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화. 마왕, 부활하다
악마와 영웅은 역사 속에서 다시 쓰인다.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포탈을 열어 침략을 시작한 악마들의 왕, 루시퍼는 대지를 개척해 황폐한 땅에서 고통받는 동족들을 구한 영웅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수백 년간 지속된 신성 제국과의 전쟁이 악마들의 패배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악마들은 패배했고, 승자인 인간들에 의해 그 긴 역사는 '신성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신성이 승리한 것이다.
마계를 다스리던 일곱 마왕이 차례대로 사냥당하던 그때, 나태 일족의 마왕 벨페고르는 제 성에 있었다.
죽어도 내 일족의 곁에서 죽겠다는 제왕다운 각오.
치열한 전투 끝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느라 미처 적을 피하지 못한 비극.
벨페고르가 제 성을 떠나지 않은 건 그런 악마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법한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끝내주는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을 뿐이다.
"마왕님,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긴 합니까? 마왕님!"
벨페고르의 심복인 이슈타르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마왕님, 마왕님-. 식당 전체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벨페고르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어, 그래. 듣고 있어. 그러니까, 그 뭐냐. 제국과의 협상에 실패했다고."
"...그건 저번 보고 때 말씀드렸을 텐데요."
"쩝쩝, 그랬나? 아, 맞다. 사제 놈들이 루시퍼를 죽였다고 했지."
"그뿐만 아니라, 교만 일족이 전멸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마왕님께서 더 잘 아시겠죠. 이제라도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이미 한참 늦은 것 같지만."
다음 요리를 세팅 중이던 시종들은 절망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식량 창고를 털어 코스 요리를 대령하는 동안에도 제국의 군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서슬 퍼런 성검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벨페고르는 아무런 동요 없이 입안의 고기를 천천히 씹기만 했다.
'혹시 마왕님께서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 건가?'
그쯤 되자 그곳의 악마들은 모두 같은 기대를 품었다.
그 태연한 얼굴이 도저히 죽음을 앞둔 자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인간들이 무슨 수로 루시퍼의 목을 땄을까? 우리 중에서도 제일 센 놈인데."
"마왕님께서도 그와 맞먹을 정도로 강하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꼴을 보인 적이 없어서 저평가당하신 것뿐."
"나야 앞으로도 그럴 텐데, 뭐. 이제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 디저트나 가져와."
그러나 벨페고르는 아주 쉽게 제 일족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냈다.
"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시종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그의 명령을 따랐다.
진즉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던 이슈타르는 테이블 위로 디저트가 산처럼 쌓이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너는 지금 케이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이 폐급 마왕 놈아!"
퍽-. 벨페고르의 얼굴이 옆으로 세게 돌아갔다. 커다란 케이크 덩어리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 군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마왕님께...."
"저게 마왕이냐? 식충이지! 그래, 다 처먹어라. 처먹다가 뒈져 버려!"
이슈타르는 이성을 잃고 손에 잡히는 것을 전부 벨페고르에게 집어 던졌다.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군.'
벨페고르는 얼굴을 닦아 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날아드는 식기를 피했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사방을 울렸다. 벨페고르의 발밑으로 날카로운 파편들이 쌓여 갔다.
"이슈타르, 하극상도 적당히 해. 내가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하지?"
벨페고르가 짜증스레 중얼거리자 그제야 이슈타르가 손을 멈추었다.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당신이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바로 이유라고요.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알면 귀찮게 뭣 하러 묻겠어."
"너란 놈은 정말이지... 구제 불능이다. 시종 출신 계승자다워. 결국 네놈이 우리 일족을 죽이겠구나."
"그건 너무 갔고. 루시퍼가 죽었어도 사탄이랑 마몬이 버티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내 차례까지는 오지도 않을걸."
내 차례까지 올 정도면, 더더욱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악문 이슈타르를 앞에 두고도 벨페고르는 그저 속 편한 생각이나 하며 길게 하품했다.
"아무튼 난 식곤증 때문에 좀 자야겠으니, 넌 여기를 깨끗하게 치우고 들어가라. 정 상황이 걱정되면 정찰병이나 좀 보내든지."
"...정찰병이야 진즉에 보냈습니다."
"그래? 잘했네."
벨페고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슈타르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침실로 직행해 조금 전 소동 따위 새카맣게 잊고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영영 잠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왕님, 피하셔야 합니다. 마왕님!"
잠결에 이슈타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것도 같다.
"구, 군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밖에 그놈들이...."
"젠장,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어서 마왕님을...."
쾅! 이슈타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사방이 산산이 조각났다.
"어라?"
벨페고르는 미처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더 깊은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그것이 나태 일족의 마왕, 벨페고르의 최후였다.
그날의 습격을 끝으로 인간들은 일곱 마왕을 모두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왕을 잃은 일족의 정예군은 서둘러 제국에서 물러갔고, 대부분은 그 길에서 무참히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악마들은 마계 깊숙이 숨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께서 우리를 구하셨다! 신성 제국 만세! 교황청 만만세!"
인간들은 일곱 마왕의 머리를 거리에 걸어 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해 축배를 들었다.
신성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교황청의 영웅들을 찬양하면서.
그 시각, 벨페고르는 어둠 속에서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나, 설마 죽은 건가.'
육신을 잃고 심연에 잠긴 상태는 분명 죽음이라 불러 마땅했다.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그러나 그는 악마였다.
악마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그가 맞이한 것이 죽음이라면, 지금처럼 의식이 존재하지도 않아야 했다.
벨페고르는 제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으나 그럴듯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뭐, 어차피 육신도 없는데 무슨 상관. 그보다 그럼 내 사인은 식곤증인가?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부끄러운데.'
죽음 전 자신의 행적을 아는 부하들이 입을 다물어 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근성마저 없는 그는 금세 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내 잠을 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올랐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무한한 시공간. 보통은 그곳에 갇히면 괴로워하다 미쳐 버리겠지만, 그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눈이 부시지도 않고, 잠을 방해하는 이슈타르를 비롯한 일족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는 그곳에서 평화를 찾았다.
'적어도 허울뿐인 마왕으로 사는 것보다는 낫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이보다 더 나았으면.'
그런 소망을 품은 채, 벨페고르는 눈을 감고 제게 주어진 안식을 맞이했다.
"황자님, 일어나시라니까요. 로베르 황자님!"
누군가가 그의 것이 아닌 이름으로 그를 깨우기 전까지.
* *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침내 벨페고르의 의식이 돌아왔다.
'뭐야, 죽은 건 꿈이었나?'
벨페고르는 유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썼다. 그때,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도저히 안 되겠다. 뿌려."
촤아악-!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페고르의 위로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켁, 쿨럭, 이 미친...."
갑작스레 물벼락을 맞자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졌다. 벨페고르는 요란하게 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극상도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이제 됐어. 사제들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지."
아무리 자신이 너그러운 왕이라지만, 이건 도를 넘은 일이었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이슈타르를 죽이겠다 결심한 채 남자를 노려봤다.
"...황자님?"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앞에 있는 건 처음 보는 인간들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벨페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 인간들이 왜 여기 있지?'
벨페고르는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제 성과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은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여러 가구와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었고, 벽에는 웬 낯선 인간들이 잔뜩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렀다.
'인간계에 온 건가? 갑자기?'
벨페고르는 혼란스러워하며 우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깐의 움직임만으로 온몸에서 불쾌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은 또 왜 이래? 쓰레기 같군."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그는 제 몸을 살피다가, 선명히 갈라진 복근 대신 뼈가 드러나는 흰 살가죽만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뭐야, 어디 갔어?"
그는 한껏 당황해 팔다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온몸에 단단히 잡혀 있던 잔근육들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일어섰을 때의 눈높이도, 원래 자신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비켜."
벨페고르는 남자를 세게 밀치고 가까이 있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설기 그지없는 인간 하나와 마주했다.
'뭐야, 이건.'
태어나서 햇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창백한 피부와 새카만 머리칼을 가진 어두운 분위기의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충 넘긴 머리 아래로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그 탓인지 미형의 생김새를 가릴 정도로 음울한 인상이 강했다.
"이게... 나라고?"
벨페고르가 오른쪽 눈 밑의 작은 점을 문지르며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자님,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계속 이상하게 구시네요."
남자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벨페고르는 그제야 남자가 애타게 부르던 황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자? 누가, 설마 내가?"
"네? 그게 무슨...."
"말해 봐.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뜬금없는 말에 방 안의 인간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벨페고르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말해. 명령이다."
"시, 신성 제국의 로베르 율리오 드 에피파네스 황자 전하이십니다. 여기는 황자님의 궁이고요."
"하하, 거짓말이지...."
벨페고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겁을 먹은 남자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조, 조금 전에는 저희가 감,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동안에도 벨페고르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꿈인가?'
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손목을 소리 나게 돌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허억-."
남자가 놀란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주변 인간들이 다급히 남자를 부축했다.
"황자님!"
"꿈은 아니네."
"그, 그, 그걸 왜 저를 때려서 확인하시는...."
"날 때릴 순 없잖아."
벨페고르는 뻔뻔스레 답하며 벽에 걸린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림에서 익숙한 문양을 찾아낸 탓이었다.
그건 분명 언젠가부터 지겹게 흩날리던 신성 제국의 깃발에 그려진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신성력 각성자들을 내세워 인간들의 나라를 통일해 내며 악마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뒤바꾼 유일무이한 제국.
자신은, 나태 일족의 마왕 벨페고르는 그 신성 제국의 황자가 되었다.
[2]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화. 신성 제국의 저주받은 막내 황자
신성 제국에는 신의 음성을 전하는 성녀가 있다.
그녀의 전언을 따른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그녀는 제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예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는 황제조차도.
전대 황제가 사망한 날, 그녀는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제국 전체를 뒤흔들 만한 새로운 예언을 내렸다.
[신성 제국의 첫 세기가 저무는 해, 어느 겨울밤에 불길한 자색 달이 뜰 것이다.
그 빛을 머금고 태어나는 쌍둥이에게 악마가 깃들었다. 그에게서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그로부터 얼마 뒤, 신성 제국력 100년. 자색 빛이 어린 달이 뜬 겨울밤에 황후가 쌍둥이를 낳았다.
"어떻게 됐나? 황후는 괜찮아?"
"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으십니다. 그, 그런데 폐하. 황자님께서...."
황녀는 다른 황족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나, 황자는 악마의 상징이라 불리는 검은 머리를 타고났다.
그 아이가 눈을 뜨고 반짝거리는 자안을 세상에 보였을 때,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언 속 '저주받은 아이'가 황실에 태어난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교황청에서는 제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하루빨리 막내 황자를 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멋대로 던지면 그만인 말 한마디가 황족을, 그것도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죽일 명분이 된다는 겁니까?"
황실에서는 황자의 숙부이자 황제의 동생인 파토르 대공이 유일하게 나서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성녀님의 예언은 절대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제국에서 가장 절대적인 것은 황권입니다. 교황청이 이런 식으로 내정에 간섭하는 게 반역이라는 것부터 아셨으면 좋겠군요."
"내정에 간섭한다니, 모함입니다. 저희는 그저 성녀님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하하, 성녀님이라. 존재조차 불분명한 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황실 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전쟁 통에 누린 권력이 너무 달콤해서, 앞으로도 사사건건 신을 들먹이며 황제 위에 군림하고 싶노라고."
"감히 신을 모시는 성녀님을 부정하다니요! 부디 언행에 주의하세요. 아무리 대공이라도 이단자로 의심받을 겁니다!"
교황청과 황실이 대립하는 사이, 제국민들 사이로 막내 황자에 대한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입과 입 사이를 오가며 불어난 이야기 속에서 막내 황자는 어느샌가 신성 제국을 멸망시킬 악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결국 황제가 먼저 백기를 들고 막내 황자를 둘러싼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로베르 황자를 황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합니다. 이외에도 제국을 위협할 만한 어떤 권리도 주지 않을 거고요. 황자는 그저 조용히 살게 될 테니,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교황청은 아무런 이견을 달지 않음으로 황제의 결정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그렇게, 저주받은 막내 황자의 운명은 그가 미처 젖을 떼기도 전에 확정되었다.
* * *
로베르 황자를 모시는 시종 앤디에게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황자 놈이 이상하다."
앤디의 말을 들은 다른 시종들은 하나같이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되냐며 비웃었다.
"앤디 너도 참 새삼스럽다. 그 황자는 원래부터 이상했잖아?"
어릴 적부터 가장 구석진 궁에서 최소한의 사용인을 거느린 채 살아왔음에도, 황궁의 모든 이가 로베르 황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이 없고, 항상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서너 번은 되물어야 할 정도였다.
또한 사람을 만나거나 곁의 사용인들이 바뀌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제 물건을 훔친 하인마저 선처해 준 뒤로는 그의 궁에서 제대로 일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 황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호위 기사들이 수시로 궁을 비워도.
하인들이 모여서 제 욕을 해도.
궁 전체가 하인들 숙소처럼 더러워져도.
며칠 연속으로 같은 요리를 올려도.
심지어는 상한 음식 때문에 탈이 났을 때도.
그저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럴수록 사용인들은 점점 대담해졌고, 최근에는 황자를 대하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늦잠을 자는 황자에게 세숫물을 끼얹을 때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야."
앤디는 심각한 얼굴로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로베르 황자는 일어나자마자 온갖 헛소리를 내뱉더니 제 몸을 미친 듯이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 왔다.
"이제 성년도 됐겠다,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궁인들 기강이나 좀 다잡으려는 줄 알았지. 그래서 장단을 맞춰 주는데, 갑자기 나를 치더라니까? 그러고는 하는 말이, 꿈인지 확인하려고 때렸대."
"뭐? 푸핫! 앤디 너, 막내 황자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이제 다시는 전처럼 못 까불겠다."
"그러게, 봐줄 때 잘 좀 하지. 솔직히 너처럼 편하게 일하는 시종이 어디 있냐?"
다른 시종들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앤디를 놀리기 바빴다. 그러나 앤디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어제는 뜬금없이 자기한테서 무슨 저주가 옮는다는 거냐고 물었다고."
"하인들 몇몇이 또 입방정 떤 모양이지. 찾아내서 적당히 혼내고 입단속시켜. 그러라고 눈치 주는 거잖아."
"아니, 정말 자기가 저주받았다는 것도 까먹은 눈치였다니까. 그게 뭐냐고 집요하게 캐물어서 대답은 해 줬는데, 진짜 이상해.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앤디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시종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진짜 악마라도 들린 거 아니야? 왜, 악마가 씌면 다른 사람처럼 군다잖아."
"미친 것처럼 보이면 이미 상태가 심각한 거래. 그 정도면 특권 사제님들도 구마하기 어려울 텐데. 너 어쩌냐?"
"너, 너, 너희가 보기에도 그래?"
앤디의 눈동자가 두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들이 다시금 눈빛을 교환했다.
"푸흡, 하하하!"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또 믿는다. 모자란 주인을 모시더니 너도 같이 모자라진 모양인데."
"뭐, 이 새끼야?"
"아, 진짜 웃기네. 나까지 옮을까 무서워서 같이 못 있겠다. 가서 네 미친 황자님이랑 오붓한 시간 보내지 그래?"
"모자란 황자 하나 어떻게 못 해서 쩔쩔매는 네 꼴이 제일 웃긴다는 것만 알아 두고."
그들은 낄낄거리며 분노에 찬 앤디를 피해 흩어졌다.
* * *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같은 시각, 벨페고르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귀를 후비며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새로운 몸으로 눈을 뜬 지도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그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는 여전히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첫째, 나는 신성 제국의 로베르 어쩌고 황자로 부활했다. 하지만 왜, 어쩌다가, 무슨 수로?'
둘째, 뭐가 잘못됐는지 몸에서 마력이 거의 안 느껴진다. 권능이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다. 아무래도 좆 된 것 같다.
셋째, 이 몸은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쌍둥이에다 머리색도 검고, 몇십 년 전에 웬 여자가 한 말 때문이라는데.
정말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쌍둥이나 검은 머리 같은 게 악마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마지막, 명색이 황자라는 놈이 완전히 찬밥 신세에다 아무런 일정이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 이건 마음에 들지만.
'...어라?'
그러고 보니, 그는 지난 사흘간의 생활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벨페고르는 마왕의 책무를 운운하는 이슈타르에게 시달려야 했다.
마왕님, 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마왕님, 침입자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마왕님, 전쟁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마왕님, 마왕님, 마왕님. 지치지도 않고 자신을 부르는 이슈타르의 목을 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시종이나 하인들은 기껏해야 그만 일어나라거나,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거기, 아무나 들어와 봐."
벨페고르는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머리맡의 종을 계속 울렸다. 잠시 후, 앤디가 씩씩거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왜...!"
"왜?"
벨페고르가 싸늘한 목소리로 되묻자 앤디는 곧바로 진정하고 꼬리를 내렸다.
"아, 아니. 왜 부르셨는지 여쭤보려고 한 거였어요. 죄송합니다."
그는 거듭 고개를 숙이는 앤디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됐어. 그보다 혹시 내가 해야 하는 일 같은 게 있나? 무슨 회의에 가야 한다든지, 침입자를 상대해야 한다든지, 뭘 대비해야 한다든지."
"네? 황자님께 그런 업무가 배정될 리가요. 공부도 단련도 진즉에 관두신 분이 갑자기 무슨...."
"아, 그래? 마음에 드네. 더 자세히 말해 봐."
벨페고르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이어지는 설명을 들었다.
로베르는 제국에서도 소문난 모지리 황자로, 글을 겨우 뗀 후로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성력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신체 능력조차 없어 검술 역시 진검을 잡아 보기도 전에 포기했다.
"단련이라도 열심히 하면 몰라, 그것도 아니고. 예배를 열심히 다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온종일 침실에 틀어박혀서 궁상이나 떠셨... 아니, 사색에 잠기셨죠. 아주 가끔 글이나 좀 쓰시면서요."
"글?"
"대단한 건 아니고, 일기 같은 거요."
"가져와."
벨페고르가 명령조로 말하며 재촉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앤디는 이제 토를 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순순히 노트를 찾아왔다.
"아무 데나 대충 펴서 읽어 봐."
"네? 저더러 이걸 소리 내서 읽으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맞는데. 읽어."
세상에는 자기 일기를 남한테 읽게 시키는 미친놈도 있구나. 역시 황자가 광인이 된 게 분명해.
앤디는 고개를 저으며 손에 잡힌 노트 마지막 장을 펼쳤다.
"흠흠, 오, 오늘은 나와 율란 황녀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못 참고 처음으로 어머니, 아니 황후 폐하께 화를 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그러셨다.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살다 가 버리라고. 그게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보다 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황후께서는 전부터 늘 내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으니까. 입 밖으로 낸 것이 처음일 뿐이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난,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로베르의 마지막 일기는 그 문장으로 끝이 났다.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앤디는 힐끔거리며 벨페고르의 눈치를 살폈다.
"황자님, 저는 황자님께서 이 정도로 힘들어하신 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틀어박혀서 조용히 살다 가 버리라고?"
그가 잠긴 목소리로 황후라는 인간이 했다는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황후 폐하께서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겁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네, 어머니."
"...예, 예?"
"어머니는 정말 최고십니다! 혹시 만난다면 진하게 포옹이라도 해 드리죠."
벨페고르는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향해 소리치고는 크게 웃어젖혔다.
아무런 의무 없이, 구석진 성에서 시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팔자 좋은 막내 황자의 삶이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너한테는 어차피 지옥이었다며? 내가 낙원으로 써 주지.'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베르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예언 역시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희망으로 부푼 벨페고르, 아니 로베르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저 놀고먹기만 하겠다는 오랜 꿈을 이번 생에서 실현할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나는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다! 오늘 이곳을 불태우고 너희들의 왕을 죽일 것이다!"
인간이 된 채로 동족들에게 습격당하기 전까지는.
[3]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화. 지배자의 권능
로베르가 새로이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즐겼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든 옷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식사마다 부드러운 빵과 고기가 끊임없이 나왔고, 차를 마실 때면 당연하다는 듯 형형색색의 디저트가 함께 준비되었다.
앤디를 독촉해 얻어 낸 파이프 담배와 각종 시가에서는 묵직하면서도 시원하고 깔끔한 향이 났다.
로베르는 그 모든 것들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
"루시퍼가 심장을 태워 가며 인간계를 침략한 이유가 있군. 마계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곳이었어."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루시퍼의 선구안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입술 새로 빠져나간 연기가 금세 사방으로 흩어졌다.
로베르는 마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푸르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종을 울렸다.
그러기를 무섭게 앤디가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습니까, 황자님.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만 해 주시면 저 앤디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난 일주일간 혹독하게 시달린 앤디는 어느새 로베르의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다.
로베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날씨도 좋은데, 정원에서 차를 마셔야겠어. 준비해."
"넵,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앤디는 허겁지겁 뛰어나가더니, 금방 다시 돌아와 티타임이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앤디가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며 정원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여긴 쓸데없이 넓네."
"그, 그런가요. 그래도 이 자수정궁은 황궁 내에서 제일 작은 편인데요."
"그래? 그럼 내 몸이 쓰레긴가 보지, 고작 제일 좁은 궁에서 조금 걸었다고 숨이 차는 걸 보면."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쓸데없는 말을 올려서...."
앤디는 지레 겁을 먹고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로베르는 몸 상태가 거슬린 탓에 앤디의 말 따위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다, 다 왔습니다."
그들은 금세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가 가득 쌓여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찬 기사가 로베르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황자님."
"누구?"
"네?"
호위 기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하하, 황자님도 참. 몇 년을 본 호위 기사도 모르는 척하시고. 날이 갈수록 유머가 느신다니까요. 덕분에 황자님을 모시는 궁인들이 요새 아주 즐겁게 지낸답니다."
앤디는 애써 밝은 척 떠들어 대면서 아직 로베르의 변화를 모르는 듯한 기사에게 입을 다물라는 눈빛을 보냈다.
"호위 기사라는 놈이 일주일 내내 얼굴 한 번을 안 비쳤는데, 내가 알 리가."
"...."
기사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렸다. 로베르는 태연한 척 기사의 옆을 지나쳤다.
'호위 기사를 못 알아봤다니, 좆 될 뻔했군. 길게 놀고먹으려면 주변인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정도는 알아 둬야겠어.'
다행히 임기응변이 통했는지, 기사가 황급히 뒤따라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최근 개인적인 사정이, 그러니까 집안에 복잡한 일이 생겨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로베르는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앤디가 곧바로 곁으로 와 찻잔을 채워 주었다.
"그럼 그냥 집에나 가지 그래. 어차피 호위 같은 거 필요도 없는데. 그보다 저녁에는 술을 즐겨야겠어. 종류별로 준비해."
"황자님. 제, 제가 죽을죄를...."
청천벽력 같은 통보에 기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로베르는 그와 대조되는 평온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아, 호위가 필요하긴 하려나. 이 몸은 쓰레기니까.'
미약하게나마 제 마력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따위 인간의 몸으로는 사제는커녕 기사 하나도 제압하지 못할 게 뻔했다.
'궁 안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황자에게 그럴 일이 뭐가 있겠냐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갑작스레 정원으로 짙은 그늘이 졌다.
"오늘은 유독 해가 짧군."
로베르는 아무런 경계 없이 남은 차를 비웠다.
쾅! 그 순간, 굉음과 함께 테이블이 산산이 조각났다. 뒤이어 화려한 불꽃이 잔해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뭐야?"
"허억-."
그보다 먼저 불청객을 발견한 앤디가 놀란 신음을 내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복수를 위해 이곳에 왔다! 오늘 이곳을 불태우고 너희들의 왕을 죽일 것이다!"
허공에서 익숙한 마계어가 들려왔다.
그건 분명 상급 악마들만 사용하는 고대 언어였다. 로베르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리고 인간, 고양이, 뱀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형체의 악마와 마주했다.
악마는 손에 피처럼 새빨간 횃불을 쥐고 있었다.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횃불 기둥을 단단히 감쌌다.
"...바임?"
로베르는 한눈에 악마의 정체를 알아봤다. 동시에 정원에서 유유자적하는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악마 놈들이 날 알아보려나. 이거, 잘하면 인간이 아니라 동족의 손에 죽는 거 아니야?'
제대로 고민해 볼 틈도 없이, 횃불의 화염이 피어올라 로베르를 덮쳤다.
"황자님!"
애석하게도 기사의 다급한 목소리는 지옥 불을 뚫지 못했다. 순식간에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 * *
악마의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열기에 푸르른 잔디가 힘없이 바스러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다급히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로베르는 이미 홀로 불기둥 한가운데에 갇힌 뒤였다.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빨리 2황자님을 모셔 와. 아니면 급한 대로 성기사단에서 누구라도 오라고 해!"
갑작스러운 상급 악마의 습격에 기사들은 허둥대기만 할 뿐, 불기둥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제국의 황자라는 놈이 무능한 부하들을 뒀구나."
"...역시 못 알아보는군. 이왕이면 대화로 풀고 싶었는데."
로베르가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바임의 세 얼굴이 차례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인간.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바임의 머리들이 로베르의 코앞까지 다가가 탐색하듯 그를 살폈다. 길게 째진 눈은 주인인 사탄을 닮아 험악한 빛을 띠었다.
'바임이면, 분노 일족의 군단장이니 이슈타르랑 맞먹을 수준은 되겠지. 그 정도면 웬만한 사제 놈은 손도 못 댈 거고. 마침 보는 눈도 없으니 딱이긴 한데....'
마왕의 권능이 제대로 작동할지가 문제였다.
이 상황이 거저 굴러 들어온 기회일지, 꿈만 같던 찰나의 행복과 함께 묻힐 무덤이 될지.
로베르는 제 운을 믿고 도박을 한번 걸어 보기로 했다.
"권능, 지배."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바임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이건 아니지! 권능, 지배!"
로베르는 당황한 얼굴로 주문을 반복했다. 바임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미친 인간이었군. 괜히 시간을 낭비했어. 더 끌 것도 없이 바로 끝내 주마."
바임이 휘파람을 불자 사방에서 뱀이 기어 나왔다.
화염 속에서 태어난 뱀들은 온몸에 위협적인 불길을 휘감고 있었다.
마계에서 볼 때는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던 뱀들이, 오늘만큼은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다.
로베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인간 주제에 마왕의 주문을 외우다니."
바임이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뱀들이 일제히 로베르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인간의 언어로 마왕의 권능을 쓰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권능, 지배."
입을 벌리자, 오랜 습관처럼 붙은 익숙한 마계어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뱀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뒤이어 뱀을 휘감은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쿵! 바임의 무게로 땅이 크게 울렸다.
바임은 본능에 이끌려 로베르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 이게 무슨, 이건 분명...."
뒤늦게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한기를 느낀 바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리 위에서 익숙한 자색 빛이 일렁였다.
"되잖아? 역시 난 운이 더럽게 좋다니까."
마왕성의 시종에서 마왕이 되고, 또 제국의 황자가 되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로베르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 휘파람을 불었다. 고작 뱀 따위에 공포를 느꼈던 조금 전 제 모습은 까맣게 잊은 뒤였다.
"오랜만이다, 바임."
"벨, 벨페고르 마왕님?"
"그래, 내가 바로 그 마왕이다."
각 일족의 마왕들이 공통으로 가진 세 가지 권능이 있다.
심장이 지닌 힘과 기억을 원하는 상대에게 넘겨주는 '계승'.
왕이 아닌 모든 악마를 강제로 굴복시키는 '지배'.
그리고, 악마를 죽여 그 힘을 빼앗는 '약탈'.
"오랜만에 만나서 할 말은 아니지만, 죽어 줘야겠어. 왕을 위해서."
여기서 바임의 마력을 빼앗는 것으로, 이제 웬만한 사제나 악마 따위는 그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할 것이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게 다 뭔지 설명부터...."
"그런 게 굳이 필요한가."
로베르는 제 안의 마력을 전부 왼손에 모으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그나저나 왜 굳이 악마화한 채로 여기까지 왔어, 마력 아깝게."
퍽-. 마력으로 무장한 손이 단숨에 바임의 가슴을 관통했다. 로베르는 손끝에 닿은 심장을 세게 움켜쥐고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권능, 약탈."
그들의 발밑으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핏기가 가신 바임의 세 얼굴 위로 마법진의 자색 빛이 드리웠다.
곧이어 거대한 양의 마력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베르는 제 안을 터질 듯이 채우는 힘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대체, 왜...."
"그야, 여기서 무사히 살아남으려고. 너한테는 유감이다. 하지만 이게 우리 방식이잖아."
그가 가벼운 투로 답하자 바임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부디 끝까지 악마로 살아남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실패하시는 날에는, 동족들에게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그것이 바임이 남긴 유언이었다.
이내 모든 마력을 잃은 심장과 함께 바임의 육신이 완전히 바스러졌다. 마법진의 흔적도 함께 세상에서 지워졌다.
로베르는 가만히 서서 횃불의 불씨가 잦아드는 것을 바라봤다.
"저주도 아니고, 찝찝하게."
그는 횃불을 발로 걷어차고는 사방으로 안개를 내렸다.
모든 걸 태워 버릴 것처럼 타오르던 불길이 안개 속에서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고유 권능까지 다 돌아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이쯤에서 만족할까."
불기둥이 산산이 조각나며 반쯤 폐허가 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도 처리 못 할 거면 성기사 서임은 왜 받았답니까? 뭐라도 해 보세요, 제발!"
"저런 상급 악마를 잡을 실력이면 특권 사제 서품을 받았을 겁니다. 그게 아니니 성기사가 된 거 아닙니까! 저한테는 너무 무리한...."
멀리서 앤디가 등 떠밀려 온 성기사 하나와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거기, 차 다시 준비해야겠다. 아직 충분히 못 즐겼거든."
로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왼손에 남은 검은 피를 옷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곳의 모든 인간이 경악이 번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 지금 뭐야? 설마 황자님께서 하신 건가?"
"말도 안 돼. 황자님께서 무슨 수로 저만한 상급 악마를 죽여?"
상급 악마는 온데간데없고, 로베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눈앞의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그때, 성기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화, 황자님. 혹시 신성력을 각성하신 겁니까?"
"뭐?"
저 인간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로베르는 마왕에게 신성력을 운운하는 성기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황자님 안에서 거대한 힘이 느껴집니다. 어지간한 사제들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요."
"어, 어?"
"역시, 신성력을 각성하신 게 맞는 거지요? 악마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신성력뿐이니까요."
신성 전쟁이 끝난 지 어느덧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악마를 직접 상대했던 영웅들은 전부 죽은 뒤였다.
몇 안 되는 특권 사제를 제외하고는 이제 악마를 가까이서 보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건 신성력과 마력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성기사가 로베르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마력을 신성력으로 오해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 그래. 내가 신성력으로 저 악마 놈을 죽였다. 그게 아니면 뭐겠어?"
그리고, 상황을 파악한 로베르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오해를 덥석 물었다.
찰나의 선택이 제 삶에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4]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화. 황제의 초대
황궁은 비밀을 지키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는 어떤 사각지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방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깔려 있어, 무슨 사건이든 반나절만 지나도 모든 이가 알게 된다.
"로베르 황자님께서 신성력으로 상급 악마를 처리하셨다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세상에. 성년이 될 즈음 각성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그 황자님이 그러실 줄은...."
"그럼 정말 대공님 말씀대로 예언이 틀린 건가 봐. 악마가 들렸는데 신성력을 각성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저주받은, 무능한, 불길한.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를 독식하는 황자 로베르가 궁에 침입한 상급 악마를 죽이고 궁인들을 위협으로부터 지켜 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며 한동안 로베르의 이름이 수많은 궁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로베르가 신성력을 각성했다고?"
자연스레 황실 사람들 역시 한낮의 습격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마침 수도의 저택에 머물고 있던 파토르 대공은 곧바로 입궁해 황제, 조너선의 집무실을 찾았다.
"폐하, 3황자 사건 관련 보고서 좀 봅시다."
"아, 안 졸았습니다, 아버지!"
갑작스러운 동생의 방문에 조너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쿠당탕!
급히 일어서며 책상을 짚는 바람에 서류 더미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펜이 그 위로 굴러가며 검은 잉크 자국을 남겼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시종장이 다급히 달려가 황제를 부축했다. 조너선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결이라 실수한 것뿐이네."
"쯧."
모든 광경을 지켜본 파토르가 대놓고 혀를 찼다. 불손한 행동에 시종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공 전하, 그 무슨 무례한...."
"하하, 괜찮대도. 파토르 너였구나. 온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면 좋았을 것을...."
파토르는 대답 없이 제 발밑으로 굴러온 펜을 주웠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3황자를 만나는 보셨습니까?"
"아니, 아직."
"아직이라뇨?"
일순 손의 움직임이 멎었다.
"로베르 황자의 소문이 황궁 담벼락을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간 폐하는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 후속 조치를 하셔야 했습니다."
쾅! 파토르가 조너선의 앞에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조너선은 움찔 놀라며 쓰러지듯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태자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는 유약한 황제 같으니. 파토르는 보란 듯이 서류를 거칠게 넘겼다.
"이런 교황청에서 넘겨준 서류 더미에 인장만 찍을 게 아니라요. 신성력 각성이 로베르와 이 황실에 어떤 의미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대공 전하, 말씀을 삼가십시오. 전하께선 지금 제국의 황제를 알현하고 계신 겁니다."
마치 황제를 꾸짖는 듯한 말투에 시종장이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나의 형님과 가족 간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기도 하지."
파토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받아치며 뒤로 물러섰다.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가슴팍의 브로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파토르, 너도 알다시피 그 아이와는 만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갑작스레 불러냈다가 괜히 혼란을 주는 꼴이 될까 봐 주저했을 뿐이야. 아직 무엇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까."
조너선이 엉망이 된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확신이 거저 든답니까? 원한다면, 얻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요. 우선 보고서부터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주시죠."
"그, 그것이 아직...."
조너선은 말끝을 흐리며 시종장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도와주게, 제발.'
주인의 뜻을 알아챈 시종장이 앞으로 나서서 파토르의 시선을 대신 마주했다.
"그대가 폐하의 보모라도 되나 보지?"
파토르는 현 황실에서 유일하게 은발과 청안을 모두 가진 황족이었다.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순도 높은 색을 홀로 품은 탓인지, 그의 주변 공기만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시종장은 대공의 매서운 눈빛에 겁을 먹은 나머지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제 하다 하다 이런 사소한 것마저 남에게 떠넘기는구나.'
파토르는 제 앞을 가로막은 늙은 남자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그러진 눈빛에는 체념의 기색이 가득했다.
"대공 전하...."
"됐습니다. 상급 악마가 출현했으니 성기사단에서 나섰을 테고, 그놈들은 교황청 소속이니 그쪽으로 보고를 올렸겠지요. 지금의 황실에는 그 사실을 꾸짖을 자가 아무도 없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기사단을 호출하세요.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듣겠습니다."
당시 로베르가 지내는 자수정궁에 고작 성기사 한 명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파토르는 화를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 온 성기사는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분노에 찬 파토르와 마주했다. 그는 엉겁결에 고개부터 숙였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 곳이 틀리지 않았나."
파토르가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을 때, 성기사는 그대로 혀를 깨물고 자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라도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헉, 죄, 죄송....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하하, 아닐세. 대공을 예우하는 것은 나를 예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대공이 성기사단에 몸담았던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인데, 여전히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것 같아 기쁘기만 하네."
조너선은 늘 그렇듯 온화한 태도로 아랫사람의 잘못을 감싸 주었다. 반면, 파토르는 더욱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문을 텄다.
"자수정궁에 파견된 날의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 따로 불렀다. 네 상관에게 따로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지?"
"무, 물론입니다. 기억나는 대로 전부 고하겠습니다."
성기사는 그날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로베르의 시종이 직접 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급 악마, 바임의 불꽃이 로베르를 집어삼킨 뒤였다.
그런데 얼마 뒤, 불길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로베르는 직접 바임을 죽이고 다친 곳 하나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더 달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아직도 그날 일이 꿈만 같습니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집무실 안에 긴 정적이 흘렀다.
'그 아이가 관심을 얻고자 꾸민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내심 그 소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던 조너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너선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한번 소문의 진위를 확인했다.
"이 황실의 명운이 걸린 일이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고해야 할 것이다. 황자가 정말 신성력을 각성했나? 그 힘으로 상급 악마를 소멸시킨 것이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건 분명 신성력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특권 사제님들과 맞먹을 정도의 힘이요."
"...."
"저는 교황 성하를 섬기는 기사이기에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정말로 성녀님의 예언이...."
"성녀의 예언이 틀렸다."
파토르는 그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대신했다. 곱씹을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고, 성녀의 예언이 틀렸다.
그 사실이 제국에 불러올 변화를 그리는 대공의 푸른 눈에 옅은 안광이 돌았다.
겨울 바다처럼 시리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투명한 호수처럼 반짝이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폐하, 오랜만에 막내 조카님을 한번 뵈어야겠습니다."
"...그래.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조너선은 왠지 모를 오한을 느끼며 파토르의 제안을 승낙했다.
* * *
에피파네스 황가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몇 가지 있다.
[주신, 루멘을 모시는 자로서 중혼하지 않을 것.]
[황태자 책봉 후, 모든 황자와 황녀는 궁을 떠날 것.]
[신성력을 타고난 황족은 교황청의 부름에 응할 것.]
황족의 의무처럼 부과된 무거운 규칙들 사이에 생뚱맞은 조항이 하나 끼어 있었다.
[황실 식구들은 한 달에 한 번, 지정된 날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낼 것.]
문제의 마지막 규칙은 현 황제인 조너선이 추가한 것으로, 대공과 황자들의 반발에도 십 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어느 순간부터 규칙의 유일한 예외가 되었다.
누구도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우리 황자님을 초대하셨다고요?"
그렇기에 황제의 초대는 이른 아침부터 자수정궁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이제 내 인생, 아니 황자님 인생이 달라지는 거야! 주신 루멘이시여,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앤디는 호들갑을 떨며 로베르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숨도 쉬지 않고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황자님도 나 못지않게 기뻐하시겠지? 그럴 만도 하지, 이게 어떤 기회인데.'
예상과 달리, 로베르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아무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음, 그렇군. 아무튼 이제껏 난 안 갔다는 거지?"
"그야... 그래도 이번에 황제께서 직접 황자님을 초대하셨다는 게 중요하지요. 어서 일어나세요,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앤디의 간청에도 로베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기는커녕 이불 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더니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거절하고 와. 귀찮은 가족 모임 따위, 전처럼 가지 않는다."
로베르 황자에게 황제의 초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황실의 수치로 여겨지며 외면받던 황자가 그 일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러나 지금의 로베르에게 황제의 초대는 그저 성가신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앤디는 언성까지 높여 가며 반기를 들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정말 다시는 안 올 기회입니다! 황가의 규칙을 어기실 수는 없는 일이고요!"
"원래 안 가던 놈이 안 간다고 새삼 문제 될 건 없지."
로베르, 이 기특한 놈. 귀찮은 일은 정말 하나도 하지 않았군. 덕분에 아주 편하겠어.
로베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끈질기게 자신을 보채는 앤디를 바라봤다.
"문제가 되는 건 너의 언행뿐이다, 앤디. 어때, 내가 굳이 너에게 힘을 빼야 할까?"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자님의 뜻은 확실히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출세보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앤디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불참 의사를 본궁에 전달했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황자가 오지 않겠다고 했다고? 어째서? 여,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나? 아니면 이 아비 얼굴을 보기도 싫다는 거야?"
"폐하, 우선 진정을 좀 하시고...."
"그러면 날짜를 미루거나, 아, 아니, 그것도 안 된다. 이미 파토르가 그날 로베르를 시험하겠다고 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조너선은 자신이 또다시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폐하,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방도를 찾겠습니다."
황제의 충실한 시종장이 대신 나서 로베르의 시종을 호출했다.
본궁으로 불려 온 앤디는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황자님이 초대를 거절하신 이유가... 그냥 귀찮아서다?"
"네, 그렇다니까요! 요새 황자님은 늘 그런 식이세요. 뭐만 하면 성가셔, 귀찮아, 안 해, 네가 해. 자기 손으로 하는 거라고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뿐이라고요."
"대체 언제부터 그러셨나? 정도가 심한 게야? 그러기엔 예산이 부족할 텐데."
"부족하다마다요. 일손은 적지, 식량 창고는 텅텅 비었지, 예산은 진즉에 떨어졌는데 황자님은 자꾸 뭘 내오라지. 아주 미칠 노릇입니다!"
교황의 세력이 툭하면 로베르를 걸고넘어지는 탓에, 그의 궁에 많은 예산을 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로베르의 검소한 성격 덕분에 버텨 왔으나, 최근 로베르는 여느 황족 이상의 대우를 요구하고 있었다.
덕분에 자수정궁의 궁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드디어 사정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어림도 없네요. 황자님도 정말, 있는 것까지 다 빼앗겨 봐야 정신을 차리시지!"
"황자님께 그 무슨 망발인가! 가만, 그런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시종장은 앤디를 꾸중하다 말고 그럴듯한 묘안 하나를 떠올려 냈다.
"초대에 응하지 않아서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어떨 것 같나? 황제의 초대를 거절했으니 응당 그 대가를 치르셔야지."
오지 않겠다니, 황제의 권한으로 압박을 넣어서라도 오게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오, 옳은 말씀이십니다."
시종장의 의도를 알아들은 앤디가 곧바로 동조했다.
'잠시 자수정궁에 지원을 끊어 황자를 밖으로 끌어내자.'
시종장이 의견을 전하기 무섭게 황제의 허가가 떨어졌다.
로베르가 마음 편히 낮잠을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5]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5화. 신성력 각성
로베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지막한 오후에 일어났다.
"오늘도 이 몸은 쓰레기 같군."
온몸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을 울렸다.
댕-.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조금씩 머리가 맑아졌다.
"뭐야, 왜 아무도 안 와?"
그런데 아무리 종을 울려도 앤디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세안을 돕는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로베르는 세수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나섰다.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싶어 눈을 비벼 봐도 삭막한 복도만 보였다.
"단체로 간덩이가 부었나, 악마까지 때려잡은 주인을 방치해?"
궁인들의 극진한 대접에 익숙해져 있던 로베르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궁을 휘젓고 다니다가 주방에 도착했다.
한창 바빠야 할 공간 역시 조용했다. 문틈으로 열기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다.
"황자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인 하나가 급히 그를 맞이했다. 로베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앤디는?"
"앤디 님은 잠시 본궁 일을 도우러 가신다고...."
"내 시종이, 내 허락도 없이?"
"아, 아마 황명인 것으로 압니다. 원래 그럴 때 황자님께 따로 보고를 올리지는 않아서요."
망할 황자 같으니. 궁의 주인이라는 놈이 그 정도 체계도 잡아 놓지 않았어?
처음으로 진짜 로베르에게 불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앤디만 없는 게 아닌 모양인데. 다른 궁인들은?"
"대, 대부분 앤디 님을 따라 본궁으로 갔습니다. 얼마 뒤 있을 황실 모임을 준비하는 데 일손이 부족하다고 들었어요."
"가족 모임 하나 준비하는데 뭐 그리 많은 일손이 필요해?"
"그야 황실 가족분들이시니까요...."
"정말 쓸데없군. 됐으니 식사나 차려. 오늘은 식당에서 먹는다."
"아, 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로베르는 곧장 식당으로 성난 발걸음을 옮겼다. 늘 방이나 정원에서 밥을 먹었기에 식당은 처음 가 보는 것이었다.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 뒤이어 먼지바람이 그를 덮쳤다.
"에-에취!"
끈적이는 바닥에 신발이 자꾸 달라붙었다. 곳곳에 거미줄이 보였고, 금이 간 나무 식탁은 미묘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로베르는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는 식당 꼴을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가관이군."
잠시 후 나온 식사는 더욱 가관이었다. 멀건 수프와 으깬 감자가 전부였다.
"술이라도 내와. 종류는 상관없다."
"그, 그것이, 지금 창고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새로 받아 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하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거푸 고개만 숙였다.
'하루아침에 잘 나오던 식사가 끊기고, 수발드는 인간들은 죄다 사라지고, 술 한 병 받아 올 곳이 없어?'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당장 앤디가 없으니 손쓸 방도도 없었다.
결국 로베르는 곯은 배를 잡고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앤디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세상 모든 것이 로베르의 유흥을 막는 이유가 되었다.
그쯤 되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초대를 거절해서 이 지랄이 난 거야. 치졸하기 짝이 없군.'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로베르는 가장 먼저 보이는 하인을 붙잡고 위협했다.
"어떻게든 앤디를 해가 지기 전에 내 앞에 대령해. 못 하면 앤디도 죽고, 너도 죽는다."
"허억, 네, 네, 알겠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뭐 해? 뛰어."
하인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앤디를 붙들고 돌아왔다.
"화, 황자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앤디가 그를 올려다봤다. 하인은 잽싸게 자리를 피했고, 그들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아, 몸이 안 좋아서 정말 힘 빼고 싶지 않은데."
로베르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소리 나게 돌렸다. 앤디는 벌벌 떨면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니 한 번만 묻는다. 가족 모임에 안 나간다고 나한테 앙심을 품은 게 누구야. 너야, 황제야?"
"화,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하, 하지만 절대 황자님께 나쁜 마음을 품으신 게 아니라, 모임에 꼭 참여하시라는 뜻에서...."
겁을 먹은 앤디는 제 지분은 쏙 빼고 황제의 의도를 전했다.
'고작 모임 좀 안 나간다고 궁에 지원을 끊고, 일하는 인간들까지 빼 갔다는 거지?'
로베르는 새삼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다. 이 궁도, 수발을 드는 인간들도 전부 황자이기에 주어지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황제의 말 한마디로 언제든지 이 삶은 끝날 수 있었다.
하물며 쓸모없기로 유명한 저주받은 황자 따위는 아주 쉽게 버려질 게 분명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개선이 필요하겠어. 근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날 모임에 부르는 이유가 뭐야?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던 아들한테 너무 과하잖아."
"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성력 때문일 겁니다. 황자님이 정말 신성력 각성자인지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아, 좆 됐다.
앤디의 입에서 신성력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로베르는 자신이 낳은 현실에 절망했다.
마력은 신성력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힘이었다.
성기사 하나쯤이야 쉽게 속여넘겼지만, 황족들을 상대로도 거짓이 통할까?
뒤를 생각하고 일을 벌이라던 이슈타르의 잔소리가 충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본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신성력이 그렇게 중요한가?"
"무, 물론입니다! 특히 황자님께는 아주 중요한 문제지요. 황자님이 저주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어 줄 테니...."
"그게 무슨 상관인데?"
"부정한 것에는 결코 신의 힘이 깃들 수 없습니다. 신성력 각성자에게 악마가 들었다니, 말도 안 되죠. 분명 성녀님의 예언이 틀린 거라고요."
아니, 예언은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로베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진실을 감추어야 하는 처지였다.
거짓이 발각되는 순간, 이 삶도 끝날 테니까.
"좋아, 모임에 참석한다."
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황제와의 대치가 길어질수록 자신만 손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건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신성력을 인정받는다면 로베르의 위상은 달라질 테고, 다시는 이번과 같은 취급을 받을 일도 없을 터였다.
'생각해 보면 황족이라고 뭐, 다르겠어? 전쟁이 끝난 지 백 년이 다 됐다는데. 잘 속여넘기기만 하면 얻을 게 더 많아.'
로베르의 속셈을 모르는 앤디는 그가 마음을 바꾸자 마냥 기뻐했다.
"정말 참석하신다고요? 당장 소식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폐하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앤디는 곧장 본궁에 소식을 전하러 갔다. 그리고 며칠간 모습을 감추었던 자수정궁의 궁인들과 함께 돌아왔다.
* * *
다음 날부터 바로 모임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로베르를 깨웠다.
"황자님, 우선 의상은 새로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무난한 것으로...."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로베르는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거울 앞에 앉았다.
"이참에 머리를 좀 잘라 드려도 될까요?"
하녀 중 로베르를 가장 오래 모셨다는 메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든지."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가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사이 앤디는 그의 곁에 서서 쉴 새 없이 모임에 관해 떠들어 댔다.
"내일 일정도 함께 설명해 드릴까요? 참석하신 지 오래되었으니 기억이 희미하실 듯해서요."
"그래, 읊어 봐."
"우선 황녀, 황자님들과 오찬을 드시게 됩니다. 전에는 조찬이었는데, 2황자님께서 강력하게 항의하시는 바람에 작년부터 바뀌었다고 하네요."
"음, 그랬지. 마침 나도 그게 궁금했어. 형님의 항의가 통했다니 진심으로 다행스럽군."
건성으로 한 대꾸였지만,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시작될 고난을 점심으로 미룰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황제 폐하의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갖습니다. 그때부터 황후와 대공께서도 참석하실 겁니다. 그러다 해가 질 즈음에 다 함께 만찬을 즐기시고요."
만찬 자리를 설명하는 앤디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로베르 역시 술과 맛있는 음식이 끝없이 나오는 자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기대보다 불안이 앞섰다.
'드디어 나를 끔찍이 미워한다는 어머니를 뵙는 건가.'
언젠가 볼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그녀를 비롯해 생전 처음 보는 인간들의 가족 행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무사히 속여야 한다. 걸리면 뒈지는 거야.'
"황자님, 앞을 봐 주시겠어요?"
그때, 메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를 스칠 때마다 커튼 같던 앞머리가 서서히 걷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로베르는 불안을 함께 정돈했다.
인간을 현혹하는 건 악마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거짓을 품고 있더라도, 진실로 보이게 하면 되는 것이다.
'거짓이 통하려면 진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잘 알아야 하지.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공부다.
그는 이제라도 제 가족과 자신이 몸담은 세계에 관해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앤디, 너는 다른 시종들과 자주 어울리니 그들의 주인에 대해서도 나보다 잘 알겠지? 네 가벼운 입이 이번만큼은 내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정갈해진 머리칼 아래로 오랜 시간 가려져 있던 로베르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과거의 그가 품은 온기는 가신 지 오래였고, 그는 무감정한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인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 물론입니다. 황자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앤디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어쩌면 다시는 제 주인에게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황궁에는 수많은 눈과 귀가 있고, 그중 대부분이 교황청과 통한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교황청의 정상. 그곳에서 로베르를 둘러싼 모든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공이 성기사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로베르 황자의 신성력 각성을 확인할 목적인 듯합니다. 이상입니다, 성하."
황궁 주둔 성기사단의 단장, 눅스가 보고를 끝마쳤다. 교황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황실의 명운을 건 도박이자 도발인가. 황제가 이런 발칙한 생각을 했을 리는 없으니, 대공의 짓이겠지. 파토르 그놈은 사사건건 거슬리는군."
"그때... 그 여자를 이용해 멀리 치워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까요?"
"아니, 유리아는 기대 이상으로 도움이 되었어. 전 황후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예언의 저주받은 아이까지 낳아 준 덕에, 지난 이십 년간 일이 술술 풀리지 않았나."
위태롭던 황실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 지금의 황후, 유리아였다.
그녀로 인해 제국민들은 황실에 등을 돌렸고, 황권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 저주가 수명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로베르 황자가 신성력 각성자로 인정받으면, 성녀님의 예언은 틀린 것이 됩니다."
눅스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교황의 엄숙한 얼굴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성녀의 예언은 틀리지 않게 만들면 될 일이지. 우선 로베르가 정말 신성력 각성자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군. 저주받은 황자답게 삿된 힘을 각성한 건지 알게 뭔가."
"하지만, 대공이 일을 벌인 건 그만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쪽에는 그의 확신보다 믿을 만한 아이가 있지 않나."
"아타나스 말이군요."
때마침,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교황의 허락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교황은 빛을 등지고 선 그 남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타나시오, 나의 아이야. 세상에 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다. 그렇지 않니?"
"성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네가 직접 가서 로베르 황자의 진실을 가져오렴. 앞으로의 일은 전부 너에게 달렸다."
"...교황 성하의 명을 받듭니다."
사제, 아타나시오가 답했다.
[6]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6화. 에피파네스 황가의 형제들
로베르에게는 부모와 삼촌, 두 명의 배다른 형과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다.
다행히 로베르는 근 십 년간 그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 정도면 내가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하고, 그들도 내 변화를 지나치게 의심하진 않겠어.'
앤디는 주요 황족들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적어 주인에게 바쳤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적었으니, 대화하시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앤디 너 의외로 쓸모가 있구나? 다시 봤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찬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로베르는 초상화와 앤디의 노트를 대조하며 가족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에피파네스 황가의 핏줄은 보통 은발이나 청안을 타고난다. 로베르의 가족들 역시 대부분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황족답게 죄다 번지르르하게 생겼군.'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가진 로베르는 초상화에서조차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특유의 어두운 인상은 화려한 보석에 묻은 불순물처럼 전체적인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
"가족이라...."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꾸리고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악마와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이었다.
악마에게는 오로지 쾌락과 번식이라는 개념만이 존재했다.
상급 악마들은 일족을 위해 아이를 자주 낳았으나, 굳이 직접 기르지 않고 보모에게 맡겼다.
그런 식이니 가족을 특별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메리, 너는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지?"
메리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금방 답을 내놓았다.
"가족이란, 주신 루멘님과 우리들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제 분신처럼 여기고, 자식은 부모를 신과 같이 여기지요."
"그렇다면 형제는?"
"형제는 어릴 적에는 부모의 사랑을 두고 싸우는 경쟁자지만,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를 깨닫고 나면 둘도 없는 동지가 된답니다."
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가며 옷시중을 들었다.
'경쟁자이자 동지라니, 대체 뭔 소리람? 하여튼 인간들이란 참 복잡한 존재라니까.'
로베르는 생각에 잠긴 채 흰 셔츠와 금색 실로 황가의 문장이 수놓인 베스트를 차례대로 입었다.
"타이는 됐어. 답답하거든."
"그럼 이거라도.... 십자 성검이 새겨진 것이 좋으시지요?"
메리가 급히 보석함을 뒤져 브로치를 늘어놓았다.
그는 로베르가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골랐을 성검이 새겨진 브로치들을 치워 버렸다. 그리고 자수정이 박힌 은빛 브로치를 집었다.
"아니, 이걸로."
진짜 로베르를 흉내 낼 생각 따위 없었다.
그는 이미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할 일은 지금의 자신을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로베르로 살아남는다.'
로베르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제 세계의 전부였던 궁을 나섰다.
* * *
"로베르 황자 전하 드십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본궁 식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사방의 투명한 창으로 바깥의 햇살이 쏟아졌다.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조명이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그 아래에는 수십 명은 족히 앉을 법한 긴 식탁이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식탁보 위에 흠집 하나 없는 은식기들이 놓였다.
'내 궁의 식당이 얼마나 비루한지 더 잘 알겠어.'
로베르는 멍하니 온통 값비싼 것으로 도배된 식당 내부를 살폈다.
풉.
그때, 그를 비웃는 듯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베르는 그제야 식탁 앞쪽에 앉은 황녀와 황자들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황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상석에 앉은 남자가 가장 먼저 그를 반겨 주었다.
"오랜만이다, 로베르. 그간 의도치 않게 격조했구나. 별일 없이 잘 지냈니?"
샛노란 금발에 청안, 단정한 인상을 가진 그 남자는 1황자 하론이었다.
하론은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전 황후 소생으로, 황후를 향했던 제국민들의 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은 황자였다.
어릴 적부터 영민하여 황제의 일을 도왔고, 귀족들과의 사이도 원만해서 '완벽한 황태자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발렌시아 가문의 에리카 여공작과 약혼.
사실상 곧 황태자가 될 분이시니 무조건 잘 보이셔야 합니다.]
앤디는 하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근데 뭐랄까, 생각보다 평범한데.'
하론에게선 제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야, 오라버니 말 안 들려?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야?"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 율란 역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긴 은발에 청안, 앳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현 황후 태생이었다.
'나와 쌍둥이라더니, 별로 닮지는 않았군.'
그럼에도 저주받은 황자의 쌍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탓에, 여러모로 입지가 좋지 못하다고 했다.
심지어 현 황후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외척 세력에도 기댈 수 없는 처지라고.
보아하니, 율란은 그 화를 로베르에게 주로 푸는 모양이었다.
황족 중 유일하게 로베르의 궁에 방문하는 사람이 율란이라던 앤디의 메모가 이해가 갔다.
"운 좋게 공 한번 세웠다고 고개에 힘 들어간 꼴 좀 봐. 멀끔하게 차려입는다고 네 본질이 달라질 것 같니?"
"꽤 달라졌지."
인간에서 마왕이 된 건 엄청난 변화였다. 그 사실을 안다면 분명 그녀도 동의할 터였다.
로베르는 여유롭게 답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율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로베르를 바라봤다.
"왜 여기 앉아? 저리 꺼져!"
"같은 어머니를 둔 사이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누이."
"누, 누누, 누이? 이런 미친...."
율란은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호칭에 경악해 말까지 더듬었다.
"로베르, 우리는 모두 한 어머니를 두었단다. 그런 식으로 편을 가르는 듯한 말은 삼가는 게 좋겠어."
하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그 말에 옆자리의 2황자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이제 어머니마저 형님 마음대로 바꾸다니, 대단하시군."
일순 하론의 눈이 험악한 빛을 띠었다.
"아카키오, 너는 갈수록 부적절한 언행에 취미가 들리는 모양이구나. 제국의 황자로서 조금은 자중하는 게 어떠니."
"새겨듣지, 요."
2황자가 따분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더는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온몸으로 피력했다.
"형제들끼리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 괜히 말이 길어졌네. 나머지는 식사하면서 이어 가도록 하자."
하론은 언제 분노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시종장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시종들이 식탁 위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 에그 스크램블과 베이컨 요리, 두툼한 양갈비가 차례대로 놓였다.
'이거 역시 나오길 잘했어. 내일부터는 매일 이런 식사를 즐겨 주마.'
로베르는 속으로 감탄하며 음식을 양껏 입에 밀어 넣었다.
서걱거리는 나이프 소리 사이로 하론과 율란의 대화가 간간이 이어졌다.
"로베르, 처음에 폐하의 초대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어째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니?"
"뻔하죠, 오라버니. 다들 제 이야기를 떠들어 대니 우쭐해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요."
"율란, 말이 너무 거칠구나."
"틀린 말도 아닌데요. 야,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솔직히 불어. 너 따위가 신성력은 무슨. 그거 헛소문이지?"
"소문? 뭔 소문."
로베르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맞은편의 2황자를 살폈다.
그가 무시하기 힘든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탓이었다.
'신성력이 너무 강해서 반강제로 특권 사제가 됐다지. 저건 좀 위험하겠는데.'
피처럼 붉은 머리에 그와 대조되는 청안을 가진 반항적인 분위기의 미남.
그가 바로 황가 최악의 망나니라 불린다는 아카키오, 통칭 아카키 황자였다.
'근데 사제라는 놈 꼴이 왜 저래?'
그는 황족에게 금기시되는 검은 셔츠 차림이었다. 그나마도 단추를 제대로 여미지 않아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보는 쪽이 갑갑할 정도로 온몸을 법복으로 꽁꽁 싸매는 여느 사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의 쇄골 부근에는 수상한 자국이 가득했다. 하론과 율란은 필사적으로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카키 역시 형제들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얼굴로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이 형님이 부끄럽잖아."
시선이 느껴졌는지, 아카키가 고개를 들어 로베르를 노려봤다.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청안과 마주한 순간, 숨통이 틀어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뭐...."
주변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쨍그랑!
유리잔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동시에 로베르가 놓친 포크와 나이프가 바닥을 울렸다.
하론과 율란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로베르, 무슨 일이니?"
하론이 퍽 자상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러나 로베르는 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사방에서 신성한 기운이 저를 날카롭게 찔러 오고 있었다. 성검에 사지를 꿰뚫리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
"허억-."
로베르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힘겹게 신음하자 율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아카키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 로베르를 응시했다. 마치 눈앞의 소란이 저와 아무 상관 없다는 양 무심한 태도였다.
그러나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일부러 나만 노렸다는 거지.'
정체가 발각된 건가?
아니면, 단순한 견제?
목적이 무엇이든 우선은 대응해야 했다. 로베르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마력을 움직였다.
우웅-. 손바닥 아래에 마력이 응집되었다. 손가락 사이로 선명한 자색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을 본 황자들이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아침에 신성력이 생겼다더니, 진짜네?"
아카키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며 힘을 거두었다.
금방 호흡이 다시 편안해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로베르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의중을 읽어 내려 애썼다. 그가 여전히 힘을 풀지 않은 로베르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새 수저가 필요하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이 로베르의 앞에 포크와 나이프를 대령했다.
'저놈도 마력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건 다행이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그렇다고 해서 조금 전 기습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평온한 삶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이런 식으로 위협받지 않아야 했다.
그러려면, 위협을 되돌려 줘야겠지.
로베르가 나이프를 들었다. 잘 닦인 검면에 반사된 빛이 아카키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방금, 뭡니까?"
무감정한 목소리에서 명확한 살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로베르는 손에 든 칼을 당장 상대의 목에 박아 넣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론과 율란을 비롯한 그곳의 모든 인간이 본능적인 공포에 질렸다.
정작 당사자인 아카키는 눈이 부신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형제간의 정다운 대화였다고 해 두자."
"대화는 말로 하는 것이죠."
"누가 그래? 단단히 잘못 배운 모양인데, 형님이 이 기회에 가르쳐 주마. 어떤 방식이든 뜻이 전해진다면, 그게 대화다."
아카키가 뻔뻔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던 그때, 마력이 실린 나이프가 그의 접시로 날아와 꽂혔다.
지이잉-. 고깃덩이를 관통한 나이프가 옅게 진동하다가 힘없이 쓰러졌다. 뒤이어 은접시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하...."
아카키는 헛웃음을 흘리며 로베르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보다, 깔끔한 궤도로 허공을 가르는 유리 파편이 먼저 보였다.
날카로운 파편은 정확히 그의 가슴 정중앙을 노렸다. 아카키는 가슴이 꿰뚫리기 직전, 맨손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내가 깨트린 잔. 저도 이제 밟으면 꿈틀할 줄 안다는 건가.'
유리에 베인 살갗을 따라 피가 맺혔다.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붉게 물드는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쳇. 로베르는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보란 듯이 남은 잔을 들어 올렸다.
"제 뜻이 충분히 전해졌습니까?"
"뭐... 푸핫, 하하하하!"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피 묻은 유리 파편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게 지금, 무슨...."
하론의 얼굴 위로 서서히 경악이 번졌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꼭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베르, 대, 대체 무슨 짓이야!"
충격을 받은 건 율란도 매한가지였다. 로베르를 탓하는 율란의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보다시피, 형제간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야."
반면, 방금의 일격으로 목적을 이룬 로베르는 한결 가벼운 투로 응수했다.
"하하, 우리 아우님께서 이토록 배움이 빠르신 줄은 몰랐군. 여러모로 기대 이상이야."
아카키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하론과 율란을 지나쳐 곧장 로베르의 앞에 섰다.
"솔직히 난 숙부님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또한 틀리기를 바랐지. 네가 정말 신성력 각성자가 맞으면, 교황청에 볼모로 붙잡혀 산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
로베르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생각하면서.
"그랬는데, 방금 널 보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이 무슨 소용이겠어? 지금 네가 이렇게까지 날 즐겁게 만들어 준다는 게 중요하지."
"형님도 참... 정상은 아니네요."
"별말씀을. 아, 그리고 우리 숙부도 정상은 아니니 조심해라. 널 시험해 보겠다는데, 어떤 정신 나간 방식일지 기대가 된다."
"...예? 시,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까지 봐야 해? 가족끼리 밥 먹는 자리라면서!
로베르는 당장 제 궁으로 돌아가 앤디의 멱살부터 잡고 싶었다.
앤디가 준 노트에는 아카키가 미치광이라는 것도, 대공이 저를 시험하려 한다는 사실도 적혀 있지 않았다.
"꼭 신성력을 인정받아서, 저주받은 황자답게 이 빌어먹을 제국을 망쳐 주기를 바란다. 할 수만 있다면."
아카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격려하듯 로베르의 어깨를 툭 쳤다. 흰 셔츠 자락에 진한 핏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망연자실한 로베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7]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7화. 대공의 시험
황제의 집무실, 티타임을 위해 에피파네스 황가의 성을 가진 자들이 모였다.
황제 조너선은 식구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들 오늘도, 아니 오늘따라 더욱 상태가 좋지 않구나.'
황후와 대공은 늘 그렇듯 서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2황자 아카키가 굳이 소파를 놔두고 흔들의자에 누워 불순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는 꼴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오늘은 평소 대화를 주도했던 1황자 하론마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막내 황녀 율란은 하론의 눈치를 살피는 데 신경이 쏠려 그토록 좋아하는 에클레어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전과 달리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로베르는, 뭐가 그리 초조한지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었다.
조너선은 차마 로베르를 부른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침울한 분위기부터 풀어 주려 애썼다.
"대체 오찬 중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상태가 나빠졌느냐. 다들 악마라도 본 듯한 얼굴이구나. 하하...."
그러나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악마를 보긴 했지.'
로베르는 속으로 짧게 대꾸하고는 새로운 얼굴들을 힐끗거렸다.
아름다운 황후만큼이나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 대공이었다.
남부의 윈터스 영지를 가진 대공이자 귀족 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는 그는 황제보다 존재감이 강했다.
앤디가 대공에 대해 유독 강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공의 앞에서 금지된 대화 주제 세 가지
1. 황족의 뒷담화, 2. 대공의 혼사, 3. 세라 공녀(대공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안부 정도만 물을 것)]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어서까지 독신인 것과 입양 딸을 하나 두고 있는 것이 약점인 듯했다.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문제 될 건 없다고 여겼는데, 갑작스레 시험이라니.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 흐르는 기운은 신성력보다는 기사의 오러에 가까웠다.
신성력이 함께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 힘은 아카키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마력을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지. 인간 놈들이 예전만 못해서 다행이야.'
로베르는 비로소 평온을 되찾고 파이를 하나 집었다.
그때, 아카키가 휘파람을 불며 로베르를 가리켰다. 자연스레 이목이 두 황자에게 집중되었다.
"로베르를 배불리 먹이려고 부르신 건 아닐 텐데. 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십니까? 이래선 저만 이유도 없이 오랜만에 본 아우를 괴롭힌 미친놈처럼 보이잖아요."
너는 미친놈이 맞다.
로베르는 고개를 저으며 모두의 눈을 피하려 애썼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성가신 시험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아카키, 손은 왜 다쳤지?"
파토르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자 조너선이 화들짝 놀라 아카키를 살폈다.
"다치다니? 어딜? 손을 좀 보여 보거라."
"희생했다고 해 두죠. 그게 이 황실에서 제가 맡은 역할 아닙니까."
아카키는 코웃음 치며 손으로 다시 머리를 받쳤다. 머리칼에 옅은 피가 묻어났다.
파토르는 로베르의 옷에도 비슷한 자국이 남은 것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빈정거리지 말고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말해라."
"숙부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자 먼저 검증을 해 봤습니다. 아우님이 진즉 교황청 볼모가 된 나를 대신해 황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인지 알고 싶어서요. 됐습니까?"
"그렇군. 그래서, 결과는?"
혼내려는 거 아니었어?
로베르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파토르를 대놓고 쳐다봤다.
그가 그 이야기를 곧바로 수긍하자 대화의 흐름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카키는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못 본 사이에 겉도, 속도 싹 달라진 모양입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목격한 이들에 따르면 특권 사제들과 맞먹을 수준의 신성력이라던데, 네 의견은 어떻지?"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식기를 던지면서 개싸움을 한 게 다라서."
아카키의 말에 대공은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황제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두 아들을 번갈아 살폈다.
탁-.
황후가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못마땅한 눈빛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아카키오, 오찬에서의 네 언행은 참으로 부적절했다. 알고 있느냐?"
티타임 내내 침묵을 지키던 하론이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볼모라니. 너는 신성 제국의 황족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대체 언제까지 그 핑계를 대며 엇나갈 생각이지? 신을 모시는 일을 희생이라고 칭하는 것도 제발 그만둬. 누가 들을까 봐 두렵구나."
긴 훈계를 마친 하론이 이번에는 로베르를 꾸중하려는지 시선을 돌렸다. 로베르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하론을 마주 봤다.
막상 눈이 마주치자, 하론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하론 황자는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
파토르가 아카키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하론에게 물었다.
"아카키오의 불순한 태도와 부적절한 언행이 신성 제국의 황실에 위협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런데 저는, 전하가 교황청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장차 이 황실에 더 큰 위협이 될 듯해 그것이 우려스럽군요."
"그건...."
하론은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정적이 흐르고, 집무실 공기가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인간들은 입으로 싸우는 편인가. 마왕 회의였다면 진즉 한 놈의 목이 날아갔을 텐데.'
앤디의 노트 덕에 로베르도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황권 강화를 원하는 파토르와 교황청에 우호적인 하론.
둘의 대화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황족의 대립이자, 황태자가 될 조카를 향한 삼촌의 훈계였다.
악마들의 싸움에 비하면 지루하긴 해도, 당사자가 아닌 방관자로 싸움을 구경하는 일은 꽤 즐거웠다.
'나는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되니까. 앞으로는 그저 궁에서 놀고먹다가, 황태자가 결정되면 내 몫의 재산을 챙겨, 적당한 영지에 대저택을 짓고 또 놀고먹어야지.'
로베르는 마음 편하게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를 동내면서 황족들의 신경전을 감상했다.
이내 황후까지 참전하며 재미가 더해졌다.
"대공께서는 두 황자를 평등하게 대하지 않으시네요."
황후 유리아는 옅은 분홍빛 머리에 자안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잘 꾸며진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몸의 어머니답게 목소리까지도 아름다우시군.'
로베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유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2황자의 무례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고 도리어 하론 황자를 꾸짖다니요. 두 사람 다 대공의 조카가 아닙니까. 그러니 둘 모두를 그리 대해 주세요."
"다른 이도 아닌 황후 폐하께서 친히 그런 말씀을 하실 정도로 제가 못되고 모자란 숙부로 보였다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고상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황후 폐하의 조언대로, 이제라도 숙부 역할을 제대로 해 볼까 합니다. 그리하려면 이제껏 가장 소홀했던 로베르 황자가 그 시작이 되어야겠지요."
어?
대공은 대화의 흐름을 제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데 아주 능숙했다.
덕분에 로베르는 한순간에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려들어 가게 되었다. 유리아의 차분한 얼굴에 금이 갔다.
"그게 무슨...."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숙부님이 제게 소홀하다 느끼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태껏 목숨을 부지한 것도 다 숙부님 덕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는 제발 빼 줘. 내 궁 앞으로 예산만 넉넉히 잡아 주면 만족한다고.
로베르는 아는 정보를 모두 동원해 파토르의 말에 반박했다.
로베르가 목소리를 높이자 황제 부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이미 더한 모습을 목격한 황자들과 황녀는 시큰둥했다.
그들 사이에서, 파토르가 낮게 웃었다.
"숙부라, 그리운 호칭이구나. 다시 나를 그렇게 불러 줘서 고맙다."
"...예?"
"아카키 저놈 말대로, 많이 변한 모양이지. 이제 신성력에 관해서만 확인하면 되겠어."
"아, 그, 확인이라고 하심은...."
"대뜸 이런 말부터 하게 되어 미안하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를 시험해야겠다. 그래야 하는 사안이니 양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니까 그 시험이란 게 대체...."
만약 성검을 들어 보라거나 하는 식이라면 매우 곤란하다.
성검은 멍청한 인간들과 달리 마력을 단번에 감지하고 악마의 심장을 태워 버릴 테니까.
결국 그 시험의 정체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로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뒷말을 기다렸다.
"미리 전달해 줬어야 하는데, 미처 그러질 못했구나. 허가가 오늘 오전에 떨어졌거든. 조금 뒤에 성기사 결투를...."
"안 됩니다!"
파토르가 시험을 설명하려던 그때, 유리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황후가 그런 소리를 내는 건 드문 일인지 모두가 놀란 얼굴이었다.
파토르마저 처음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자가 신성력 각성자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 애는 어릴 적부터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았어요.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습관을 고치지 못한 것 같아 어미로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황후께서는 대체...."
"로베르, 너도 간절히 바라던 관심을 얻었으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그만두렴. 대공이 정말 너를 믿을 줄은 모르고 저지른 일이잖아. 이러다 너로 인해 황실 전체가 망신당하겠구나. 나를 얼마나 더 괴롭힐 생각이니?"
그녀에게선 아들을 향한 한 줌의 신뢰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공포와 경멸만이 가득했다.
'묘하게 불쾌하군. 꼭 진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잖아.'
마왕이라는 정체를 감추어야 하는 로베르의 입장에선 유리아의 불신 어린 눈초리가 달갑지 않았다.
"유리아, 너무 그러지만 말고...."
조너선이 쩔쩔매며 그녀를 달랬다. 파토르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대놓고 코웃음 쳤다.
"도저히 못 들어 주겠군.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저는 로베르가 진실하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오늘 로베르가 성기사단을 꺾고 성녀의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하리라 믿거든요."
'성기사단이라.'
그보다 그 내기, 이미 승패가 정해졌는데.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파토르는 확신에 찬 눈으로 로베르를 바라봤다.
"일어나라, 로베르. 네가 저주받지 않았고, 마땅히 자격을 누려야 할 에피파네스라는 걸 증명해야지."
"...물론입니다."
가여운 파토르, 너는 이미 틀렸다. 그러나 너의 그릇된 믿음이 의심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니, 협조하지.
절대 시험을 거저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야. 이참에 이 몸의 처우를 개선하고 받을 몫을 늘리려는 게 아니라고.
로베르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황실 기사단의 강력한 항의에도, 본궁 연무장은 줄곧 성기사단 전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황족들이 단체로 그곳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급히 그를 위한 자리가 꾸려졌다.
집합 명령을 받고 모인 성기사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대한 불만을 나누었다.
"성기사들을 죄다 동원해서 한다는 게, 고작 막내 황자와의 결투라니. 우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공이 단장을 관둔 지가 언젠데, 무슨 권리로 모이라 마라 하는 겁니까? 황제도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궁을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교황 성하의 은혜임을 알아야지요."
"자 자, 진정하고 그 잘난 대공이 자충수를 둔 것에 만족합시다. 오늘이 대공 혼자 간신히 지켜 오던 황가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바닥을 치는 날이니까."
"성기사 결투가 어떤 식인지 아는 자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를 일이네요. 덕분에 괜히 불쌍한 황자만 제대로 망신당하게 생겼군요."
성기사단의 누구도 로베르가 신성력 각성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날 자수정궁에 파견된 신입 성기사가 악마에 홀려 헛것을 보았거나, 로베르에게 매수당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라고, 멍청한 인간들아....'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는 그 신입 성기사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망신을 당하는 쪽이 어디일지 짐작이 가는 탓이었다.
"저기 오네. 막내 황자는 그새 꼬리를 말고 도망갔는지 보이지도 않지만."
멀리서 황제와 그의 가족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단은 일제히 황제를 향해 섰다. 그러고는 손에 든 검으로 바닥을 울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말보다 검에서 시작된 진동이 훨씬 길었다.
오러가 실린 검파가 퍼져 나가며 연무장에 모래바람이 한차례 일었다.
그 불손한 행동은 일종의 시위였다. 성기사단이 섬기는 자는 주신, 루멘의 대리자인 교황임을 알라는.
의도를 알아챈 파토르가 표정을 굳혔다. 반면 아카키는 우습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저 망나니가 왜 저렇게 웃지?'
그 순간, 그들의 뒤편에서 불길한 빛이 일렁였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날을 바싹 세운 채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야?"
"그래서 누구부터 상대하면 되나?"
그곳에서, 검을 대충 어깨에 진 로베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소란이 멎었다.
[8]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8화. 성기사 결투
대공의 요청으로, 황가 식구들은 다 함께 로베르의 결투를 지켜보기로 했다.
황족들이 나설 채비를 하는 동안, 로베르는 아카키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다.
"이봐요, 형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성기사들이 성검을 씁니까?"
"뭐? 그건 대체 무슨 농담이냐?"
아카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다 로베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그런 걸 묻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아우님, 성검이 뭔지 몰라? 왜, 성기사들은 유니콘을 타고 다니냐고도 물어보지?"
"그건 됐고, 그래서 안 쓴다는 거죠?"
로베르는 시비를 가볍게 무시하며 거듭 성검에 관해 확인했다. 아카키는 맥이 풀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신이 내렸다는 십자 성검은 교황청에 있고, 신성 영웅들이 쓰던 검은 주인과 함께 묻혔다. 특권 사제들의 아티팩트 검을 성검이라고 부르긴 한다만, 진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교황청에 십자 성검이 있다면서요. 그럼 교황이 쓰는 것 아닙니까?"
"교황이 그걸 어떻게 쓰냐? 신성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데."
"형님 정도 되는 사제들도 못 쓰고요?"
"사제'들'? 나 정도 되는 놈이 어디 흔한 줄 아나. 아타나스 그놈 빼고는 다 나보다 한참 밑이야."
"아타나스?"
한껏 으스대던 아카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카키는 그 이름을 언급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돌렸다.
"아무튼 추기경들 밑으로는 성검을 직접 보지도 못해. 이제는 그런 게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다."
아,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수 있는 건가.
마지막 남은 위험 요소마저 깔끔히 사라졌다. 로베르는 싱글벙글 웃으며 속으로 백 년도 못 살고 죽어 준 신성 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근데, 성기사 결투가 검이나 휘두르는 거면 그냥 결투랑 뭐가 다른 건데요?"
"명색이 황자라는 놈이 질문하는 수준하고는. 잘 들어. 딱 한 번만 설명해 준다."
극소수의 인간들은 신성력 코어를 타고난다. 그것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징표로, 곧 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신성력은 코어의 크기와 성능에 좌우된다. 좋은 코어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단련은 별 의미가 없다.
그와 달리 신성력 코어를 가진 이가 검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오러'라는 힘은 단련할수록 더 강해진다.
성기사란 바로 그 오러를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일반 기사에 비하면 강하지만, 악마를 상대하기엔 부족해 보통 힘을 증폭시켜 주는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결투 중에도 검 아티팩트를 사용하니 까딱하면 개죽음당한다. 승패가 나기 전까지 누구도 개입할 수 없고,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묻지 않거든."
"그 아티팩트라는 거, 신성력이든 오러든 안 가리고 집어넣을 수 있는 건가요?"
"뻔한 소릴. 구마 의식에 사용하는 최상급이 아니고서야 아무 상관 없어. 그보다 넌 아는 게 대체 뭐냐? 널 그따위로 가르치고 월급을 받아 간 황실 교사부터 잡아들여야겠다."
아카키는 투덜거리면서도 묻는 말에 빠짐없이 답해 주었다. 로베르가 대공의 시험을 통과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마력으로도 작동하는지 미리 확인해 보는 게 낫겠지.'
결투에 쓸 검 하나 빌려 달라고 부탁하자, 아카키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주었다.
로베르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챘다. 은색 틀에 커다란 루비가 박힌 브로치였다.
"혹시 검이 뭔지 모르세요?"
"검, 꺼내 봐. 아까처럼 힘을 쥐어짜 내면 된다."
아카키가 히죽거리며 말하는 것이 영 수상했으나, 로베르는 속는 셈 치고 브로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금방 부서질 줄 알았던 브로치는 그대로 마력을 흡수했다. 로베르의 힘을 머금은 루비가 서서히 자색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마력의 흐름이 멈추고, 환한 빛이 일며 브로치를 따라 검 손잡이가 생겨났다.
로베르는 얼떨결에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자 곧바로 매서운 칼날이 솟았다.
"오, 되네요."
아카키는 멍하니 검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건 뭐, 시험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럼 이제라도 숙부님께 다시 말씀해 주시는 건?"
"안 되지. 그건 재미가 없잖아."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이번만큼은 이 아우가 재롱 한번 떨어 주지.'
로베르는 습관처럼 칼등을 어깨에 턱 얹었다. 손잡이 정중앙에 박힌 보석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 * *
"화, 황자님? 언제 거기에...."
갑작스러운 로베르의 등장에 성기사들은 한껏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방금. 다들 어서 와서 앉으시죠. 빨리 시험을 끝내고 만찬이나 즐기고 싶거든요."
로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황족들을 향해 손짓했다.
"저, 저게 갑자기 왜 저기서 나와?"
율란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제 옆에 있던 그가 눈 깜짝할 새에 연무장 한가운데 서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 역시 멍하니 로베르를 바라보기만 했다. 특히 유리아와 하론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은 채였다.
아카키가 낄낄거리며 가장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숙부, 제가 그랬잖습니까. 아주 마음에 든다고."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게 아니라 다행이군."
파토르가 무심하게 답하며 나란히 착석했다. 그제야 조너선도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가족들을 챙겼다.
"유리아, 우선 앉읍시다. 우리 아들의 결투를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도 어서 앉거라."
황족들이 앞쪽에 마련된 관람석에 앉는 동안, 성기사들은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지리 황자가 우리 눈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분명 무슨 속임수를 쓴 걸 테지. 결투에서 전부 탄로 날 거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열을 맞추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결투에 나설 기사가 몸을 푸는 동안, 로베르는 불량스러운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황자께선 몸을 풀지 않으십니까?"
"뭐 대단한 걸 한다고 그렇게까지. 귀찮아."
"분명, 후회하실 텐데요."
"글쎄다. 악마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너희가?"
대놓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태도에 성기사들 사이로 분노가 번졌다.
그들은 혹시 제게도 황자를 짓밟아 줄 기회가 올 것을 대비해 단체로 결투에 나설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기사가 연무장 중앙으로 나섰다.
"대공께서 만드신 자리이니, 전하가 직접 시작을 알리시지요."
관람석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성기사단의 단장, 눅스가 은근히 조소 어린 투로 말했다.
"그러지. 잠시 빌리겠다."
"뭘...."
파토르는 눅스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허리춤의 검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검 끝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쿵-.
청색 오러가 사방으로 퍼지며 성기사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실례했네."
파토르는 검을 빼앗는 게 기사에게 대단한 모욕을 주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별말씀을요."
눅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검을 돌려받았다.
결투가 시작되자, 기사가 검을 들어 로베르를 겨누었다.
"그래도 제국의 황자이시니, 제가 한 수 양보하겠습니다. 먼저 들어오시죠."
로베르는 여유롭다 못해 느리게 일어서더니 어깨에 지고 있던 검을 내렸다.
"나는 어떠한 의심도 받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 되었으면 하거든. 협조해라."
"황자님의 체면을 위해 일부러 져 달라는 뜻인가요? 성기사의 명예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발끈한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로베르는 오른손으로 귀를 후비며 왼손에 쥔 검에 마력을 실었다. 힘을 머금은 보석이 환하게 빛났다.
"일부러? 아니지. 넌 그냥, 맥없이, 처참하게 나한테 져."
"도저히 못 들어 주겠습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죠!"
기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로베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익-. 오러가 실린 검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로베르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쾅!
굉음과 함께 검기가 스친 바닥이 깊게 파였다. 사람 하나를 죽이고도 남을 위력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제라도 멈추게 해야 하는 거 아녜요? 쟤가 저걸 어떻게 이겨요. 저러다 죽기라도 하면...."
"율란, 결투를 멈추는 건 불가하단다. 죽기 전에 본인이 항복하면 될 일이야. 로베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지켜보자."
율란에게 답해 주는 하론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말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로베르...."
조너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막내아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때, 또 한 번 그의 위로 검이 떨어졌다.
칭-!
이번에는 로베르의 검이 정면으로 공격을 막았다. 오러가 힘없이 흐려지고, 기사의 검에 선이 하나 그어졌다.
"어?"
선을 따라 순식간에 균열이 일더니, 손쓸 틈도 없이 검신이 산산이 조각났다.
기사가 양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있던 손잡이마저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뭐야, 진짜 엄청나게 약하네."
"자, 잠깐...."
"싸움에 그런 게 어딨나?"
로베르가 씩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칼등으로 기사를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했다.
연무장의 모든 이들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일격에 검 아티팩트를 부수고, 성기사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다니.
로베르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퍽, 퍽, 퍽, 퍽, 퍽.
일정한 간격으로 끔찍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공격이 닿을 때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졌다.
"끄어억...."
기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로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하, 하, 항."
기사가 힘겹게 입을 열어 항복 의사를 전하려 했다.
"뭐라고? 하하하? 웃는 걸 보니 아직 계속 싸우고 싶은 모양이구나."
로베르는 일부러 잘못 들은 척하며 다시금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 이 결투는 무효입니다!"
얼굴이 사색이 된 다른 성기사 하나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퍽! 뒤이어 로베르의 검이 쓰러진 기사의 코앞에 꽂혔다. 기사는 머리카락 몇 올이 휘날리는 것을 보며 결국 정신을 놓아 버렸다.
"무효라니?"
파토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성기사는 앞으로 나서서 로베르의 검을 가리켰다.
"저 아티팩트에 삿된 저주가 걸린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성기사의 검이 부서질 리가...."
"저거, 내 건데. 설마 내가 저주를 걸었단 말인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지?"
아카키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성기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무 증거도 없이 사제를 모함하는 것은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였다.
'단장님, 살려 주세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성기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눅스만 바라봤다.
그러나 눅스는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눈길을 외면했다.
성기사가 망연자실하던 그때, 뜻밖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그러니까 검이 의심스럽다는 거지? 그럼 바꿔."
로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검을 뽑아 성기사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곧장 달려들어 성기사의 검을 빼앗아 갔다.
성기사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다가, 숨을 들이마시며 단단히 쥐었다.
트집에 가까운 항의를 로베르가 받아들였으니, 이제는 성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꺾어야만 했다.
"그 숙부에 그 조카군요."
눅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한 마디 얹었다. 파토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니, 나보다 훨씬 더한 듯한데."
치이잉-. 곧바로 충돌이 시작되었다. 성기사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쳇, 확실히 성능이 다르긴 다르군."
로베르는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공격을 막아 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두 번째 결투를 지켜봤다. 검파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사방을 울렸다.
로베르가 미련 없이 넘겨준 검은 상급 아티팩트답게 단번에 부서지지 않았다.
정확히 세 번 만에 부서졌다.
"어, 으아...."
"봤지? 어디서 검 핑계를 대고 있어."
퍽. 그다음은 전과 같은 무분별한 구타였다. 성기사는 금세 제 동료와 같은 꼴이 되어 갔다.
"저 자식이 남의 검을...."
검의 원래 주인인 아카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파토르는 미소 지으며 의자에 편히 기댔다.
"그러게, 왜 하필 저 검을 빌려줬느냐? 꽤 아끼던 것으로 아는데."
"아꼈던 것이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아카키는 굳은 표정으로 답하며 맞은편 기둥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사이 또 다른 성기사가 동료를 위해 앞으로 나섰다.
파토르는 결과가 뻔한 결투를 굳이 말리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대신 아끼지 않았던 것을 지금부터 아끼면 되겠구나."
성기사단을 짓밟았으니, 교황청에서도 로베르의 각성이 뜬소문이 아님을 알게 될 터였다.
로베르는 저주받지 않았다.
그건 성녀의 예언을 들먹이며 황실을 압박하는 교황청의 오래된 수법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늘의 결투는 황실 측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제국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로베르였다.
"고려해 보지요."
동생에게 힘을 실어 주라는 파토르의 의도를 눈치챈 아카키가 짧게 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제 인생을 위협할 만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 그날의 로베르는 기어코 성기사단 전부를 꺾었다.
"다들 보셨습니까! 이제 다시는 절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저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저주받은 황자라....'
그런 그를 집요하게 좇는 시선이 있었다.
[9]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9화. 그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다 (1)
역사에 길이 남을 성기사단과 로베르 황자의 결투는 해가 질 즈음까지 이어졌다.
"어라? 넌 그때 그놈 아니냐?"
"제, 제가 졌습니다!"
마지막 남은 성기사가 검도 들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며 마침내 긴 결투가 막을 내렸다.
눅스는 처참하게 패한 단원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다들 저 꼴이 되도록 숨이 붙어 있다니. 교황 성하께서도 황자님의 배려를 높이 사실 겁니다."
"황자의 은혜임을 똑바로 전해라."
파토르는 기어코 성기사단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았다. 눅스는 이를 갈며 단원들을 챙겨 물러갔다.
"이제 시험은 끝이겠죠?"
로베르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으며 손에 남은 피를 털었다. 그의 주변으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물론.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 차차 오늘의 공을 치하하도록 하지."
"굳이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왕이면 제 궁으로 배정되는 예산부터 늘려 주시면 좋겠네요."
"가장 먼저 검토해 보겠다. 폐하, 이만 만찬을 즐기러 가실까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완전히 넋을 놓고 있던 조너선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아, 그, 그래. 그래야지. 유리아, 이만 일어납시다."
"...저는 몸이 안 좋아 만찬에는 함께하지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유리아는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일어섰다. 파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내가 대공께 내 상태를 일일이 설명할 이유는 없지요."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함께 축하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제라도 로베르의 어머니 된 도리를 다하실 기회인데요."
"대공!"
유리아의 가냘픈 외침에도 대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저 둘은 유난히 사이가 나쁘군. 황제는 둘 모두와 사이가 좋은 모양이고.'
조너선은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어머니."
이럴 때는 아들이 나서 줘야 한다지.
유리아가 반사적으로 로베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대뜸 끌어안았다.
"무, 무슨 짓이야!"
뜻밖의 행동에 그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로베르는 그녀를 세게 한번 안고는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전부터 한번 안아 드려야지 했는데, 기회인 듯해서요."
"푸하하,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진짜 미친놈! 하하하하!"
아카키가 못 참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아는 친아들과의 포옹이 대단한 수치인 것처럼 치를 떨며 로베르를 노려봤다.
"지금 네가... 나를 조롱하는 것이야?"
예상보다 그녀의 반응이 격렬한 탓에,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십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네가 태어난 후로 난 매일을 지옥에서 살았어. 너를 진즉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 나는 어미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고 했잖니!"
"아, 그래서 저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하셨군요?"
로베르의 말에 황족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었다.
유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란히 선 조너선과 파토르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저를 낳은 건 어머니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를 탓하셨습니까? 제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요."
로베르는 줄곧 그 이유가 궁금했다.
"부모는 자식을 제 분신처럼 여기고, 자식은 부모를 신과 같이 여기지요."
메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가족은 그런 의미라고.
그러니 유리아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악마들도,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꾸짖지는 않았다.
"왜 답하지 않으세요? 궁금해 죽겠다고요. 내 어머니만 이런 건지...."
짝! 그 순간, 유리아가 손을 들어 로베르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나 정작 유리아가 친 것은 그의 손등이었다.
"저는 아무에게나 뺨을 내주지 않는답니다."
로베르가 제 뺨에 손을 올린 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핏자국이 눌어붙은 손등이 더욱 붉어졌다.
"유리아!"
"황후, 대체 무슨 짓이오!"
파토르는 물론이고 조너선까지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너, 너...."
그녀는 당장 뒤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비틀거렸다. 윤기가 흐르는 분홍빛 머리칼이 힘없이 흩날렸다.
하론이 곁으로 와 그녀를 부축했다.
"로베르, 그만하거라. 어머니를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하겠어?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이리 날뛰니 앞으로가 걱정이구나."
"아니, 내가 뭘 했다고...."
"폐하, 어머니께서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제가 직접 궁으로 모셔다드리려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조너선은 복잡한 얼굴로 유리아와 황자들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답을 주었다.
"그러도록 해라. 만찬은 나머지 식구들끼리 즐기자꾸나."
하아-.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일단락되었다.
하론은 유리아를 부축해 길을 나섰다.
"저도 됐습니다. 재수 없는 낯짝을 봤더니 밥맛이 떨어져서. 그럼 또 보자, 아우님."
아카키는 황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아, 실례."
그러더니 굳이 하론과 유리아 사이를 가르고 맞은편 복도로 사라졌다.
"저 녀석이.... 어머니, 아카키오에겐 제가 따로 주의를 줄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럴 것 없어. 너도 피곤하겠구나. 어서 돌아가자."
로베르는 퍽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가 보면 저쪽이 친아들인 줄 알겠군.'
한바탕 날뛰어서인지 잠시 잊고 있던 통증이 되살아났다.
로베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은 가족들을 따라 본궁 식당으로 향했다.
* * *
막상 만찬이 시작되고 술이 오가자 금방 분위기가 풀어졌다.
'역시 피로는 술로 풀어 줘야 한다니까.'
로베르는 결투 때와 비교도 되지 않는 열정으로 고기를 썰고 술잔을 비웠다.
"걸신이라도 들렸니? 적당히 먹어."
맞은편에 앉은 율란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타박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채였다.
"하하, 로베르 황자가 술을 즐기게 되니 좋구나. 앞으로 이 아버지와 종종 어울려 주렴."
"아버지, 그보다 다시는 제 궁에 수작... 아니, 손대지 마세요. 밥도 굶어야 할 정도였다고요."
"그, 그래. 이번 일은 미안하다. 너를 부르는 것이 너무도 중해 그랬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 약속하마."
조너선 역시 조심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아까 황후와의 대화가 원인인 듯했다.
'뭐지? 우울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정작 로베르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결국 의문도 해소하지 못하고 손등까지 얻어맞긴 했지만,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을 마무리하면 더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로베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또다시 잔을 비웠다. 이제 시종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알아서 술을 채워 주었다.
"로베르, 혹시 황태자가 되고 싶나?"
그때, 파토르가 뜬금없이 물었다. 황족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요? 전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로베르는 최대한 진실해 보이려 노력하며 냉큼 답했다. 더 이상 황실의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이구나."
대공은 안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황위 계승권을 포함해 네가 억울하게 빼앗긴 권리를 전부 되찾아 줄 생각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혼란이 교황청을 넘어 황실에 미치지는 않았으면 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겠지? 다음 황태자는 하론이 될 거다."
비록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하론은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니 파토르는 예정대로 하론을 황태자로 추대할 생각이었다.
지난 몇 년간, 교황의 입김으로 인해 황태자 임명 건이 계속해서 귀족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의회 구성원 중 성직자들의 비율이 너무 높은 데다, 로베르의 존재로 인해 중도파 귀족들이 황실을 불신하는 것이 이유였다.
"너의 복권으로 황실은 신의 미움을 받는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겠지. 그걸 시작으로 교황청의 횡포를 저지하고 황태자 임명을 진행할 생각이다."
"그렇군요. 힘내십시오. 저는 절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수정궁에 틀어박혀 살겠습니다."
승리에 취한 로베르는 파토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대공의 의도를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그건 안 될 말이다. 너는 황실이 내세울 가장 강력한 카드니까. 조용히 살 생각은 미리 버리는 게 좋아."
"...예?"
"앞으로 여러 사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귀족들과 친분을 쌓도록 해. 우선 그것부터 시작이다."
사교계 이야기가 나오자, 가만히 듣고 있던 조너선 역시 동조하고 나섰다.
"이참에 여러 가문의 영애들과 만나며 혼처도 정해 보렴. 너와 율란이 성년이 되도록 약혼조차 하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한시름 덜겠구나."
"그건 좋지만, 아니, 네? 그 말은 지금...."
"우선 연회를 열어 네가 신성력 각성자임을 알리고 성녀의 예언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다. 중요한 자리이니 빠짐없이 준비해."
파토르는 기어코 로베르의 평온한 황자 인생에 종언을 고했다.
그날 밤, 로베르는 밤새 제가 처한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동이 틀 즈음에야 깨달았다.
이미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것을.
'이건 단순히 처우가 달라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내 손으로 재앙을 불러왔구나.'
당장 마력을 얻기 위해, 그것이 마력임을 감추기 위해,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순간의 선택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가 한순간에 저를 덮쳤다.
황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고, 교황청은 있는 힘껏 짓밟으려 할 터였다.
신성 제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갈등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 것이다.
로베르 황자의 몸에 든 마왕 벨페고르가.
"으아아아아!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난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고, 이 좆같은 세상아! 황자 따위 안 해, 다 때려치워! 아악!"
한동안 자수정궁은 로베르의 절규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 * *
연무장 너머, 어두운 인영이 복도 끝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카키는 걷는 속도를 높여 그를 따라잡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여기서 다시 볼 거라 기대도 안 했던 상판인데."
명백한 시비조의 말이 들려오자 그가 천천히 뒤돌았다.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한 아카키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그에게 다가갔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는 신성 영웅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제국 최강의 사제, 아타나시오였다.
뛰어난 외모에 빈민가의 전쟁고아가 교황의 눈에 들어 직속 사제가 되었다는 극적인 스토리가 더해져 제국민들에겐 '신의 사랑을 받는 사제'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카키는 그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우리 아타나스 형제님께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러 여기까지 납시었을까."
아타나스는 말없이 아카키를 마주 봤다. 그의 시선이 아카키의 얼룩덜룩한 목덜미에 닿았다.
"요새 짐승이라도 키우십니까."
"짐승을 키우는 건 네 주인이겠지."
사제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실을 돌려 지적하는 것이었다. 아카키는 질세라 받아친 뒤 그의 반응을 살폈다.
"발언에 주의하심이 어떠신지요. 황궁에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내 집에서 그따위 것까지 신경 쓰며 지내라? 사람을 피 말려 죽일 작정인가 보지."
"글쎄요. 다행히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 여러모로."
날이 선 대화가 계속해서 오갔다. 아카키는 그에게 말리기 전에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네 주인이 이번에도 황자를 물고 오라던?"
"주인이라...."
아타나스의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웃음기가 전혀 없는 눈은 아카키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황자님은 여전히 모르는 게 많으시군요."
"무슨 뜻이냐?"
"들짐승은 길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궁에 사는 것들은 또 다르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돌려 말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아카키는 금방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너, 말 빙빙 돌려서 좆같이 하는 버릇 안 고치면 죽여 버린댔지. 여기 왜 왔냐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잘 확인했으니, 남은 용건은 없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해. 갖은 수를 써서 로베르의 신성력 각성을 부정하겠지. 근데 그건 너무 쪽팔리지 않냐? 너도 봤잖아, 전에 네가 준 검까지 한순간에 가루가 되는 거."
"물론입니다."
쯧, 아카키는 맥이 풀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도무지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열을 내고 긁어 대도 돌아오는 것은 차분한 대꾸뿐이니, 제 꼴만 우스워졌다.
"조심해라. 조만간 내가 못 참고 널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귀한 손에 피를 묻히려거든 신중하셔야죠."
"너한테는 그럴 가치도 없다? 하, 주제 파악은 곧잘 하는구나."
"시기상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황자님과 같은 것을 원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타나스가 또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카키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네가 직접 그렇게 만들었잖아. 잊었냐?"
"망각은 신이 내린 축복이지요. 황자님께 루멘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끝까지 좆같은 새끼."
그날, 아타나스는 교황청으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던 모두에게 전했다.
"로베르 황자가 신성력을 각성한 게 맞습니다. 직접 확인했으나, 삿된 것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곳에 로베르를 의심하는 자는 남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아타나스가 한 일이었다.
[1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0화. 그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다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