 없으시죠."
'교황청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라는 황실의 불문율은 원래 한 번은 교황청의 요직을 맡아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례적인 문구에 불과했다.
그 불문율로 인생 전부를 저당 잡힌 황자는 아카키가 유일했다.
"전대의 경우, 다섯 형제자매 중 막내임에도 유일하게 코어를 가진 파토르 대공이 가장 유력한 황태자감으로 꼽혔습니다. 황자의 난으로 전대 황제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밀려났지만."
"그렇단 말이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자. 이미 코어가 있는 사람의 몸에 그 아티팩트를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에게 코어가 있다면, 쌍둥이인 율란에게도 코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율란이 여전히 각성하지 못한 걸 보면 그날의 의식으로 무슨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황녀님이 코어 보유자였다고 가정해 보자는 건가요?"
아타나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제가 감지하지 못했으니 아직 미완성된 상태였을 겁니다. 그 상태로 아카키 황자님의 신성력이 든 아티팩트와 충돌했다면... 분명 부서졌겠죠."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손에 넣었을 희망이 하론의 꼬임에 넘어간 탓에 부서졌다.
이 절묘한 상황이 결코 우연일 리 없었다. 로베르는 이를 갈며 자상한 척 굴던 하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더더욱 하론의 동기가 확실해졌네. 하론이 코어의 존재를 알고 율란을 통해 내 것까지 부수려 했다는 게 제일 그럴듯하잖아."
하론의 꿈은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아티팩트를 직접 쓰는 것보다는 위협이 되는 형제들의 가능성을 단번에 짓밟는 쪽이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어떻게 율란 황녀를 통해 황자님의 코어를 봉인했다는 거죠? 그리고 왜 황녀님이 코어 보유자였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때, 아타나스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로베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쌍둥이라는 게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라면서. 그러니 한쪽이 코어를 가졌다면 다른 한쪽도 가지는 게 맞는 거라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
"악마도 같은 마력을 공유하는 분신과 이어져 있거든. 그래서 분신을 공격해 본체의 심장에 타격을 주는 게 가능해. 그런 원리로 생각해 보면, 율란의 코어가 부서지면서 내 코어가 봉인됐다고 보는 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이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또 수작을 부려? 네가 분명 아카키 형님한테 알려 줬잖아. 형님은 네 말을 듣고 복수를 결심했다고."
로베르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어 아타나스를 마주 봤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그때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아타나스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랐잖아. 그런데 왜 내 각성 후에 율란의 코어에 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지?'
"쌍둥이? 그렇지, 한쪽만 코어를 가지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아타나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로베르의 말을 곱씹다가, 강한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선명한 회색 눈동자에 스민 빛이 잠시 저물었다.
그 텅 빈 눈을 마주한 순간, 로베르는 소름이 끼친 탓에 비명처럼 외쳤다.
"어이, 아타나스!"
아타나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그제야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무슨 말을 하고 있었죠?"
"너, 대체 뭐에 걸린 거냐?"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타나스는 아카키와 나눈 그날의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42]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2화. 잃어버린 기억
"쌍둥이 말이야, 쌍둥이! 율란을 통해 내 코어를 봉인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그거라니까? 하론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짐작 가는 게 없냐고."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로베르는 또다시 쌍둥이의 코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타나스는 자신이 아카키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또한 쌍둥이가 한 영혼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대체 뭐야? 저렇게 머리를 잘 굴리는 인간이 방금 나눈 대화를 계속 잊잖아.'
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아타나스는 사고 능력을 잃고 무언가에 속박된 인형처럼 보였다.
로베르는 소름이 돋은 팔을 비비며 겨우 깨어난 아타나스를 향해 물었다.
"너, 대체 뭐에 걸린 거냐? 어떻게 된 게 몇 번을 말해도...."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타나스는 로베르의 반응을 살피며 빠르게 답을 찾아냈다.
"혹시 제가 지금 무언가를 계속 잊고 있습니까?"
로베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타나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래도 망각의 맹약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게 대체 뭔데?"
"제 입으로 어떤 사실을 잊겠다고 상대와 약속한 겁니다. 다만 망각의 맹약은 조건이 까다로워서 걸리기가 쉽지 않은데...."
망각의 맹약은 단순히 행동을 제한하거나 조종하는 범위를 넘어 의식을 완전히 속박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타나스만큼 강한 자에게 그런 맹약을 걸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상대 역시 코어를 가진 성직자여야 했고,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온전한 그의 의지로만 가능했다.
"성공한다면 저는 맹약이 깨지지 않는 한 절대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되죠. 제가 혹시 중요한 걸 잊었습니까?"
"그래. 덕분에 범인을 코앞에 두고 빙빙 돌기만 하고 있다고. 맹약을 깰 방법은?"
"당장은 불가능하고, 피할 방법은... 있을 것 같군요."
로베르의 코어가 봉인된 사건과 관련된 맹약이 그에게 걸려 있다는 건, 예상대로 하론의 협조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에 있을 그 협조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결국 아타나스는 코어를 쥐어짜 간신히 자신을 덮을 만한 크기의 성역을 다시금 개방했다. 그러고는 맹약을 피할 방법을 설명했다.
"우선 제 시간을 멈추어 뒀으니, 잠시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동안 황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진실을 찾겠습니다."
"그래 봤자 성역이 닫히면 다시 잊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러면 황자님은 기억을 잃은 제게 쌍둥이에 관한 부분은 제외하고, 적의 정체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세요."
망각의 범위가 그날 아카키와 나눈 대화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맹약의 허점이었다.
아타나스는 그 허점을 이용해 협조자를 알아낼 수 있었고, 또한 그 정체만은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로베르는 기억을 되살려 그날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과 이후 아카키의 행적을 빠짐없이 전했다.
"-그때 너는 분명 그 기록을 읽은 눈치였어. 그러니 한쪽만 코어를 가질 리가 없다고 확신했겠지."
아타나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야기를 듣더니 곧장 추리를 시작했다.
"그런 대화가 오갔다면, 아마 저는 도중에 아카키 황자님의 의도를 눈치챘을 겁니다. 쌍둥이는 흔하지 않고, 교구청에 구마 의뢰를 넣는 일은 더더욱 드무니까요."
"뭐? 근데 형님은 왜 그렇게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 건데?"
"그분은 원래 단순하고 멍청한 구석이 있으십니다. 지금도 그런데, 십 년 전에는 당연히 훨씬 심했고요."
아타나스가 아카키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말을 이었다.
"눈치챘다면 분명 아카키 황자님의 뒤를 밟았을 텐데. 황자님이 기록을 훔치는 데 성공한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겼거나 누군가의 방해를 받아 늦었던 거겠죠."
그때 아타나스는 기록의 위치는 알려 주지 않았다. 덕분에 아카키는 여러 보관실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헤매야 했다.
"너무 늦었던 거지. 도중에 몇 번이나 순찰 나온 사제들과 마주칠 뻔했는데, 그동안 네 그림자도 못 봤으니까."
"하지만 기록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으니, 아카키 황자님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았겠죠. 그럼 저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으려 했을 겁니다."
"그게 뭔데?"
"그 일이 교황의 귀에 들어가는 것. 당시 저는 교황의 물음에 반드시 진실을 답해야 하는 맹약에 걸린 상태였으니, 그 일을 전부 잊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타나스는 빠르게 자신이 망각의 맹약을 맺은 이유에 도달했다. 로베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네가 정말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합니다. 그때는 저도 단순하고 멍청한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네가? 안 믿기는데."
"아무튼 종합해 보면, 제가 교황과의 맹약에 묶여 있다는 걸 아는 자, 그런 부탁을 할 만큼은 믿었던 자, 하론 황자와 관계가 있는 자. 그자가 바로 범인입니다. 제가 알기로,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네요.."
루시안 추기경.
비로소 두 사람은 코어의 봉인에 관한 비밀을 완전히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하론은 율란에게 코어를 가질 수 있다고 꼬드겨 그녀의 코어를 부수었고, 동시에 로베르의 코어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일러 준 자가 바로 루시안이었다.
아카키에게 걸린 맹약과 로베르를 죽여 가던 마기, 쌍둥이라는 특성을 이용한 계획은 전부 루시안의 작품이었다.
"...루시안의 누이와 하론이 언제 약혼했지?"
"율란 황녀님의 열 번째 탄신연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그 연회에서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새끼 봐라, 그때 틈만 나면 실실 쪼개던 게...."
'저도 황자님을 꽤 좋아했습니다. 몰래 이것저것 선물해 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로베르는 비로소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카키 황자님의 신성력이 든 아티팩트인데. 율란 황녀님의 코어를 망가뜨린 것으로 그 힘을 다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아타나스가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이제껏 그는 루시안을 큰 위협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루시안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을 친우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시안은 타고난 신성력이 미약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론에게 손을 뻗쳐 고작 열네 살의 나이에 황실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루시안이 신성력까지 손에 넣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하는 교황과 달리 앞뒤 안 가리는 승부사 기질이 있으니까요."
그사이 성역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타나스는 추리를 멈추고 로베르에게 다시금 당부했다.
"이제 저는 방금 대화를 잊을 겁니다. 그러니 다시 말씀해 주세요. 황자님의 적은 하론 황자와 루시안 추기경이고, 루시안이 신성력을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 말을 끝으로 성역이 완전히 닫혔다.
로베르는 기억을 잃은 아타나스에게 다시금 적의 정체를 일러 주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게 되었음에도 그의 반응은 조금 전과 같았다.
"그렇군요, 루시안이라.... 골치 아픈 적이 생겼네요."
"죽이면 수작을 부리지도 못할 거 아니야? 범인을 찾았으니 응징할 일만 남았어.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자."
"조금만 버티다가 조용히 살겠다는 분이 1황자와 추기경을 동시에 죽이겠다고요?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당장 전쟁이 날 겁니다."
"그럼 뭐, 진실을 알고도 가만히 두라고?"
"저희가 찾아낸 진실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당장 저기 기절한 당신 형님한테 가서 이게 진실이라고 떠들어 보세요. 아마 미친놈 취급이나 당할 겁니다."
두 사람마저 누군가의 기억과 추리에 의존해 간신히 범인을 추려 냈을 뿐이었다.
당장 하론과 루시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밝힐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적이 누군지 확인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겨우 동등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게 된 거죠."
아타나스는 아직 발표 전이지만, 얼마 뒤 하론과 에리카 공작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때가 되면 로베르는 잠시 순회를 중단하고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때까지 황자님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비밀을 이용해 하론 황자와 한배를 탈지, 아니면 제대로 대립할지."
"모든 걸 알고도 하론과 한배를 타라고? 정신 나간 소리."
"아니요, 하론 황자를 몰아내고 황태자가 되어 교황청과 싸우려는 게 아닌 이상, 그게 당신이 바라던 삶을 얻을 방법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적어도 벨페고르의 부활은 그들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로베르가 그들을 처리해야 할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다.
"원래 평화를 위해서는 약간의 자기기만이 필요한 법입니다, 전하. 벨페고르 마왕이 가장 잘해 낸 일이 아니던가요."
"하여튼 건방진 새끼."
그러나 그의 말대로였다. 제국의 평화가 곧 로베르의 평화가 된다면, 그에 반하는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당신이 무력한 평화를 포기하고 투쟁하고 싶은 날이 온다면, 말씀해 주세요."
"왜, 도와주려고?"
"글쎄요, 제가 늙어 죽기 전에 그날이 온다면 생각해 보죠."
아타나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로베르는 짜증스레 그를 노려봤다.
"아, 그리고 아카키 형님 말인데. 역시 같이 가는 게 좋겠어."
"...예?"
그 말에 아타나스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아카키의 동행을 두고 한참을 대립했다. 아카키가 깨어날 즈음에야 겨우 결론이 나왔다.
* * *
"아, 으윽...."
힘겨운 신음과 함께 아카키가 퉁퉁 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구한테 두들겨 맞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상대가 로베르라는 게 제일 놀랄 일이지만.'
얻어맞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탓에 아카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일그러진 시야에 아타나스가 담겼다.
툭. 뒤이어 종이 한 장이 아카키의 얼굴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뭐야?"
"잘 썼습니다, 황자님."
아카키는 새 이동 스크롤을 쥔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건 왜 돌려주냐?"
"비상용으로 하나쯤은 가지고 계셔야죠."
"지랄. 너, 날 여기다 버리고 갈 생각이었지? 일부러 악마의 손아귀에 던져 놓고 별 같잖은 훈계질은...."
아카키는 오늘 아타나스가 보인 의문스러운 행동들의 진의를 뒤늦게 깨달은 후였다.
아타나스는 아무런 변명 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 년 만에 저와 제국 순회를 나서게 된 소감은?"
"뭘 물어, 좆같지."
"황자님과 제 의견이 같을 때도 있군요. 영광입니다. 하지만 어쩌겠나요, 순회의 주인공께서 원하신다는데."
아타나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저주 검의 상태를 확인하는 로베르를 향해 못마땅한 눈길을 주었다.
그 시선을 확인한 아카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베르가 나랑 같이 가고 싶어 한다고? 아우님이 그런 대인배인 줄은 미처 몰랐군."
"그것만 몰랐던 건 아니실 텐데요. 로베르 황자님에 관해 더 묻고 싶은 것은 없으십니까?"
레라지에를 죽인 직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로베르가 어떻게 과거의 진실을 엿보았는지 의문이 들 법도 했다.
아타나스가 그 이유를 들어 아카키의 합류를 반대하자, 로베르는 금방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건 간단해. 거짓에 진실을 섞으면 되지."
로베르는 자신이 '침범'이라는 고유 능력을 각성했고, 그 능력을 이용해 아카키의 기억을 엿보았다는 이야기를 꾸며 냈다.
그리고 아타나스는 진실과 교묘하게 섞인 거짓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벌써 고유 능력을 각성했다니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런 편한 능력을 얻었다니, 로베르에겐 좋은 일이네."
다행히 아카키는 그 이야기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이미 로베르가 가진 힘을 실감한 직후이기에 가능했다.
"그런 힘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눌려 있었다니. 내가 로베르라면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텐데."
그날의 의식으로 로베르의 코어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아카키는 새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이제껏 로베르의 각성이 신의 농간인 줄만 알았으나, 사실 그건 전부 아카키의 죄였다.
아카키는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놀아나 두 동생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러니 자기 곁에서 갚으시랍니다. 또 하론 황자와 루시안의 손에 이용당해 자길 엿 먹일 바에는 그편이 낫다고요."
아카키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건 로베르가 입지를 다지는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아타나스는 결국 로베르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게 내가 할 일이라면."
아카키는 전과 사뭇 다른 눈으로 로베르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근데, 루시안이 하론 형님의 협조자라는 게 확실한가? 음흉하고 구린 구석이 있긴 해도, 선을 아는 놈이야. 성직 귀족치고 황실에 호의적이고. 작정하고 황실을 농락할 이유가 없어."
"그 이유는 지금부터 찾아야겠죠. 아카키 황자님께 굳이 협조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아타나스는 아카키의 의심을 단칼에 잘라 냈다. 그러자 아카키가 더욱 의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특히 네가 하는 말이라 더 못 믿겠거든. 그건 교황의 뜻이냐, 아니면 네 뜻이냐?"
"황자님은 평생을 외면했던 아우와 고작 하나 남은 친우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나 정해 두세요. 망설이다 둘 다 잃는 일은 없도록."
"말 돌리지 말고, 새끼야."
아카키가 짜증스레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까 했던 말은 뭔데? 교황이 너를 벌주고 싶어서 내 동행을 허가했다니. 내 맹약의 대상이 교황이냐고 물은 것도 그렇고.... 정말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했나?"
아타나스는 성가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당분간 한배를 타게 됐으니 알아 두시는 편이 낫겠죠. 저는 교황에게서 벗어나려 로베르 황자님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 처지고요."
아타나스가 목을 매만지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아카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껏 표정을 구겼다.
"그게 뭔 개소리야?"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끝까지 의심해 주시면 좋겠군요."
"...그건 대체 널 믿으란 뜻이냐, 믿지 말란 뜻이냐?"
"황자님이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죠."
아카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아타나스를 노려봤다.
"다 필요 없고, 하나만 명심해. 저번처럼 다 망쳤다가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널 죽일 거라는 거."
"글쎄요.... 할 수는 있으시고요?"
아타나스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로베르가 든 저주 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성 영웅의 저주받은 유물은 분명 신성력과 마력, 그 상반된 힘의 충돌로 발동했다. 그러니 로베르가 검의 주인이 된 건 필연에 가까웠다.
'저 검에 대해서도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는 주인 된 자가 그 검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43]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3화. 성녀와 그레이 백작가의 영애 (1)
교황청 상층부, 루시안 추기경의 집무실.
루시안은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고귀하고 순결한 신의 여자를 더럽힌 이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그대의 아비이고, 주인이며, 그대가 섬기는 신인 것을."
탁, 탁. 루시안은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위에 놓인 투명한 아티팩트가 조금씩 흔들렸다.
황가의 문장을 닮은 장식으로 둘러싸인 아티팩트는 텅 빈 채였다.
"아카키오는 잘하고 있으려나. 모쪼록 너무 멍청하게 굴지는 말아야 할 텐데."
루시안은 누군가의 신성력이 남긴 푸른 자국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예하, 성녀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그때, 보좌관이 은밀한 목소리로 그녀의 방문을 알렸다.
"고귀한 분의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은 없지요."
루시안은 아티팩트를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실례하겠어요, 루시안."
얼굴을 베일로 가린 성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온몸을 흰 비단옷으로 완전히 가린 차림이었다.
루시안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장갑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나요."
"덕분에요."
성녀가 곧바로 손을 빼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루시안은 말없이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루시안. 루시안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하지만, 오늘 우리의 만남을 성하께서 알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전혀 곤란하지 않습니다, 성녀님. 오히려 기쁩니다. 저는 늘 아타나시오를 질투했거든요."
"네? 그게 무슨...."
"아타나시오보다 저를 찾아 주시기를 바랐다고 해야 할까요. 교황의 그림자에 머무는 사내보다는 제가 성녀님께 훨씬 많은 도움을 드릴 자신이 있어서요."
성녀가 흠칫 놀라 구석에 선 보좌관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안이 괜찮다는 듯 너그럽게 웃으며 신호를 주자, 보좌관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얼굴로 금방 물러갔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보네요. 신을 모시는 제가 사내에게 무언가를 함부로 받을 리가요. 필요한 도움은 언제나 글로리아 사제가 주고 있답니다."
성녀는 애써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러나 루시안은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럼요, 글로리아는 성녀님을 지킬 힘을 가진 여인이니, 더할 나위 없는 상대겠지요."
글로리아는 유일한 여성 사제로, 특권 사제임에도 현재 교황청에 상주하며 성녀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남성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된 성녀를 가장 가까이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글로리아는 순회를 나서지 못하는 처지를 답답해하는 눈치지만요. 안타까운 일이죠."
루시안이 일부러 운을 트자, 성녀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실, 오늘 루시안을 찾아온 건 글로리아 사제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서예요. 그녀의 외출을 허가해 주셨으면 해요."
"음,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루시안이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애써 씰룩이는 입꼬리를 내렸다.
'순진한 성녀가 제 발로 내 손아귀에 들어오다니. 일이 쉽게 풀리겠어.'
특권 사제들의 거취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그들을 통솔하는 루시안의 권한이었다.
아타나스와 아카키의 경우를 제외하면, 굳이 교황에게 따로 보고를 올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루시안이 일부러 시간을 끌수록 그 사실을 모르는 성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부탁드려요, 루시안. 언젠가 저도 그대가 원하는 도움을 드리겠다 약속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다만 글로리아 사제가 직접 청하면 될 일을 굳이 성녀님을 통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가령 그레이 백작령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글로리아는 그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우들을 만나고 싶어 한답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너무 오래 지냈으니까요."
성녀가 장갑을 낀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았다.
루시안은 평생 갇혀 산 탓에 속내를 감추는 법을 모르는 그녀를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하하, 이해합니다. 고향이란 언제나 그리운 곳이지요. 저도 조만간 누님을 뵈러 발렌시아 공작령에 갈 예정이거든요."
"그, 그럼 허락하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글로리아 사제에게 고향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전해 주세요. 로베르 황자님 일행이 그곳에 당도했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로베르 황자가... 그곳에 있군요."
베일 너머로 성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루시안은 씩 웃으며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댔다.
"예. 그나저나 글로리아가 당분간 자리를 비우면 쓸쓸하시겠어요. 제가 말동무라도 되어 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바쁜 몸인지라. 그래도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루시안."
성녀가 들뜬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루시안은 그런 그녀를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언제든 저를 찾아와 도움을 구하셔도 좋습니다. 흔히들 우리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딸을 사랑하고 위협적인 아들을 미워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요."
"무슨 뜻인지, 잘...."
"그분의 아들과 다름없는 저와 딸이나 다름없는 성녀님은 언제든 아버지를 치는 한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랍니다."
"...루시안은 그걸 원하시나요?"
"성전의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남느니, 위협적인 검이 되어 아버지의 목을 치고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게 제 꿈이었답니다, 성녀님."
루시안은 평소처럼 가볍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채로, 반역에 대한 명백한 의지를 드러냈다.
"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성녀님을 위해서라면 억만년의 기다림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저 언젠가 답해 주세요, 성녀님의 꿈은 무엇인지를."
성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다음을 기약하며 순순히 성녀를 보내 주었다.
아직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이미 그는 수많은 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 * *
악마의 숲에서 나온 로베르 일행은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 그레이 백작령으로 향했다.
백작령 외곽에 위치한 교구청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내일 다시 오는 게 낫지 않나? 형님도 저 꼴이고."
녹초가 된 로베르가 길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얼굴이 퉁퉁 부은 아카키가 동조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 말이. 여기 주교는 진즉 저택에 돌아가 만찬을 즐기고 있을 거라고."
"오늘 일을 책잡히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아타나스는 두 황자의 반발을 가볍게 무시하며 교구청 건물로 들어섰다.
교구청의 빗장을 잠그던 부제가 아타나스를 발견하고 다급히 고개 숙였다.
"아타나시오 사제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리무스 주교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오기 전에 연락을 드렸는데...."
"기별만 오고 정작 사람은 오질 않아 기다림에 지쳐 가던 참이네."
건물 앞에 세워진 교황청의 마차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화려한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 안장을 손보던 하인이 다급히 달려가 주교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주교는 하인의 등을 밟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아타나스의 뒤에 선 황자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로베르 황자님. 그런데 뒤에 선 분은, 아카키오 형제님이 맞으신지...?"
주교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곤죽이 된 아카키의 얼굴을 살폈다. 아카키는 혀를 차며 눈을 돌렸다.
"송구합니다, 주교님. 그러나 귀한 발걸음 하신 황자님들을 봐서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암, 교황 성하의 대리자께서 오셨는데 내드려야지. 들어오시게."
주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베르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이미 사제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건물 안은 고요했다. 그들은 어둠이 깔린 복도를 지나 주교의 집무실로 향했다.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다른 건 없습니까? 이를테면 술이라든가."
로베르는 당당한 태도로 금주가 원칙인 루멘교의 주교에게 술을 요구했다.
아타나스가 경악한 얼굴로 입을 떼려던 차에, 주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3황자께서 이토록 화통한 분이신 줄은 몰랐군요. 아타나스, 잘 보고 배우도록 하게. 사내란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주교는 뒤따라온 부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러더니 로베르 일행을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접대용 소파로 안내했다.
그사이 부제는 곧장 집무실과 연결된 지하 창고로 달려가 반쯤 남은 위스키와 얼음 잔을 준비해 왔다.
"얼음이 귀하다고 들었는데. 뭘 좀 아시는 분이군요."
로베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냉큼 잔을 받았다.
아카키는 기가 찬다는 듯 그런 동생을 바라봤지만, 제 앞에 놓인 잔을 굳이 치우지는 않았다.
"이런 날이 오니 기쁩니다. 황자님들과 제가 굳이 반목할 이유는 없지요. 사특한 악마 무리가 우리의 유일한 적인 것을요."
주교는 손수 황자들의 잔을 채워 주더니 아타나스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자네도 한잔하게."
"주교님, 이러시면...."
"자네는 교황께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다는 뻔한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입에 한잔 털어 넣으면 끝날 일이 아닌가. 피차 성가신 일은 없도록 하자고."
주교가 은근히 힘을 실어 아타나스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이미 황자들이 잔을 비운 것을 확인한 아타나스는 마지못해 미소 지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교님."
아타나스는 입술을 살짝 적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하여튼 재미없는 사내라니까. 자네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할 텐데."
주교가 혀를 차며 부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부제는 방 곳곳에 쌓인 서류 더미를 한참 뒤지더니 붉은 실로 감긴 봉투를 찾아냈다.
"특권 사제들에게 전달되는 극비 서류인데, 직접 열어 보시겠습니까?"
주교는 로베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사제들을 건너뛰고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로베르는 붉은 실을 풀고 서류를 테이블 위로 늘어놓았다.
"귀족들의 구마 의뢰가 네 건, 평민의 구마 의뢰가 한 건이군요."
아타나스가 대충 서류를 훑어보더니 빠르게 의뢰 내용을 간추렸다.
"묘한 일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보통은 변방 마을에 사는 평민이 악마의 표적이 되잖나. 악마도 귀천을 따지는 줄만 알았건만."
"악마를 두고 귀천을 논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저 변방에 살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자주 표적이 되었던 것뿐이지."
주교의 말에 서류를 넘겨 보던 아카키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로베르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이 옳아. 인간끼리의 신분 따위 악마에겐 알 바 아니지. 그런데 귀족들을 상대로 한 빙의가 늘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군.'
그건 악마들이 이전과 달리 인간들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왔음을 의미했다.
하급 악마들의 변덕인지, 그들을 지휘하는 상급 악마의 계략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로베르는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든 탓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하지만 빙의자의 수는 지난번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군요. 아직 큰 피해가 생기지 않은 걸 보면 위험도가 높지도 않은 듯하고."
아타나스는 무슨 생각인지 그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정확하네. 파견 사제들의 보고를 보면 다섯 건 모두 하급 악마이고, 빙의 진행도 느리다더군. 사실 요새 백작령 주인의 골치를 썩이는 문제는 따로 있지. 두 개가 있는데, 뭐부터 듣겠나?"
어느새 취기가 오른 주교는 통쾌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떠들기 시작했다.
첫째, 교황의 영향이 적은 땅으로 숨어들어 온 노예 상인들의 불법 사업.
둘째, 언젠가부터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그레이 백작가의 장남.
"이런 조직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하면 민심이 흉흉해지는 건 순식간이야. 그런데 지금처럼 중요한 상황에 후계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별의별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조만간 비밀 의뢰를 받게 되겠군요."
그레이 백작가의 변고를 눈치챈 아타나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네는 교황에게 보고를 올려야겠지. 그렇지 않나?"
"확인된 바가 있다면 그래야겠지요."
"그때 내 이름도 함께 올려 줬으면 좋겠네. 여기는 주교 노릇을 하기에 참 뭣 같은 곳이거든. 나 같은 충신을 이곳에 처박아 두다니, 자네 주인도 나이를 드시더니 혜안이 흐려진 게지."
주교는 슬쩍 본론을 꺼내며 아타나스를 은근히 압박했다.
혹여나 황실파 귀족인 그레이 백작의 약점을 잡게 되거든, 제게도 그 공을 나누어 달라는 뜻이었다.
황실에 속한 백작령의 주교 자리가 탐탁지 않다는 속뜻을 눈치챈 아카키가 한껏 표정을 구겼다.
"제국의 황자 앞에서는 말을 신중히 하시지, 요. 프리무스 주교."
"너무 그렇게 날을 세우지는 마십시오, 아카키오 형제님. 양 진영의 경계에 선 분께는 언제나 선택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 무례한...."
황실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발끈한 아카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황자님."
아타나스가 참으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로베르는 주교의 술병으로 아카키의 잔을 채워 주며 말을 보탰다.
"그래, 형님. 너무 흥분하지 마. 이번 순회에서 주교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언급될지는 우리가 정하는 거잖아?"
"...예?"
"선택지를 가지는 건 언제나 나란 말입니다, 주교님. 교황에게 복종해야 하는 당신 따위가 아니라."
쿵. 로베르가 빈 술병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루멘을 모시는 주교께서 황자들에게 술을 권한 것도 모자라, 교황의 결정을 의심하고 인격마저 탓하다니. 오늘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분명 교황 모독죄는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랬지, 스승님?"
"...예, 그렇습니다."
사악한 미소가 만연한 로베르의 얼굴을 마주한 주교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곳에 주교가 부리는 하인은 있을지언정 교황의 앞에서도 주교의 편에 서 줄 충신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증인이 될 아타나스는 당연히 황자들의 편을 들 터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떠들었더라? 젠장, 저 새파랗게 어린 황자 놈이....'
황자의 요구에 당당히 술 창고를 열어 준 순간부터, 프리무스 주교는 악마의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이제 당신의 실수를 우리가 눈감아 주는 대가로 뭘 해 줄 수 있는지 들어 볼까 하는데."
우선 우리한테 지급되는 여비를 열 배 정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할까.
로베르가 두 손을 비비며 협상을 빙자한 협박을 시작했다. 주교의 창고를 본격적으로 털 생각에 생기를 되찾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44]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4화. 성녀와 그레이 백작가의 영애 (2)
"크하하하! 역시 혓바닥이 긴 놈들은 거기에 술을 적시는 순간 선을 넘는 법이지. 이 정도면 순회 내내 호화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겠어."
교구청을 나서는 길, 두 손 두둑이 금화 더미를 쥔 로베르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로베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레이 백작가의 문장이 박힌 금화를 살폈다.
"수도에서 본 돈이랑 다르네."
"이쪽 은행에서 발행된 주화인가 보지. 어차피 가치는 통일되어 있어서 상관없어. 그보다 재수 없는 주교 놈을 그런 식으로 엿 먹이다니, 황궁에서 자란 보람이 있구나."
아카키가 아티팩트 보관용 주머니에 금화를 쓸어 담는 것을 도우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마구간에서 넘겨받은 백마 세 필을 데려온 아타나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돈은 그렇다 치고, 말은 왜 달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머무는 동안 타고 다니려고."
"어차피 조만간 그레이 백작저에서 마차를 보낼 텐데요. 다음 순회지로 넘어갈 때는 또 이동 스크롤을 쓸 거고요."
"그래서 좋은 놈으로 달라고 했잖아. 팔아서 또 한몫 챙기고 갈 수 있게."
로베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고삐를 넘겨받았다.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시군요."
"덕분에 편하게 가게 됐으니 감사하라고. 그보다 형님, 이 근방에선 어느 여관이 좋은가? 거기로 가자."
로베르는 아까의 주먹다짐으로 정말 해묵은 감정을 털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키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아카키는 안심한 얼굴로 먼저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쪽을 주름잡는 헤이스 상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가자. 잠자리도 편하고, 여기서 가깝거든."
"그리고 황자님을 반기는 여관주의 딸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아타나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끼어들자 아카키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너 내 뒷조사도 하냐? 하여튼 소름 끼치는 새끼."
"제가 알면 교황도 알게 된다는 걸 부디 염두에 두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교황의 충견 놈인데 어련하시겠어. 그 여인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내가 참아야지."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분이네요. 어차피 당분간 어떤 여인이든 황자님의 몰골을 보고 알아서 눈을 돌릴 텐데, 참는 척은."
두 사람은 여관을 정하다 말고 금세 말다툼을 시작했다.
"내가 좀 궁금한 게 있는데, 둘은 왜...."
로베르가 막 물으려던 차에, 아타나스의 주머니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아타나스는 말을 멈추고 곧장 주머니를 열어 통신구를 확인했다. 교황의 전언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두 분이서 먼저 가셔야겠습니다."
"왜, 또 네 주인에게서 전언이라도 왔나 보지? 남한테 절대 발설할 수 없는 그 대단한 전언 말이야."
"황자님, 제가 분명히...."
"아타나스, 이참에 확실히 해 두자. 난 로베르랑 달라. 네가 뭐라고 떠들든 절대 널 믿지 않는다. 이유는 너도 알 텐데?"
"...정 그러시다면."
아타나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카키는 혀를 차며 발을 굴렀다.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딱히 나도 엄청나게 믿는 건 아닌데."
로베르가 중얼거리며 아카키를 뒤따라갔다.
아타나스는 두 황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야 통신구를 귀에 찼다.
"교황 성하의 전언을 받듭니다."
통신구에서 빛이 일었다. 이내 너머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이 늦었구나.]
"아카키 황자님의 합류로 잡음이 생겨서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송구합니다, 성하."
[저런. 그래도 잘 수습했겠지?]
예상대로 교황은 아카키를 갑작스레 합류시킨 것에 관한 설명은커녕 반발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네. 걱정하실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래, 너를 믿는다. 너는 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으니까.]
다행히 악마의 숲에서의 일은 아직 교황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눈치였다. 아타나스는 안심한 채 교황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저주받은 자에 대한 성녀의 예언이 있었다. 예언에 따르면, 그자가 될 후보는 셋이라는구나.]
"...저주받은 자가 여러 명이라는 말씀이십니까?"
* * *
다음 날, 아타나스는 해가 밝자마자 여관과 나란히 붙어 있는 헤이스 상단을 찾았다.
헤이스 상단은 그레이 백작령의 상권을 독점한 곳이자 황실에도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대형 상단이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갑작스러운 사제의 방문에도 헤이스는 익숙하게 아타나스를 반겼다. 그리고 복도 뒤에 숨겨진 은밀한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설마 아침부터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겠지.'
두 황자만 남겨 두고 온 것이 불안한 나머지 아타나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오늘은 정보를 팔러 왔습니다."
"정보라면, 어떤?"
"두 황자님이 저와 함께 제국 순회를 나서게 되셨습니다."
"정보란 선점했을 때 가장 큰 가치가 있는 것이라, 이미 누군가가 떠들기 시작한 이야기는 돈이 되지 않는답니다."
상단주가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고작 사흘째에 벌써 아카키의 합류가 알려졌다는 건, 이 순회를 주목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타나스는 입을 열어 그들 중 누군가는 간절히 바랐고 또 누군가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을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이제 막 악마의 숲 절반을 토벌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 길에 로베르 황자께서 악마 무리의 두 군단장을 처리하셨습니다."
그 말에 상단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타나스의 예상대로, 황실파에 가까운 헤이스는 이 소식을 반기는 눈치였다.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럴 수가, 로베르 황자님께서 드디어...."
"저는 이 정보가 그레이 백작령을 넘어 모든 제국민에게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첫 행보가 로베르의 영웅담으로 알려진다면, 교황청에서도 악마의 숲을 건드린 일을 문제 삼지 못할 것이었다.
"무, 물론입니다. 웬만한 정보는 상단 연합을 통하니... 일주일 안에 모든 귀족이 알게 하고, 한 달 안에 모든 제국민이 알게 하겠습니다."
"교황령과 주교령에는 가능한 한 느리게, 이외의 모든 곳에는 훨씬 빠르게 전해졌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아타나스의 말에 상단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하신다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제님께서는 왜...."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쪽에서 드리도록 하죠. 다만 오늘 저와 상단주는 백작령의 노예상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저 비밀을 지켜 달라는 의도를 알아챈 상단주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드립니다. 노예상에 관해서도 말씀드릴까요?"
"됐습니다. 순회는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것이지, 제국민 구제 사업 따위가 아니니까요."
아타나스는 냉정한 투로 말하며 일어섰다. 그러자 상단주가 다급히 그를 붙잡아 세웠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사제님."
상단주는 방 한편에 놓인 서랍을 뒤져 전단을 쥐여 주었다.
거기에는 수배가 걸린 노예상들의 초상화와 범행 수법, 주요 활동 구역 따위가 적혀 있었다.
"요새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들이 울며불며 상단을 찾아오는 일이 너무 잦아서, 영지민들에게 도움을 주려 만들었습니다."
"이걸 제게 보여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저 사제님이 조금이나마 달리 생각해 보시길 바라서요."
아타나스가 성가신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가 휩쓸고 간 변방의 빈민가에서 쓸모 있는 인간들을 긁어모아 취미가 나쁜 귀족들에게 팔아넘기는 작자들은 어느 영지에나 있습니다."
"그건 알지만...."
"아무리 밟아 죽여도 알을 까서 계속 불어나는 역겨운 해충 같은 거라고요.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그것들이 상단주의 집으로 기어들어 와 모든 걸 좀먹을 겁니다. 상단주의 가족이 입을 옷과 먹을 빵까지, 전부."
"하지만 납치된 이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잖습니까. 우리는 결국 같은 세상을 살고 있으니, 내 가족이 위협받지 않기를 원한다면 남의 가족을 외면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상단주께서 그런 박애주의자이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사업가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성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훌륭한 자세임은 분명하네요."
칭찬을 가장해 비꼬는 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상단주는 자상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는 돈을 좇는 장사치이기 전에, 도리를 지키는 한 사람이고 싶을 뿐입니다. 사제님은 어떠신지요?"
상단주는 끝까지 따라 나와 아타나스를 배웅했다. 결국 그는 억지로 건네받은 전단을 손에 쥔 채 그곳을 나섰다.
헤이스 상단주의 마지막 말이 내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푸핫.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정작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내가 상단을 잘못 골랐나...."
아타나스는 가만히 손안의 전단을 내려다봤다. 흰 장갑 위로 푸른 불꽃이 일며 종이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그런 주제에 가르치려 들긴."
그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불쾌감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함께 언제나 그를 불쾌하게 만들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타나스는 그 얼굴을 잊으려 노력하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잘한다! 아주 박살을 내 버리라고!"
그가 막 입구로 들어섰을 때, 일 층 복도 끝의 식당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무리 지은 사람들이 한곳을 바라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봤어? 체구가 거의 두 배는 큰 놈을 한 손으로 집어 던지잖아?"
쾅! 커헉-.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신음이 번갈아 가며 들렸다.
아타나스는 무심코 바라본 그곳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찾아낸 탓에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하룻밤 사이에 얼굴의 상처를 꽤 회복한 아카키가 인파에서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면 몰라? 싸움 구경하잖아.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카키는 별 놀라는 기색 없이 인파 너머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그는 뒤늦게 수상한 것을 발견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싸우고 있는 마른 체구의 여인은 아주 특이한 형태의 코어를 가지고 있었다.
아타나스가 알기로, 그런 코어를 가진 자는 제국에 딱 한 명뿐이었다.
"하... 거짓말이라고 해 줘."
아타나스가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조금 전 떠올렸던 얼굴을 곧바로 마주하게 된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너 지금 나한테 반말...."
쿠궁-! 아카키가 황당한 목소리로 물으려던 찰나, 멀리서 날아온 거구의 사내가 테이블 위로 나뒹굴었다.
아직 절반도 채 먹지 못한 세 명분의 음식이 그대로 사내의 등에 눌려 짓뭉개졌다.
"꺼어억...."
만신창이가 된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아래로 고꾸라졌다. 쨍그랑! 사내가 온몸으로 쓸어내린 그릇들이 요란하게 깨졌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엉망이 된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헉, 죄송... 아카키 황자님? 아타나스 사제?"
그녀의 입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온 순간,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란히 선 두 사람에게 모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는 듯 곧바로 로브를 벗었다. 대충 묶은 갈색 곱슬머리에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전체적인 생김새와 굳게 다문 입술은 정숙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또렷한 눈빛과 깊게 파인 보조개에서는 그와 상반된 쾌활한 느낌이 흘렀다.
"음, 글로리아?"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아카키가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로리아는 화답하듯 아카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레이 백작가의 글로리아, 제국의 위대하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 지금이, 그런 요란한 인사를 할 때는 아닌 듯한데."
대놓고 짜증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아타나스를 대신해 아카키가 어떻게든 수습을 시도했다.
그때, 무언가 깨달은 아타나스의 얼굴 위로 경악이 번졌다.
"잠깐,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건 설마...."
"그게 사실은, 헉, 서, 성, 읍!"
글로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무심코 성녀를 부르려 했다. 아타나스는 거친 손길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로베르 황자님은 어딨습니까?"
"누가 우리 말을 도둑질해 갔다고 잡아 오겠다던데. 어떤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눈에 띄는 백마를 훔쳐 간 건지...."
대수롭지 않게 떠들던 아카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말 불쾌하지만, 혹시 지금 나랑 같은 생각 중이냐?"
"...."
"...일단 제가 다 잘못했어요."
막내 황자와 성녀가 동시에 사라진 상황이 우연이 아님을 깨달은 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리고 그 시각, 그들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극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45]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5화. 성녀와 그레이 백작가의 영애 (3)
어젯밤, 외출을 허가받은 글로리아는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 곧장 그레이 백작령의 경계에 도착했다.
"렉스는 벌써 잠들었겠지. 이대로 집으로 가 봤자 쫓겨나려나."
글로리아는 우선 가까운 여관으로 갈 생각으로 장정 둘쯤은 족히 들어갈 만한 커다란 짐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때, 짐가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방 틈으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글로리아의 팔을 잡았다.
"끄아아악!"
글로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짐가방을 내던졌다. 가방 안의 내용물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옷가지와 아티팩트 사이로 성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야, 아파라. 도착한 건가요?"
"서, 성녀님? 이게 대체 뭔데요!"
"제가 이 기회를 놓칠 줄 알았나요, 글로리아는 참 순진하다니까."
성녀는 처음부터 글로리아의 외출을 이용해 교황청을 빠져나올 심산이었다. 그리고 루시안의 협조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옷으로 휘감긴 얇은 팔을 뻗었다.
"일으켜 줘요. 밤이 늦었으니 가까운 여관으로 가는 거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장 돌아가셔야 해요, 성녀님."
"정말 그래야 하나요? 이대로 돌아가면 저는 글로리아가 동생의 편지를 받고 백작저에 간다는 사실을 감춰 주기가 어려울 텐데요."
"...밤이 깊었으니 우선 함께 가실까요, 성녀님."
결국 글로리아는 성녀와 함께 헤이스 상단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향했다.
"제가 여기 있는 게 정말 꿈만 같아요. 글로리아도 알다시피 저는 교황청 바깥으로 나와 본 적이 없잖아요. 아타나스는 정말 얼마나 매정한지, 아무리 부탁해도 한 번도 외출을 도와준 적이...."
첫 외출에 들뜬 성녀는 밤새 잠들지 않고 글로리아의 곁에서 떠들었다.
그러더니 날이 밝자마자 식당에서 꼭 식사를 하고 싶다고 글로리아를 보챘다.
"정말 식사만 하시는 겁니다. 장갑은 당연하고, 베일도 절대 벗으시면 안 돼요."
"베일을 쓰고 식사를 하라고요? 글로리아가 손수 먹여 준다면 가능하겠지만...."
"...예, 먹여 드려야죠. 먹여 드리고 말고요."
결국 글로리아는 식당 한가운데서 성녀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성녀는 음식을 받아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글로리아가 방심한 사이 옆자리에 있던 하급 귀족에게로 뜨거운 차를 쏟았다.
"아악! 이봐, 아가씨. 지금 일부러 그랬지?"
성녀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글로리아가 대신 귀족을 향해 연거푸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실수를 하셨어요. 다치신 곳은...."
"누가 하녀 따위에게 사과를 원한다나? 귀한 아가씨께서 직접 고개 숙이시지."
귀족은 성녀의 시중을 드는 글로리아를 하녀라고 오해한 눈치였다. 성녀가 베일 아래로 슬쩍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날 비웃은 건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귀족은 글로리아를 세게 밀쳐 냈다. 그러고는 성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글로리아가 다급히 귀족의 팔을 붙들었다.
"그분께 손대시면 안 됩니다!"
"천한 것이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
실랑이가 벌어진 사이, 성녀는 눈치를 보다가 몰래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여관 구석의 마구간으로 가 백마를 훔쳐 냈다.
"승마를 가르쳐 준 일을 이런 식으로 보답해서 미안해요, 글로리아. 하지만 누구나 목숨이 걸린 일에는 간절해지지 않겠어요."
성녀는 말을 타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즈음 아카키를 따라 식당으로 가던 로베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저, 저 여자가 지금 우리 말을...."
눈앞에서 자신의 것을 도둑맞은 상황은 로베르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로베르는 허기도 잊고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어이, 로베르! 어디 가냐?"
"말 도둑 잡으러."
로베르는 다른 말 한 필을 꺼내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글로리아와 귀족 사내의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는 사이, 거리에서는 성녀와 막내 황자의 격렬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다그닥, 다그닥.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길 위를 울렸다.
로베르는 빠르게 달려 승마에 서툰 성녀를 금세 따라잡았다.
"어이, 말 도둑! 좋은 말로 할 때 거기 서라!"
"헉...."
성녀는 그제야 말의 주인이 자신을 뒤따라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삐를 세게 당겼다. 그녀가 탄 말이 서서히 멈추어 섰다.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할 걸 왜 도망쳐?"
그것을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인 로베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뒷모습만 보이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 내려."
그 순간, 방황하던 그녀의 시선이 좁은 길목에 닿았다. 그녀는 그대로 발을 굴러 다시 말을 몰았다.
"언젠가 사례는 꼭 할 테니 염려 마세요!"
성녀가 탄 말이 좁은 길을 위태롭게 달려 그 너머로 사라져 갔다. 그녀가 남기고 간 외침이 길목 안에 메아리쳤다.
"정 그러시다니 사례를 꼭 받아야겠군."
로베르가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이어 자색 빛이 번지고, 그는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홀로 남겨진 백마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말발굽이 남긴 자국이 여관으로 이어졌다.
* * *
"헉, 허억...."
성녀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도망치기 급급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그렇게 한참을 달린 그녀는 번화가의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진 좁은 길은 환한 거리와 대조되게 어두웠다.
'여기까진 안 쫓아오겠지.'
성녀는 고삐를 꼭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터질 듯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몸을 돌린 그때, 불길한 빛이 일렁였다.
쿠구구궁! 저편에서 묵직한 굉음이 들렸다. 뒤이어 커다란 오크통이 그녀를 향해 굴러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히히힝-! 놀란 백마가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가, 가만히 있어!"
하지만 그녀는 말을 달래지도, 오크통을 멈추지도 못했다.
말이 점점 더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녀는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어?"
일순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솟았다. 그러기를 무섭게 옷자락을 휘날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잡았다."
성녀가 그대로 바닥과 충돌하기 직전, 로베르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콰광-! 그와 동시에 오크통이 신성력에 쓸려나갔다. 통 안에 남아 있던 포도주가 길목을 흥건하게 적셨다.
백마는 주춤거리며 자연스레 로베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로베르는 말이 다치지 않은 것을 보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흠집이라도 났으면 반값도 못 받았겠지.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어?"
로베르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짜증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선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줄 사례는?"
"...."
"이건 뭐야, 거슬리게. 도둑놈 얼굴이나 한번 보자."
로베르는 대뜸 손을 뻗어 얇은 베일을 걷어 올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뒤늦게 올라온 그녀의 손이 힘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살폈다.
'뭐지? 인간이라기엔....'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머리칼과 같은 색을 머금은 눈동자는 본 적 없는 바다를 연상케 했다.
깊은 눈매와 둥글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높은 코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백 년을 살아온 로베르의 기억 속 누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새하얗고 핏기 없는 피부에서는 어떤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살아 숨 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박제된 명화나 조각상의 것과 닮아 있었다.
"너, 예쁘다. 아니, 그 반대인가."
로베르는 갸우뚱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계속해서 살폈다. 성녀가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례하시네요."
"말 도둑이 예의를 논해?"
"그대도 지금 제 베일을 훔치셨으니, 비긴 것 아닌가요?"
그녀가 베일을 되찾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는 베일을 높이 들어 올려 그녀의 손을 피했다.
"뻔뻔하긴. 그보다 이건 왜 쓰고 다니지? 가리고 살기엔 아깝지 않나."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튼 그대가 상관할 바 아니죠. 돌려주세요."
"얼굴을 꼭 가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 봐?"
로베르가 씩 웃으며 베일을 흔들어 보였다.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며 천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성녀는 얼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방금 뭘 하신 거죠?"
"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걸로 사례를 대신할까 해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로베르의 자색 눈동자가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성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기억을 더듬어 그 눈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려 냈다.
"그 초상화. 그럼 혹시 당신이...."
"알리아나!"
그 순간, 멀리서 아타나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쳇, 또 한 소리 듣겠군. 그런데 너...."
로베르는 백마의 고삐를 잡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아본 성녀가 로베르의 옷자락을 쥐었다.
"도와주세요. 아타나스에게 들키면 안 돼요."
"역시, 저놈이랑 아는 사이였냐?"
성녀가 불안한 눈으로 바깥쪽을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교황청 쪽 인간인가? 아, 뭔가 귀찮은 냄새가 나는데.'
성가신 기운을 감지한 로베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뗐다. 그러고는 공중으로 자색 빛을 쏘아 올렸다.
"방금 뭘... 도와 달라니까요!"
"그래, 일단 아타나스한테 물어보고."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겠어요."
"또 뭘 하려고...."
로베르가 성녀에게 눈을 돌린 찰나, 그녀가 벗어 던진 장갑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동시에 성녀의 손끝이 백마를 스쳤다.
"너에게 신의 은총을 허락하노라."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백마가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그것은 본래 형태를 잃고 커다란 구로 변했다.
로베르는 입을 떡 벌린 채 조금 전까지 말이었던 그것을 바라봤다.
"지금, 내 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신의 성물로 거듭나는 영광을 내렸어요."
"뭐? 누구 마음대로!"
"사람이 많은 곳으로, 아타나스가 절대 나를 찾을 수 없도록."
성녀가 구에 기댄 채 마지막 주문을 속삭였다. 그러자 그것은 이내 빛으로 다듬어진 마차가 되었다.
"속박."
성녀가 산뜻하게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기를 무섭게 빛줄기에 포박당한 두 사람은 마차 안으로 던져졌다.
바깥에서 볼 때와 달리, 마차 내부는 수십 명은 족히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신성한 기운이 그 공간을 빈틈없이 채웠다.
"우욱...."
로베르는 그 힘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쿠쿵-. 거대한 바퀴가 포도주가 스민 길 위를 굴렀다.
그들을 태운 마차는 매서운 속도로 달려 골목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이, 저거...."
골목을 향해 달려오던 사제 셋의 눈길이 일제히 성녀의 손에서 탄생한 새로운 성물로 모였다.
그러나 미처 그것을 제대로 눈에 담기도 전에, 마차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젠장, 알리아나! 대체 무슨 짓입니까!"
아타나스가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급히 마차를 겨냥했다.
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마차는 멀리 떠나간 뒤였다. 바퀴가 남긴 흔적이 선명히 남았을 뿐이었다.
로베르는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의 잔상을 뒤로하고 성녀를 노려봤다.
"진짜 성가신 여자네. 대체 정체가 뭐야?"
"처음 뵙겠어요, 로베르 황자. 저는 신을 모시는 신성 제국의 성녀, 알리아나입니다."
그녀가 짧은 인사를 건네는 사이, 마차는 더 깊숙한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로베르는 당장 새로이 알게 된 정보를 받아들이기 바빴다.
'성녀라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망할 저주를 내렸다는 그 성녀?'
그러나 눈앞의 그녀는 자신의 또래로 보였다. 신성력 각성자들은 노화가 느린 편이라지만, 몇십 년간 젊음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너 혹시 몇 살이냐?"
로베르의 물음에 알리아나가 어딘가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모릅니다. 그저 아타나스와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네 나이를 누구한테 들어서 안다고?"
"저를 아는 모두가 제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를 바라니까요."
"그럼 내게 저주를 내린 성녀는 네가 아니란 건가?"
"그건 전대 성녀님께서 내리신 예언입니다. 다들 그분이 진짜 성녀였고, 저는 불완전한 가짜일 뿐이라고 해요.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이유로 평생 교황청 밖을 나서 본 적이 없죠."
'성녀가 계승되었는데, 그 사실을 바깥에서는 모른다. 알수록 어마어마한 곳이군.'
교황청은 정말 무수히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비밀을 안은 성녀를 철저히 길들여 온 모양이었다.
지식과 정보를 제한하고 철저히 고립시키는 방식은 언젠가 다른 마왕들이 그에게 시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그런 방식은 언제나 실패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를 만나고 싶었어요, 로베르 황자."
"나를 왜?"
"그대가 저를 구원해 줄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로베르가 진의를 물으려던 찰나, 지나치게 익숙한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결계?'
곧이어 큰 마구간처럼 지어진 허름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이거 왜 안 멈춰?"
"그, 그것까진 잘...."
쾅!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건물을 들이받았다. 벽이 움푹 파이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충돌로 균형을 잃은 마차는 그대로 기울어져 구멍에 박혔다.
쿠궁, 퍽! 속박에서 풀려난 로베르와 알리아나는 힘없이 튀어 나가 바닥을 굴렀다.
"아악! 살다 살다 이슈... 그녀보다 짜증 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로베르가 입안의 흙을 뱉어 내며 짜증스레 소리쳤다.
"로, 로베르...."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발견한 알리아나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로베르는 천천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칭-. 수많은 검이 나란히 주저앉은 두 사람을 겨누었다.
"정체를 밝혀라, 침입자!"
썩은 내가 진동했고, 곳곳에 피 묻은 채찍이 굴러다녔다. 그 사이로 허름한 옷을 입고 목줄을 맨 수십 명의 아이들이 엎드려 있었다.
"같이 똥통에 처박히는 게 네가 바라는 구원인가 보지?"
로베르는 검날에 비친 성녀의 얼굴을 가만히 노려봤다.
[46]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6화. 억압된 것의 귀환 (1)
그곳은 경매에서 팔리지 않거나 탈출을 시도한 노예들을 처분하는 소각장이었다.
로베르와 알리아나가 들어온 입구의 맞은편에는 수레는 물론이고 짐마차까지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커다란 문이 있었다.
로베르는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누군가의 피와 살점이 스며들어 검붉어진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원한이 가득하군. 마계의 땅이라고 해도 믿겠어.'
목줄을 찬 수십 명의 아이들도 머지않아 그 흙으로 스며들 운명인 듯했다.
아이들은 서슬 퍼런 칼날을 보고 겁에 질렸다. 허름한 옷가지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에는 학대의 흔적이 가득했다.
"윽, 흐아아앙!"
"시끄럽게 굴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지린내가 진동했고,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철썩-. 그러기를 무섭게 아이의 등 위로 채찍이 떨어졌다.
"끄읍...."
남자는 두꺼운 말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채찍이 지난 자리를 따라 핏방울이 흩날렸다. 아이는 혀를 깨문 채 경련하다 정신을 놓아 버렸다.
"히, 히익."
아이들이 놀란 숨소리를 흘리며 반대편으로 기어갔다. 상황을 지켜본 알리아나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할 수 있죠? 신의 단죄가 두렵지도 않은가요!"
"하하하하! 이봐, 아가씨. 차림새를 보니 어디 귀족가의 따님이신가 본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관둬. 귀족 놈들은 걸음마도 떼기 전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법부터 배운다고 하잖나.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검을 든 남자들이 그녀를 비웃으며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지금 제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로베르와 알리아나는 짜증스레 말을 주고받으며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다.
로베르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적의 숫자와 위치를 파악했다.
'열댓 명 정도. 죄다 무장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들이군, 우두머리는 저놈인가.'
로베르의 시선이 구석에 처박힌 마차에 닿았다. 요란한 옷차림의 남자가 마차를 살펴보며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마차가 대체 뭐길래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거지?"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차를 툭툭 건드렸다.
그의 팔목에 걸린 두꺼운 황금 팔찌가 번뜩인 순간, 로베르는 교구청에서 본 노예상 관련 문서를 떠올렸다.
"노예상 중 한 놈인가. 골치 아프게 됐군."
로베르가 중얼거리자 남자들이 움찔 놀라며 검을 더 깊숙이 들이댔다.
"설마 백작가에서 나온 사람인가?"
"잠깐. 내 허락 없이 여기에 들어온 이유를 알아야겠어."
노예상이 손을 들어 올리자 수하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노예상은 그들 사이를 헤치고 두 사람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번들거리는 구두 끝으로 로베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왜겠어? 대가리를 잘 굴려 봐."
로베르는 여유롭게 대꾸하며 몰래 허리춤을 짚었다. 그러나 손에 잡혀야 할 아티팩트 보관 주머니가 그곳에 없었다.
'젠장, 방에 두고 왔나? 망했군. 인간은 죽이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미 노예상의 소굴로 들어와 모든 것을 봐 버린 후였고, 검을 든 그들은 자신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신성 제국의 황자, 로베르 율리오 드 에피파네스다. 이제라도 검을 거두면 오늘의 무례는 없던 일로 해 주지."
로베르는 그것이 가장 평화로운 해결책이 되기를 기대하며 대뜸 제 정체를 밝혔다.
"황자! 이런 곳에서 함부로 정체를 밝히다니요! 순회 중에는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고요히 움직여야 한다는 걸 배우지 못했나요?"
"이거 진짜 웃기는 여자네? 다 너 때문이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저도 성물이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할 줄은 몰랐다고요!"
"몰랐다고 하면 다야? 그래, 그럼 네가 다 해결해. 여기 인간들을 죄다 죽여 놓고도 몰랐다고 우기면 되겠네. 그래도 다들 봐줄 거 아니야, 넌 성녀니까!"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노예상과 수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핫! 저놈이 지금 뭐래냐? 지가 제국 순회 중이라는 그 유명한 막내 황자라고?"
"한술 더 떠서 성녀님도 함께 오셨다지 않습니까. 하하,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이지 싶습니다."
"어린 귀족 나리들이 경매장과 소각장 위치를 헷갈렸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요. 미친 연놈 둘이서 손잡고 나돌다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대놓고 로베르의 말을 비웃으며 두 사람을 조롱했다.
로베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았다. 로베르는 낮게 웃으며 제 턱을 건드리는 발목을 잡았다.
"죽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맞지?"
뚜둑-. 로베르는 발목을 반대로 꺾어 버렸다. 뼈가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끄아악! 이, 이 새끼가...."
노예상이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진 찰나, 신성한 빛이 깔끔한 반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크윽!"
수하들은 힘에 떠밀려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들이 놓친 검들이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뭐야, 진짜 다 평범한 인간들이잖아? 약한 놈들끼리 돕고 살지 그랬어."
로베르는 가장 가까운 검을 잡아채 손안에서 돌렸다.
쿠궁. 뒤이어 열댓 자루의 검과 수하들이 사이좋게 바닥을 굴렀다.
"꺄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피해 이리저리 흩어졌다. 로베르는 발목을 붙잡은 채 꿈틀거리는 노예상을 내려다봤다.
"그랬으면 오늘 나한테 이렇게 처맞을 일도 없잖아. 자, 일어나."
로베르가 손을 까딱이자 보이지 않는 인력이 노예상의 몸을 일으켰다. 로베르는 두꺼운 검면으로 그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퍽! 파열음과 함께 순금 귀걸이가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노예상은 옆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다음은 누가 일어날래?"
로베르가 순금 귀걸이를 챙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서 장난스러운 표정과 대조되는 싸늘한 눈빛으로 검을 향해 기어가는 수하들을 둘러봤다.
수하들이 흠칫 놀라며 곧바로 다시 엎어졌다. 그리고 죽은 척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커헉, 헉, 주인이시여, 저에게 힘을...."
노예상이 숨을 헐떡이면서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지?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로베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다.
"으흑, 흐아앙!"
"움직이지 마라! 아니면 이 애새끼들은 다 죽어!"
어느새 아이들 사이로 이동한 노예상이 크게 소리쳤다. 그는 가까이 있던 여자아이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인질이라는 거지?"
로베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경고하듯 아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만둬요, 당장!"
성녀의 외침은 그를 멈추지 못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강한 힘으로 아이의 목을 짓눌렀다.
"끄억, 켁!"
아이가 발버둥 치며 노예상의 팔뚝을 할퀴었다. 그러나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이의 작은 손톱이 힘없이 바스러졌다.
"네가 정말 황자라면,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죄 없는 제국민을 다치게 할 수는 없겠지."
로베르는 피식 웃으며 손안의 검을 반 바퀴 돌려 검날이 뒤로 오도록 고쳐 잡았다.
"아닌데?"
로베르는 망설임 없이 검을 던졌다. 검이 회전하며 매서운 속도로 표적을 노렸다.
노예상은 다급히 아이를 방패막이 삼아 몸을 웅크렸다. 서걱-. 검 끝이 아이의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벽에 박혔다.
극도의 공포에 질린 아이가 경련했다. 그러다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놓아 버렸다. 노예상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너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뭐라는 거야. 설령 그 꼬마가 죽더라도, 그건 너 때문이잖아?"
로베르는 바닥에 나뒹굴던 다른 검을 걷어차 눈높이까지 띄웠다. 그러고는 또다시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잡아챘다.
"로베르 황자, 그만하세요! 정말 저 아이를 죽일 셈인가요?"
로베르가 아이의 안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성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멈춰 세웠다.
"죽이지는 않으려고 나름 조절하고 있다만, 슬슬 짜증 나네. 능력도 함부로 못 쓰고. 그러니 도와줄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다시... 다시 생각해 주세요, 황자. 죄 없는 아이가 다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성녀는 검을 든 로베르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로베르는 성의 없이 팔을 휘저어 그녀를 떨쳐 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쉽게 이길 수 있는 걸 질질 끄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저 힘없는 아이들을 보세요. 저들이 가엽지 않으십니까?"
로베르는 무심한 눈빛으로 축 늘어진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의 상태도 처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처음 본 인간들의 고통 따위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딱히."
망설임 없는 답에 성녀의 얼굴 위로 절망 어린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더욱 단호한 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저들은 그대가 지켜야 할 그대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제국의 황자라면, 마땅히 그들을 위한 선택을 하세요."
"싫다면?"
"결국 황자의 선택에 달린 일이니 더 드릴 말은 없겠어요. 다만 이건 제국의 성녀로서 드리는 말씀이라는 걸 기억하시길."
알리아나는 제국의 황자로서 성녀와 척질 요량인지 묻고 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로베르는 마지못해 검을 거두었다. 성녀라는 존재가 얼마나 성가신지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교황청에는 성스러운 얼굴을 꾸며 내 방심시킨 다음 협박으로 뒤통수치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라도 있나 보지? 하는 짓이 아타나스와 똑 닮았군."
"네? 그게 무슨...."
치지직-. 로베르가 그때 일을 언급하자 경고하듯 계약의 표식이 드러났다.
로베르는 팔뚝을 걷어 표식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 상황을 가장 평화롭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냈다.
'가만, 몰래 계약을 맺어 버리면 끝날 일 아닌가? 노예상을 수하로 두면 이래저래 써먹을 수도 있을 테고.'
문제는 성녀가 바로 곁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그녀의 앞에서 마계어를 입에 담는 건 위험했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역시 그대도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건 내키지 않았던 거죠?"
"뭐, 그렇다 치자. 그래서 말인데, 잠깐 잠들어 줘야겠어. 알리아나."
로베르는 싱긋 웃으며 손날로 알리아나의 목덜미를 가볍게 내리쳤다.
"아...."
털썩-. 순간 모든 힘이 빠져나가며 그녀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새하얀 옷자락이 흙으로 더럽혀졌다.
로베르는 그녀가 정신을 잃은 걸 확인하고 다시 노예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잔소리하는 인간이 사라졌으니,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서, 설마 방해가 된다고 연인까지 죽인...."
"연인을 죽이는 건 엄청난 죄인가 봐? 힘없는 어린애들을 패 죽이는 놈도 기겁할 만큼?"
알리아나가 죽었다고 오해한 노예상은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 쳤다.
로베르는 성큼성큼 걸어 그를 금방 따라잡았다. 걸음마다 스산한 기운이 퍼졌다.
"오, 오지 마!"
노예상이 품에 있던 여자아이를 로베르에게로 내던졌다. 로베르는 몸을 돌려 아이를 피했다.
쿵-! 아이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선명한 자색 눈동자는 계속해서 사냥감만을 좇았다.
그는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점점 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지 말라니까! 너 대체 뭔데, 정체가 뭐냐고!"
결국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촤아악-. 그가 손에 잡히는 대로 흙을 뿌려 댔다. 그러나 로베르는 여전히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주, 주인이시여.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살려 주세요, 제발."
그는 손끝이 다 헐도록 흙을 잡아 던지고, 또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피가 서서히 바닥으로 스며들어 갔다.
"네가 살 방법을 알려 줄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로베르가 가만히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 제발, 모,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남의 목숨을 쉽게 짓밟는 놈들은 제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아주 쉽게 하더라."
로베르는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며 발끝을 세워 그를 세게 걷어찼다.
"커헉-."
그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레 신음했다. 그의 팔뚝에 난 생채기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너는 나와 계약하는-."
로베르는 곧장 주문을 발동하려 했다. 그때, 상처를 따라 새겨지던 마법진이 어떤 힘에 의해 일그러졌다.
파지직-. 마력이 충돌하며 그 반동이 전해져 왔다. 로베르는 쓰러진 여자아이를 주워 그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펑! 그러기를 무섭게 허공에 작은 폭발이 일었다. 마력 찌꺼기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로베르는 신성력을 발산해 마력을 씻어 내렸다.
그 너머로 피투성이가 된 노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베르를 보는 그의 눈은 고통이 아닌 환희에 차 있었다.
"설마 당신께서...."
로베르의 마법진이 사라진 자리에, 그보다 오래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건 로베르가 새기려던 것과 완벽히 같은 형태였다.
"하, 전멸은 무슨. 살아 있잖아."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타나스의 말과 달리, 자신의 일족은 전멸하지 않은 듯했다.
영혼을 건 계약으로 노예상의 주인이 된 자는 분명 나태 일족의 상급 악마였다.
[47]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7화. 억압된 것의 귀환 (2)
성녀의 마차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냥 다 죽었으면."
아타나스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누적된 분노에 제 몫이 크다는 걸 아는 아카키는 이번만큼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글로리아가 아타나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문을 텄다.
"저, 저기 아타나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제가 성녀님을 잘 지켜봤어야 했는데."
"귀하게 자란 백작가의 영애께서 어떻게 알리아나를 감당하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아타나스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그러자 글로리아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여전히 저를 귀족 영애로 대하시네요."
"그게 당신이니까요, 글로리아 님. 백작 각하의 용서를 받으면 언제라도 백작저로 돌아가실 것 아닌가요."
그 말에 글로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런 착한 딸이었다면 처음부터 아버지의 분노를 사는 일도 없었겠죠."
"아, 그러십니까."
아타나스는 별 흥미가 없는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바퀴에 파인 자국을 살폈다. 그 자국은 언덕 너머로 길게 이어졌다.
"황자님, 글로리아 님을 데리고 여관으로 돌아가 계시겠어요."
"성녀님을 지키는 건 제 역할입니다. 아타나스의 생각이 어떻든, 저를 배제하실 수는 없어요."
예상대로 글로리아는 아타나스의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쓸데없는 언쟁을 이어 가는 대신 아카키를 바라봤다.
"황자님."
"아까 그 난리를 치고 도망 나왔는데, 다시 가라고? 별로 내키지가 않네."
아카키는 그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누구 하나 도움이 되질 않는군.'
아타나스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글로리아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아카키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까딱였다.
"같이 가도 된다는 뜻이야. 가자."
"저는 알아서 돌아가시라는 뜻이었는데요."
"그러든지 말든지."
아카키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글로리아와 함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바퀴 자국을 따라 인적이 드문 마을로 들어섰다. 폐가처럼 보이는 허름한 집들이 줄지어서 있었다.
"악마라도 지나갔나, 왜 이렇게 텅텅 비어 있어? 성녀는 대체 왜 로베르를 납치해서 이런 곳으로 데려간 건지."
"이상한 곳에 간 건 아니셔야 할 텐데.... 그나저나 저희 영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치안소에 전달해야겠어요."
두 사람이 아무런 의심 없이 길을 걷는 사이, 어두운 창문 너머로 이따금 겁에 질린 눈동자가 비쳤다.
아타나스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쓰는 건가. 장사 규모가 생각보다 크군.'
성녀와 황자가 노예상의 소굴로 들어갔다는 걸 눈치챈 아타나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물 마차가 남긴 흔적을 쫓아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다.
"윽, 이게 뭔 냄새야...."
아카키와 글로리아가 인상을 쓴 채 코를 틀어막았다. 반면 아타나스는 덤덤한 얼굴로 냄새를 맡았다.
'살이 썩는 냄새와 탄내가 섞여서 나는 걸 보면, 안 팔리는 폐기품들을 처리하는 곳이 있나 보군.'
악취의 근원지는 노예 처리소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베르와 알리아나는 그곳까지 간 것 같았다.
"알리아나가 왜 갑자기 그곳을 나왔는지 짐작 가는 부분은 없으십니까?"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글로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은 원래 늘 바깥을 보고 싶어 하셨어요. 각 영지의 지도와 교황청 약도를 모아 탈출 계획을 세운 것도 여러 번이었고요."
"하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으시죠."
"그게 성녀님의 의지였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성녀님은 할 수만 있다면 진즉에 그곳을 나오셨을 거예요."
"인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실패할지언정 시도라도 해 보는 법입니다. 알리아나가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면, 벌써 몇 번은 도망치려 했겠죠. 이제 와서 이러는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잠깐."
아타나스가 두 사람을 멈추어 세웠다. 어느새 그들은 마차가 남긴 이정표의 끝에 도달한 뒤였다.
허물어진 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늘진 공터의 한가운데서 흔적이 끊어졌다.
"여기가 맞아? 마차도 뭣도 없는데."
아카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타나스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결계가 있군. 이만한 규모의 마력 결계는 처음 보는데....'
아타나스는 성역을 해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손을 뻗었다.
치지직-. 두 힘이 맞닿은 순간,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끼기긱, 쾅! 두 막의 경계에서 큰 폭발이 일었다. 아타나스의 성역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 아타나스!"
글로리아가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카키는 한쪽 팔로 그녀를 막으며 본능적으로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어이, 아타나스. 방금 뭐냐?"
"별거 아닙니다. 악마의 결계가 있군요."
아타나스는 신성력을 발산해 막에 붙은 불꽃을 씻어 내렸다. 탁 트인 시야 위로 낯선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결계의 불꽃이 타오르며 경고하듯 고대 마계어를 남겼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문장을 읽어 냈다.
"허락받지 않은 자야, 물러가라. 이곳은 나의 권능이 지배하는 곳이다."
"뭐?"
"침입자를 향한 경고네요. 이래서야 어느 일족의 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아카키가 흠칫 놀라며 결계 너머를 가리켰다.
"어이, 그렇다는 건 여기가 악마 소굴이라는 거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아마 노예상의 패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중 마력 결계를 쓰는 놈이 있다는 거겠죠."
"그걸 왜 지금 말해! 성녀가 로베르를 납치해 여기로 왔다는 건,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잖아?"
아카키의 푸른 눈동자가 매서운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타나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알리아나는 제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모양이니, 제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했겠죠. 그 결과일 뿐, 다른 의도는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황자님보다는 제가 그녀를 더 잘 아니까요."
아타나스는 목걸이를 풀어 검 아티팩트를 꺼냈다. 그러고는 신성력을 불어넣어 단숨에 내리쳤다.
파지직-. 검이 닿은 자리를 따라 다시금 불꽃이 일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한 마력이 전해져 왔다. 아타나스는 반동을 이겨 내며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쾅, 쾅! 결계에 흠집이 날 때마다 강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화염이 성검을 집어삼킬 듯 높이 타올랐다.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되나."
아타나스는 마지못해 검을 거두었다. 두 손가락을 붙여 검면을 쓸어내리자 금세 불길이 걷혔다.
'성물이 충돌 없이 통과한 걸 보면 강한 수준은 아닐 텐데, 까다롭군. 성역으로 깨트리는 건 너무 위험하고.'
결국 가장 성가시고 느린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타나스는 혀를 차며 악마의 결계 범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그 위로 결계 전체를 덮을 만한 신성 결계를 내렸다.
"황자님, 정화 기도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으십니까?"
"너 같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책 한 권 분량을 어떻게 통째로 외우냐?"
"저는 기도문 전체를 읊을 일이 없어서 건너뛰었거든요. 일단 기억나는 부분이라도...."
"저, 저기.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는데요."
넋을 놓은 채 아타나스를 지켜보던 글로리아가 소심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아카키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화 기도문을 외웠다니. 드디어 주문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아직 속박 주문도 운이 좋을 때나 간신히 성공하는 수준이지만... 워낙 남는 시간이 많아서 웬만한 기도문은 달달 외웠어요."
"그럼 좀 도와주시죠. 기억나는 대로 읊어 주시면 됩니다."
아타나스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글로리아는 기쁜 듯이 곧장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네,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런데 뭘 하시려고요?"
아타나스는 성검을 들어 신성 결계 위로 문자를 새겼다.
"여기에 정화 기도문을 새겨서 그대로 덮을 겁니다. 그게 충돌 없이 상대 쪽 결계를 무력화시킬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요."
"와, 그런 방법이.... 그런데 기도문 전체를 새기려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안쪽에서 분명 위험한 일이 생길 텐데요."
"로베르 황자님이 함께 계시고, 알리아나도 마냥 무력한 분은 아니니 잠깐은 버티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는 성녀님이 아니라 주변이 위험할 거라는 뜻이었어요."
글로리아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신성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먼 과거에, 상급 악마들은 인간과의 계약을 통해 두 세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그렇게 인간들의 문화를 배우고 일족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으며, 때가 되면 계약자들의 영혼을 회수해 힘을 키워 나갔다.
"우리들의 상생을 위해 이중계약은 불가하다는 조건을 걸도록 하지. 다른 악마의 계약자를 건드리는 자는 평화협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더 강한 일족들이 계약자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루시퍼는 그런 불문율을 내걸었다.
이후에도 좋은 조건을 가진 계약자를 선점하기 위한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나, 감히 루시퍼의 명령을 어기는 악마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로베르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 불문율을 어기고 말았다.
"오랜 약속을 어기셨군요, 나의 주인이 섬기는 왕이시여."
만신창이가 된 노예상이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목에 새겨진 계약의 표식이 불길하게 타올랐다.
'확실해, 저 뒤에 있는 건 내 일족 놈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타이밍에 나타난 이유는 또 뭐지?'
로베르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노예상의 얼굴에서 환희가 서서히 걷혔다.
"제가 반갑지 않으십니까?"
"...너, 누구야?"
"그저 진창에서 원석을 찾아내어, 충분한 값을 받고 귀족 나리들께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평범한 상인일 뿐입니다요."
노예상은 비굴한 말투를 흉내 냈으나, 두 눈은 조금 전 목숨을 구걸할 때와 달리 선명한 빛으로 차 있었다.
그 너머에 자신을 알아본 악마가 있음을 직감한 로베르가 표정을 굳혔다.
한기를 머금은 자색 눈동자가 악마를 응시했다.
"벨페고르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노니, 응답하라, 이름 모를 악마야."
"윽...."
복종을 명하는 마왕의 주문이 울렸다.
노예상이 심장을 움켜쥔 채 고통스레 신음했다. 강한 마기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와 그 육신을 뒤덮었다.
이윽고 노예상의 안에 강제로 불려 온 악마가 입을 열었다.
"하하, 심장의 절반도 완성하지 못하셨군요. 이래서야 저희의 왕으로 남으실 수 있겠습니까."
'마기의 주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군. 내 명령에 저항하고 있는 건가?'
그 정도 힘을 가진 악마라면, 분명 일족의 군단장 중 하나였다.
로베르는 잠시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다.
생존한 나태 일족의 악마가 몇이나 되는지 확인하고, 노예상을 계약자로 삼아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죽여서 후환을 없앤 뒤 이곳에 있는 인간들의 입막음까지 해야 했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었다.
"권능...."
로베르는 우선 악마를 강제로 굴복시켜 그 정체를 알아낼 생각으로 권능을 발동하려 했다.
그때, 뒤편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알리아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젠장, 왜 벌써 일어나?"
"저건...."
계약자와 달리 그 주인은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봤다. 제국의 성녀를 마주한 악마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저런 것과 함께하시는 저의를 여쭙겠습니다, 왕이시여."
성녀는 마기에 잠식된 노예상과 그 너머의 상급 악마, 그에게 왕이라 불린 로베르를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생기가 완전히 가신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한 순간, 로베르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닥쳐."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의 왕도 뭣도 아니니까, 아는 척하지 말라고."
로베르가 이를 악물고 작게 속삭였다.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태 일족의 군단장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왕의 배신을 직감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마는 있는 힘껏 웃어 젖히며 노예상의 입을 통해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하하, 하하하하! 봐, 이슈타르. 그놈은 희망이 없다니까? 심장을 되찾는다고 저 썩어 빠진 악마성이 개선될 리가."
"이슈타르가 살아 있...."
순간 로베르는 성녀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이슈타르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슈욱-. 그러나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노예상이 로베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악마의 힘에 잠식된 눈의 흰자위가 어느새 검게 물든 뒤였다. 마력이 실린 주먹이 그대로 로베르의 가슴 정중앙을 노렸다.
퍽! 로베르는 반사적으로 코어를 감싼 채 나가떨어졌다. 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노예상은 곧장 그를 따라잡더니 그의 복부에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그 자리를 따라 꽤 많은 양의 마력이 응집되었다.
'무슨 계약자를 이런 식으로 써먹어? 평범한 인간 몸은 마력을 버티지 못할 텐데.'
예상대로 마력이 미처 방출되기도 전에 노예상의 팔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따라 육신이 부스러기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노예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힘껏 마력을 뿜어냈다.
'젠장, 계약을 건드린 직후라 함부로 공격하면 안 되는데.'
로베르는 급한 대로 신성력을 끌어와 복부에 모았다. 퍽! 그 위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파지직-. 주먹에 실린 마력은 신성한 기운에 밀려 힘없이 사그라졌다.
한쪽 팔이 완전히 사라진 찰나, 노예상은 반대쪽 팔에 마력을 실어 로베르의 옆구리에 내리꽂았다.
쾅! 로베르는 그대로 밀려나 벽에 내리꽂혔다. 그가 부딪힌 자리가 움푹 파이며 그곳을 따라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켁, 이 자식이 감히!"
성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멀리 처박힌 로베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노예상은 아직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이 잘못된 길을 가려 하니, 내 몸을 바쳐 길목을 막겠다. 네 곁에서 인간을 흉내 내는 저자가 바로 우리들의...."
'성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내 정체를 밝히려 해?'
로베르가 다급히 몸을 일으킨 그때, 빛을 등지고 선 성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창백하게 흰 손이 노예상의 얼굴을 덮었다. 성녀는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악마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에게 신의 은총을 허락하노라."
환한 빛이 일더니, 악마의 계약자는 순식간에 그 형체를 잃고 완전한 구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아직 갈 길이 멀군요, 로베르 황자."
로베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명화에 박제된 듯한 아름다운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무언가를 초월한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그곳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제국의 진짜 성녀였다.
[48]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8화. 억압된 것의 귀환 (3)
성녀의 손길은 악마와 계약한 죄인의 영혼과 육신을 단번에 빼앗았다.
"허억-."
바싹 엎드린 채 상황을 지켜보던 노예상의 수하들과 목줄을 찬 아이들의 얼굴에 같은 공포가 서렸다.
검붉은 흙 위에 더럽혀진 장갑이 나뒹굴었다. 그 장갑을 밟고 선 성녀는 검은 구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왕을 인도할 등불이여,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세요."
그녀의 의지를 받아들인 성물이 형태를 갖추었다. 성녀는 투명한 구슬이 알알이 박힌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간단한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로베르는 잠자코 성녀를 바라봤다.
두근두근. 그녀를 마주하자 심장박동이 점점 거세졌다. 몸속의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어에 새겨진 그녀를 향한 경애심과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악마의 충동이 동시에 일었다.
로베르는 간신히 본능을 억누른 채 그녀를 마주했다.
"너, 알리아나가 아니지?"
"그럴지도, 혹은 아닐지도요."
"그게 뭔 소리야?"
"당신이 로베르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성녀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눈매 사이로 싸늘한 눈동자가 엿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로베르를 향해 다가왔다. 로베르는 성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여자는 대체 뭐지? 분명 전대 성녀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했으면서.'
전대 성녀의 능력에 미치지 못해 고립된 처지를 비관하던 알리아나는 분명 진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지금의 성녀를 마주하자 무엇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물론이에요, 로베르 황자. 제국의 운명에 깊게 얽힌 존재들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알고 있답니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틀어막히는 듯한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로베르는 미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성녀는 발뒤꿈치를 들더니 로베르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옷깃이 스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위험해. 이 여자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확실하다.'
귓가에 그녀의 숨소리가 울린 순간, 로베르는 적막한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광활한 세계에 그녀와 단둘이 남겨진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졌다.
기절했던 여자아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엎드린 아이들이 몸을 덜덜 떨면서 울음을 삼키고, 남은 수하들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무기를 향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이 목걸이가 황자를 옛 일족에게로 인도할 겁니다. 도움이 되길 바라요."
달칵-.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채워 주더니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한순간에 모든 괴로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읍, 우웩."
로베르는 그대로 주저앉아 헛구역질했다. 서늘한 구슬들이 목 부근을 스쳤다. 성녀는 깊은 사색에 잠긴 눈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미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군요. 지금 내가 황자를 찾아왔다는 건, 내 의지가 향하는 곳이 정해졌다는 뜻이겠죠."
"윽, 대체 뭔 소리야? 또 뭐가 시작됐다는 건데...."
"사실은 다 알고 계시면서요. 투쟁 없이 얻은 얄팍한 평화는 이미 백 년 전에 깨졌고, 그 대가가 지금의 그대를 향해 밀려오고 있다는걸."
"...."
로베르는 걸리적거리는 목걸이를 움켜쥔 채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대가 만들어 낸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건 그대뿐만이 아닐 겁니다, 황자. 그러니 나를 포함해 그대의 친구가 될 자들을 반드시 구해 내세요."
"그것참 그럴듯한 충고군. 적을 치는 게 아니라 친구부터 구하라니."
"함께 싸우는 자들에게 승리가 있고, 평화가 있고, 이후의 삶이 있을 테니까요."
로베르는 못마땅한 얼굴로 성녀가 내리는 예언을 들었다. 그녀의 말은 모호하고 의문스러운 구석으로 가득했다.
"다 떠나서, 내게 저주를 내린 네가 어떻게 나의 친구일 수 있지?"
"나는 내가 본 운명을 전했을 뿐, 거짓을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운명을 완성하는 건 그대의 몫임을 기억하시길."
"내가 아무리 애써도, 전쟁의 불씨가 되는 건 변함없다는 뜻이냐? 야, 성녀!"
전언을 마친 성녀는 아무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기울었다.
털썩-. 그대로 고꾸라진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녀의 입술 새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 아야, 로베르 황자?"
다시 눈을 뜬 알리아나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마주한 로베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를 왜 그렇게... 악!"
그때, 틈을 노리던 수하 하나가 달려들어 알리아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남자는 그녀의 두 손목을 뒤로 꺾어 단단히 포박한 채 칼날로 목을 겨누었다.
"로, 로베르...."
알리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로베르를 불렀다. 서늘한 칼날이 옷깃을 뚫고 그녀의 목에 닿았다.
그러나 정작 더 겁을 먹은 쪽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남자였다.
"하하, 당신들이 진짜 성녀고 황자면, 우린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잖아? 방금 대장처럼, 성녀의 손에 그렇게 허무하게...."
"네? 그게 무슨...."
"다, 닥쳐!"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남자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칼에 그녀의 피를 묻혔다. 알리아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어이, 대답해 보세요, 황자님. 이 여자가 진짜 성녀가 맞습니까? 백 년 넘게 늙지도, 죽지도 않은 신의 여자가 정말 세상에 존재한다고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야말로 묻고 싶다."
로베르는 한숨을 내쉬며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오, 오지 마!"
쾅! 남자가 칼을 더 깊숙이 박아 넣으려던 찰나,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바깥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방을 밝혔다. 성검을 든 아타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타나시오 사제?"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본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타나스는 한없이 싸늘한 눈동자로 남자를 마주 봤다.
"루멘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모든 제국민은 그분 앞에 고개 숙여라. 그분께서 바로 신의 손길을 대신하며,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제국의 성녀이시다."
치잉-. 남자가 내던진 칼이 검붉은 대지 위를 굴렀다.
남자는 급히 알리아나를 놓아주고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가 감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녀님! 부디 저희의 죄를 사해 주세요, 루멘이시여!"
쿵, 쿵. 뒤이어 검을 잡던 나머지 수하들 역시 자진해서 그녀의 앞에 엎드렸다.
"저, 정말 성녀님이세요? 저희를 구해 주러 오신 건가요?"
목줄을 찬 아이들은 무릎이 다 까지도록 기어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타나스는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주문을 이어 갔다.
"감히 그분을 죄 많은 눈과 입에 담으려 하지 말지어다."
"아타나스, 잠깐...."
"성녀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는 그녀의 출현을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사제의 음성이 울렸다.
그것은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망각 주문이었다.
그곳의 모든 인간은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것을 끝으로 일제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깨어났을 때는 이곳에 성녀가 나타난 이후의 일을 전부 잊게 될 것이었다.
"숨바꼭질은 즐거우셨습니까, 성녀님.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타나스의 통보에도 성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히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망각 주문을 사용하다니요!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럼 아이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직접 말해 주세요. 너희들의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다 성녀가 변덕을 부려 제멋대로 군 탓이라고."
"아타나스, 제게도 사정이 있었어요. 설명할 기회를 주세요."
"사정이야, 성녀님을 가둬 놓은 그 작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똑똑히 보세요, 오늘 성녀님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트렸는지."
"...."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도우려 했던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로."
아타나스가 냉랭한 투로 인정사정없이 쏘아붙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타나스의 시선이 뒤늦게 로베르를 향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황자님."
"별일이 다 있었지. 그보다 주변에 악마의 결계가 있었을 텐데?"
"보시다시피. 그래서 좀 늦었습니다."
아타나스가 뒤편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신성 문자가 가득 새겨진 결계가 마력 결계를 걷어 내고 있었다.
"성녀님! 괜찮으세요? 피, 피가...!"
"흐윽, 그, 글로리아...."
글로리아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곧장 글로리아의 품에 안겨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카키는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고는 먼저 로베르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괜찮냐, 로베르?"
"일단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해야겠지. 로베르는 조금 전 상황을 곱씹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로베르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타나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소음 결계 안에서 아타나스는 심각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그새 정체를 들키시다니, 대체...."
"나라고 그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냐?"
"성녀님을 공격하는 대신 황자님의 정체부터 밝히려 했다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지금의 제국에 대한 이해도가 꽤 깊다는 뜻이니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겠네요."
"네 생각은 어때, 전에 말한 교황의 사냥 금지 목록과 연관이 있을 것 같은가?"
로베르의 물음에 아타나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목록에 나태 일족의 이름은 없지만, 교황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겠죠. 다만,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신 겁니까?"
"진짜 성녀를 봤으니까. 저 여자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게 우연일 리 없어. 본인은 그렇게 믿을지 몰라도, 그 너머의 존재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성녀님의 의도라...."
아타나스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로베르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집중해. 전대 성녀와 성녀는 무슨 관계지? 너는 알 거 아니야."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건 명령이다, 계약자. 그러니 신과의 맹약 따위 무시하고 내게 진실을 전해. 전대 성녀와 성녀는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로베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약의 표식이 빛을 발했다. 아타나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입이 열렸다.
"혈연관계입니다. 모녀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약 이행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비밀까지 밝힐 수 있는 건가. 아타나스는 놀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가족은 아니고, 성녀를 만들기 위한 의식에 가까웠다고 들었습니다. 교황에게 전해 들은 것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교황청 놈들은 전부 성녀가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요, 고위 사제 중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입니다. 전대 성녀님이 남긴 무언가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알리아나에게 남아 있다는 건... 저만 알고 있었고요."
아타나스는 성녀에 관한 비밀만큼은 반드시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로베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하시기 전에 꼭 제게 확인차 물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요."
그는 만약 이곳에 빙의자나 신성력 각성자가 있었다면, 망각 주문이 쉽게 통하지 않아 전부 죽여서 처리해야 했을 거라고 덧붙였다.
로베르는 성가신 표정으로 아타나스의 훈계를 들었다.
'그보다 성녀를 저대로 두는 게 맞나? 내 편에 가깝다고 마냥 안심하기엔, 그 여자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제약을 걸어 두는 편이 좋겠는데.'
로베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아타나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계십니까, 황자님?"
"알았다고. 그럼 묻는다, 내가 알리아나와 계약을 맺어도 될까? 솔직히 구슬리기도 쉬워 보이고,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 같은데."
"...예?"
아타나스가 경악한 얼굴로 되물은 순간, 로베르는 이 질문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고, 아타나스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깊은 경계가 서린 뒤였다.
"...지금부터 황자님은 성녀님 주변으로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잠깐의 실수로, 로베르에게 성녀 접근 금지령이 내려졌다.
[49]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9화. 억압된 것의 귀환 (4)
"아, 취소. 계약 안 할게. 절대 안 한다니까?"
"그럼 성녀님과 더 말을 섞을 이유도 없겠네요."
"그건... 그냥 내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수는 있는 거잖아?"
로베르가 아무렇게나 던진 말은 아타나스의 경계심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더더욱 안 됩니다. 성녀님은 남성과 사사로운 접촉을 하실 수 없으니까요."
"뭐? 알리아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그러니 그건 그녀에게 달린 일이지! 이참에 가서 물어보자고, 나와 말을 섞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리아나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는 로베르는 당당하게 나갔다. 아타나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자님이 그런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시니 참 새롭군요. 하지만 알리아나는 한 인간이기 이전에 제국의 성녀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성녀님은 무결한 존재여야 하고, 제게는 그녀를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 그녀와 무슨 관계든 맺어야겠다면, 저를 쓰러트리고 가십시오."
그곳의 뒤처리를 하는 내내 아타나스는 로베르가 성녀의 주변으로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호시탐탐 알리아나와 단둘이 남을 기회를 노리는 로베르의 앞에 글로리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베르 황자 전하. 저는 특권 사제직을 맡고 있는 글로리아라고 합니다."
"아, 그레이 백작가의?"
연회에서 그 이름을 이용해 그레이 백작의 반감을 사는 데 성공했던 로베르는 금방 그녀를 알아봤다. 그러자 글로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제국을 구하고 위대한 에피파네스 황가의 부활을 이끌 황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렇다니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황자님. 그래서 하시려는 부탁이 뭔가요?"
"그래, 글로리아. 아타나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알리아나를 이쪽으로 좀...."
그녀가 구슬리기 쉬운 유형의 인간임을 단번에 알아본 로베르는 그녀를 이용해 성녀와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려 했다.
그때, 아카키가 로베르의 어깨를 짚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녀는 왜?"
"그야, 관심이 좀 있어서?"
로베르의 답에 아카키와 글로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카키는 소리를 죽여 협박조의 말을 늘어놓았다.
"로베르, 내가 미안한 것도 있고 해서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는데, 또 멋대로 굴다가 개고생시키면 가만 안 둔다. 괜히 저 속내 모를 여자 옆에 알짱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카키가 로베르를 붙잡아 두는 동안, 글로리아는 마찬가지로 로베르와 대화할 기회를 노리던 성녀에게 가 그녀를 말렸다.
"글로리아, 로베르 황자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성녀님,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시겠다면서요. 이번 일이 발각되면 저는 바로 파문당할 거라고요! 그러니 제발 여기에 가만히 계세요. 부탁드립니다."
성녀가 벌인 막내 황자 납치 사건으로 한바탕 소동을 치른 두 사람은 각각 로베르와 알리아나의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아타나스는 노예상의 수하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두꺼운 족쇄를 채웠다.
"잠시 치안소에 다녀오겠습니다. 그사이에 성녀님이 또 도망치려 하거든 기절이라도 시키세요."
"아타나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방식은...."
"로베르 황자님은 저와 함께 가시죠."
아타나스는 글로리아의 반발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이동 스크롤을 구겼다. 로베르는 마지못해 그의 옆으로 가 섰다.
"신의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은 없을지니, 그의 인도를 따르라."
스크롤에 새겨진 신성 문자가 그의 손바닥 위로 옮겨 갔다.
"가까이 오세요, 황자님."
"내가 꼭 가야 할 이유는 뭐지?"
"오늘 일을 황자님의 공적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교황청에서 탈출한 성녀님께 납치되었다는 것보다는 그편이 듣기 좋은 이야기일 테니까요."
"쳇."
로베르는 마지못해 그의 곁으로 가 섰다.
아타나스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검붉은 대지를 짚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로 거대한 원이 새겨졌다.
이동을 명하는 신성 문자가 쓰인 순간, 빛이 일었다.
다시 빛이 걷혔을 때 그들은 인근 치안소 앞에 와 있었다. 노예상의 수하들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였다.
"일어서."
그들이 찬 족쇄가 응답하듯 위아래로 철컹거렸다.
뒤이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일어섰다. 그러고는 열을 맞추어 제 발로 치안소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는 보초를 서는 이 하나 없었다. 문틈으로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두 사람은 죄수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 아타나시오 사제님?"
"화, 황자님을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하던 치안관들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에 쌓아 둔 은화 더미가 우르르 쏟아졌다.
은화 한 닢이 로베르의 발치로 굴러왔다. 로베르는 은화를 주워 중앙에 박힌 문장을 살폈다.
"황가의 문장이군."
그 말에 아타나스가 무언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은화를 확인했다.
"수도에서 발행된 주화를 쓰시는군요?"
"수, 수도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많으니까요."
치안관들은 허둥거리며 은화 더미를 자루 안으로 쓸어 담았다. 로베르는 그 다급한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봤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그, 그나저나 저놈들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치안관이 앞으로 나서서 두 사람의 시선을 돌렸다. 아타나스는 긴 족쇄로 연결된 남자들을 똑바로 서게 했다.
"요즘 노예 사업이 성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황자님께서 고통받는 제국민들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다고 하시기에, 처리소 한 곳을 급습해 일당을 잡아 왔습니다."
아타나스가 막힘없이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동안, 로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악마를 정화하기도 바쁘실 텐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요. 하늘과 같이 넓은 황자님의 은혜에 감탄할 뿐입니다."
"별말씀을."
치안관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남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럴수록 치안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놈들 대장은 어디...."
치안관이 무심코 중얼거린 한 마디에 잠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급히 테이블을 치우던 다른 치안관들의 손이 잠시 느려졌다.
"대장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타나스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치안관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닙니다. 두 분께서 이토록 저희 영지민들을 위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다음은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 혹시 처리소에 있던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지요?"
"잘 모르겠네요. 문이 열린 사이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부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
'여기서 또 거짓말을? 역시, 이놈도 같은 구린내를 맡았군.'
성녀에 의해 사라진 노예상은 현상금이 걸린 주요 조직원이었으나, 이곳에 잡혀 온 수하들은 그야말로 잔챙이일 뿐이었다.
노예상이 그들의 대장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보고, 그럼에도 그 사실을 감추려 한다는 건 치안소와 노예상 사이에 모종의 유착 관계가 있음을 의미했다.
로베르는 황가의 문장이 박힌 은화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면서 늙은 치안관을 빤히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제를 속이는 일이 무엇보다 두려운 듯한 그 얼굴을.
"수, 수색이라도 해서 아이들을 찾아봐야겠네요."
"처리소 위치를 알려 드릴 테니, 주변 마을부터 수색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은 잔당을 잡는 일이 가장 급하니까요."
"내가 직접 나서 준 만큼,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 영주에게도 내 뜻을 전해 주었으면 하고요.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로베르는 은화를 가볍게 튕겼다.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온 은화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다 천천히 아래로 추락했다.
쨍그랑-. 동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들의 다리 사이로 굴러갔다. 치안관은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면서 자연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봐, 너희들이 섬기는 건 결국 저게 맞잖아.'
로베르는 피식 웃으며 격려하듯 치안관의 어깨를 툭툭 쳤다.
* * *
"제법 황자처럼 구시더군요.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지?"
"어차피 여기서 치안관들의 비리까지 파헤칠 시간은 없으니, 지나갈 겁니다. 따로 몇 가지 조치는 해 두어야겠지만."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누며 곧장 처리소로 돌아갔다.
아카키와 글로리아는 아이들의 목줄을 풀고 조심스레 마차로 옮기는 중이었다. 성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봤다.
아타나스는 눈으로 아이들의 수를 대강 헤아렸다.
'서른 명쯤 되나. 아무리 장사 규모가 커도 이만한 인원을 한 번에 폐기하는 건 이상한데.'
마지막 아이를 들쳐 안은 아키키가 먼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치안관들이 곧 오겠군. 애들은 그쪽에 맡길 거지?"
"아니요, 헤이스 상단으로 데려갈 겁니다."
"뭐? 그건 상단의 일이 아니잖아. 여기 상단이 영지민 구호 사업에 적극적이라는 건 안다만, 그렇다고 너무 떠넘기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조직들은 보통 치안소에 뒷배를 두고 있으니까요. 이곳도 예외는 아닌 듯하고."
그들은 우연히 마주친 조직원 일부를 처리했을 뿐이었다. 이곳에 뿌리내린 노예 사업은 여전히 건재했다.
남은 노예상들은 치안소의 협조자를 통해 이번 사건을 알게 될 테고,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풀려난 아이들을 처리하려 할 터였다.
"지나친 비약이야. 치안관들의 비리 증거를 잡은 것도 아니면서 왜 무턱대고 그들을 의심하지?"
"너무 순진하신 것 아닙니까? 제국에 깨끗한 관리가 몇이나 된다고요. 지금처럼 영주가 자리를 자주 비우는 상황에서는 더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타나스, 저희 영지의 관리들은 전부 황가에 충성을 바치며 법도를 따르는 충직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을 리가 없어요."
글로리아가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변호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치안관들을 향한 비난에는 곧바로 반발했다.
"관리들의 묵인 없이 귀족을 상대로 한 노예장사가 이뤄질 수 있을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텐데요."
"그런 추측만으로 제국을 위해 일하는 관리들을 매도하실 수는 없어요, 사제. 그건 제국법에도 어긋나거니와, 신의를 중시하는 그레이 백작령의 방식이 아닙니다."
"마냥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야. 방금 치안소에서...."
로베르가 방금 그곳에서 보고 온 것을 전하려 하자, 아타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의미 없는 언쟁을 더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설명해 봤자 심증일 뿐이라고 우기실 테니, 그만두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두 분께서 어떤 순진한 믿음을 품고 계시든 제 알 바 아니니까요."
"그래도 영주의 부재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아타나스의 말에는 동의합니다. 영주 가문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방식으로 이 일을 바로잡겠다 약속드려요."
글로리아가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 감히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아타나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는 어딘가 단단히 비틀린 채였다.
"응원하겠습니다. 그러시다니, 꼬리를 밟힌 노예상들이 잠적한 것을 두고 그들을 소탕했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겠죠. 충실한 치안관들이 거짓된 보고로 영주를 속일 리도 없고요. 조만간 관리들이 낸 성과를 중앙 수도로 전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네?"
"그랬다가는 그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사건을 무마하기 급급해지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부패를 청산할 타이밍을 놓친 치안소는 자정력을 잃고, 더 많은 죄 없는 아이가 노예로 잡혀가고, 영지민들의 원망과 분노가 영주 가문을 향해도, 여전히 이 땅의 모든 이가 백작에게 충성하고 백작가는 황실에 충성할 테니까요."
"...."
"그렇게 안전지대가 서서히 붕괴하여 영지 전체가 손쓸 수 없이 무너져도, 신의만 있다면 다 헤쳐 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타나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동조를 가장한 저주를 쏟아 내는 동안, 글로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녀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아카키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넌... 대체 뭐가 문제냐, 아타나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아무튼 아이들은 헤이스 상단으로 데려갑니다. 치안관들이 오기 전에 움직여야 하니 서두르세요."
아타나스는 무덤덤하게 대꾸하고는 두 사람을 등지고 성녀에게 향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 글로리아. 저 삐뚤어진 놈은 원래 좀 극단적인 구석이 있으니까."
아카키의 말은 그녀에게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글로리아는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으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저건 성격이 나쁜 건지 뭔지 모르겠네. 굳이 저런 식으로 반감을 사는 것보다는 치안소에서 뭘 봤는지 밝히는 편이 낫잖아? 원래 적을 사서 만드는 편인가.'
상황을 지켜본 로베르는 그녀의 말을 비웃으면서도 그레이 백작령의 확실한 치부는 덮어 주는 그의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타나스는 글로리아를 비난하고 싶은 것 같기도, 계도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녀의 악의 없는 말 한마디에 아타나스가 필요 이상으로 자극당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열받아 하는 꼴이 재밌네."
단지 그런 이유로, 로베르는 그녀와의 동행이 너무 빨리 끝나지는 않았으면 했다.
[5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50화. 억압된 것의 귀환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