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0화. 말할 수 없는 비밀 (3)
마계와 인접한 에드먼드 변경백령은 제국 영토의 1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영지였다.
그러나 악마들의 잦은 침략과 주변 주교령과의 영지전으로 현재는 버려진 땅이라고 불릴 정도로 퇴락하기에 이르렀다.
변경백령의 북쪽 경계에는 과거 신성 영웅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거대한 숲이 있었는데, 현재는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하급 악마도 아니고, 군단장들까지 드나들 정도면 제국의 안전선을 빼앗긴 거 아닌가?"
"그다지 위급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곳이 악마의 숲이라 불리게 된 지는 이십 년이 넘었으나, 그 피해가 변경백령을 넘어온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곳 전체가 제국의 안전선입니다."
그로 인해 죄인들이 사형보다 두려워하는 게 변경백령의 광산으로 보내지는 강제 노역형이라는 오래된 농담까지 있었다.
변경백령에 관해 설명하는 내내 아타나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로베르는 쉽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네가 그곳 출신이랬지. 너만한 놈이 근처에 가기만 해도 대부분 꼬리를 말고 도망갈 텐데.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는 거냐?"
"딱히 제 의지가 아니라는 것 외에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타나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목을 매만지며 답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이유로 저는 내일 웬만하면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칫하면 황자님의 목표물까지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요."
"뭐, 어차피 네 도움은 딱히 필요도 없어. 그래서 살아남은 군단장의 수는?"
"제가 열 놈을 처리했으니 대략 절반 정도 남았습니다."
아타나스는 대강 수를 헤아려 보더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교만 일족의 군단장들은 대부분 생존했고...."
"잠깐, 교만 일족은 전쟁에서 전멸했다고 들었는데?"
벨페고르로서 죽기 직전, 이슈타르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교만 일족이 전멸했으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실제로 인간들의 역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신성 영웅들을 필두로 한 제국의 연합군은 일선의 교만 일족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하며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군단장들은 대부분 생존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교만 일족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일족의 군단장들이 다시 나타났죠,"
"그렇다는 건, 이슈타르도? 부디 네가 죽인 건 아니길 바란다."
로베르가 평소와 달리 살기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타나스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지난 백 년간 나태 일족의 군단장들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멸한 건 그쪽인 모양이던데."
'다 죽었다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러나 새삼 사제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받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자님께는 잘된 일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일족을 직접 죽이는 건 내키지 않으실 테니."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뭐. 아무튼 교만 일족 군단장들은 목표물에서 제외한다. 혹시 운 나쁘게 마주치면 튀는 걸로."
로베르는 찜찜한 마음을 애써 털어 버리고 내일의 계획이나 마저 세우기로 했다.
"왜요, 교만 일족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쪽 군단장들은 그놈들 왕을 닮아서 엄청나게 강하거든. 거의 마왕급이라고. 지금의 나로는 어림도 없어."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그들의 거처는 피해서 접근하도록 하죠."
두 사람은 악마의 숲에 머무는 것이 확인된 군단장들을 추려 내일 사냥할 목표물을 정했다.
"마주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탐욕 일족의 바르바토스와 식탐 일족의 푸르손입니다. 그 둘을 중심으로 하급 악마들이 결집해 있으니까요."
"이왕이면 푸르손이 나와 주면 좋겠군. 바르바토스와는 장거리 전투를 해야 해서 까다롭거든."
"그건 운에 맡겨 보도록 하죠.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술은 그만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아타나스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베르는 그의 뒷통수에 대고 내내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너는 아카키 형님이 죽기를 바라나?"
뜬금없는 말에 아타나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악마의 숲에 혼자 던져 놓고 오겠다는 건 거기서 조용히 죽으라는 뜻 같아서."
"황자님이야말로 그분을 죽이고 싶진 않으세요? 본인 의지야 어쨌건 황자님께 위협이 된 인간인데요."
아타나스는 더 대꾸하는 대신 로베르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안 드는데."
"왜일까요?"
"글쎄. 모르겠다, 아직은."
그것이 로베르가 나름의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이었다.
"...그러시군요."
아타나스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안심하세요, 마왕이 아니고서야 어떤 악마도 그분을 죽일 수 없을 겁니다."
"형님이 보통 사제가 아닌 건 나도 안다만, 악마 군단을 홀로 상대할 수준으로는 안 보이던데."
"만약 군단장이 함께 있다면 멀쩡하지는 못하겠죠. 쉽게 저와 황자님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아. 그런 거군."
그제야 그의 목적을 알게 된 로베르는 새삼 아카키가 불쌍해졌다.
아타나스가 떠난 뒤, 로베르는 불쌍한 제 형님을 위해 허공에 대고 건배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잔을 단숨에 비워 냈다.
* * *
다음 날, 아타나스는 이른 새벽부터 준비를 마치고 황자들을 깨웠다.
덕분에 그들은 동이 틀 무렵에 여관을 나섰다. 여관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따라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황자님, 부디 저주로부터 제국을 구해 주십시오. 저희는 모두 황자님만 믿고 있습니다."
로베르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잠자코 그곳을 나섰다. 떠나는 길에 본 여관의 접객실은 어제와 달리 고요했다.
어제의 맹약 사건으로 서먹해진 탓에 아카키는 나머지 둘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자 영지와 영지 사이의 경계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걷던 아타나스가 멈추어 섰다.
"이쯤이면 되겠군요. 스크롤은 몇 장이나 챙겨 오셨습니까, 황자님."
아카키는 든 것이 거의 없는 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비상용 하나. 어차피 네가 많이 받아 갔다면서?"
"그것부터 쓰도록 하죠. 꺼내세요."
"왜 굳이 내 것부터 쓰려고?"
"저한테 목숨을 빚지신 걸로 아는데요. 갚을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어울리지도 않게 생색은...."
아카키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스크롤을 그에게 건넸다.
아타나스는 붉은 실을 풀어 스크롤을 펼쳤다. 로베르는 새하얀 종이에 적힌 신성 문자를 빤히 쳐다봤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 문자가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원래부터 아는 언어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신성력 각성자의 본능이라는 건가.'
신성한 힘을 품은 채 인간과 함께 악마를 토벌하러 가는 제 모습이 우스운 탓에, 로베르는 실소를 흘렸다.
그사이 아타나스는 이동 스크롤을 발동시키면서 아카키에게 대뜸 목적지를 통보했다.
"우선 악마의 숲으로 갑니다."
"뭐? 갑자기 거기는 왜? 변경백령은 순회 지역에서 제외잖아."
"악마의 숲에 왜 가겠습니까, 악마를 토벌하러 가지."
아타나스는 별다른 설명은 보태지 않고 곧바로 짧은 주문을 외웠다.
"신이시여, 사명을 진 저희를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소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한 빛이 시야를 메웠다. 로베르는 눈이 부신 탓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빛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곧이어 직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어느새 그들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의 입구에 도착한 뒤였다. 신성 문자를 잃은 오래된 종이는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와, 이렇게 편한 걸 교황 혼자 써먹는다는 말이지?"
로베르는 홀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마의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초입에서부터 강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꼭 마계로 돌아온 기분이야.'
생명력을 잃고 썩어 문드러진 고목들을 매만지며 로베르는 잠시 향수에 젖었다.
아카키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는 제 동생을 바라봤다.
"너 쟤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냐?"
"저분은 원래 저런 분이십니다."
아타나스는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망설임 없이 숲으로 들어섰다, 악마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기운을 감춘 채로.
"술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어. 맨정신에 여길 들어가다니."
아카키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로베르를 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또 한참을 걸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무 사이로 가려진 태양은 길을 제대로 밝혀 주지 못했다. 검은 핏자국이 묻은 길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헉, 야, 아타나스. 진짜 여긴 왜 온 거냐? 다른 걸 다 떠나서, 변경백령이라면 질색을 하는 놈이...."
아타나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 이곳의 마기를 견디기가 버거워 보이는 아카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뒤로 로베르의 자색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하게 번뜩였다.
까악, 깍-. 멀리서 까마귀가 높이 날아올랐다.
거대한 새의 날갯짓 소리가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길게 메아리쳤다.
"황자님,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드디어 정신이 나갔냐? 갑자기 뭔...."
"교황이 황자님의 동행을 허가한 건 제가 얼마 전 그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황자님이 순회에 방해가 될 때마다 그 일을 떠올리고, 반성하라는 뜻에서 하신 일이겠죠."
쿠궁. 아타나스의 뒤편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뒤이어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딴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로베르, 무기 꺼내."
사방에서 불길한 기척을 느낀 아카키가 법복 안으로 감추어 뒀던 목걸이를 풀었다.
쿵. 그들의 앞으로 커다란 바위가 날아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나무 사이에서 거대한 뿔과 날개를 가진 하급 악마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인간이다! 그것도 사제들! 그분께서 기뻐하실 거야!"
악마들은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매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많은 악마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태세를 갖춘 건 아카키 하나였다.
"너희들, 대체 뭐 하냐? 하급 악마들이 저만큼 몰려왔다는 건...."
"지휘하는 상급이 있다는 뜻이죠. 그래도 공부를 하긴 하셨네요."
아카키의 우려는 이내 현실이 되었다.
악마들은 무방비한 상태의 사제들을 덮치는 대신 나팔을 꺼내 들었다.
삐익-.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숲을 가득 메웠다.
쿵, 쿵, 쿵.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연주에 화답하듯 거대한 발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사자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푸르손."
그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로베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운이 좋으시군요."
식탐 일족의 군단장, 푸르손. 그들은 원하는 사냥감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아타나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카키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아카키 황자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요. 사실 황자님도 교황과 비슷한 걸 원하지 않나요. 제가 과거의 일을 반성했으면 하시죠?"
그가 천천히 아카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오한을 느낀 아카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저는 황자님이 거슬릴 때마다 반성은커녕 도리어 분노하는 미흡한 놈이라, 어쩔 수 없겠습니다."
아타나스는 손을 뻗어 아카키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고는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옷자락을 잡아 세게 내던졌다.
"이렇게 버릴 수밖에."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카키가 바닥을 굴렀다.
"윽, 뭔...."
아카키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맹수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칼처럼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 사이로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군침이 도는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이 번뜩였다.
"아타나스! 이 미친 새끼야!"
그날, 악마의 숲에서는 아카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가장 길게 메아리쳤다.
[31]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1화. 악마의 숲 (1)
어젯밤, 아타나스는 아카키를 악마의 숲에 버리는 계획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선 힘을 감춘 채 군단장들의 거처에 접근할 겁니다. 그럼 두 황자님의 존재를 느낀 악마들이 모이겠죠."
이제 막 각성한 로베르의 기운은 악마들을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주변의 하급 악마들은 로베르의 진짜 정체를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고 몰려들 게 분명했다.
"또한 아카키 황자님은 저와 달리 기척을 지울 줄 모릅니다. 숲에 있는 상급 악마들은 모두 그 힘을 느낄 거고, 제 군단과 함께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군단장이 자리를 비웠더라도, 상급 악마들이 여럿 나와 준다면 그들의 목적을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황자님과 저는 전투를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 상급 악마를 다른 곳으로 유인할 겁니다. 홀로 상급 악마를 확실히 이길 자신은 있으세요?"
"문제없어. 권능으로 잡을 거니까."
교만 일족의 군단장이 아니고서야 마왕의 권능에 맞설 수 있는 악마는 없다.
코어만 심장의 힘을 버텨 준다면, 로베르가 질 가능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코어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지금은 코어가 꽤 강해진 상태라 괜찮을 겁니다. 문제가 생겨도 제가 바로 보수해 드릴 테니 그 부분은 맡겨 두세요."
"참 쓸모가 많은 놈이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고유 권능을 되찾고 나면, 열심히 힘을 빼고 있을 아카키 황자님에게 돌아가 진실을 알아내도록 하죠."
"그다음엔 버리고 튀자는 거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약한 소리 마세요, 설령 아카키 황자님이 결백하다고 해도, 저희는 어떻게든 그분을 떼어 내야 합니다. 당장 마왕의 권능을 쓰는 데도 방해가 될 테니까."
로베르는 아직 무언 주문을 쓰지도, 마법진을 감추지도 못했다. 그것이 굳이 아카키와 떨어진 곳으로 악마를 유인하려는 이유였다.
수많은 불편과 위협을 감수하고 아카키와 동행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로베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말 악마의 숲에 두고 와도 괜찮은 거 맞아?"
"말씀드렸듯, 그건 문제없습니다. 아카키 황자님이 너무 멍청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아타나스는 무슨 생각인지 그저 확신에 찬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아타나스, 이 미친 새끼가...."
그리고 지금, 로베르는 푸르손의 앞에 던져진 아카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키는 땅에 떨어진 목걸이를 줍지도 못하고 가만히 주저앉아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지금 무서워하는 건가?'
악마를 마주한 푸른 눈이 명확한 공포를 내비쳤다. 겁에 질린 무력한 얼굴을 보자 새삼 아타나스의 확신에 의문이 들었다.
'악마를 무서워하는 사제는 강할수록 맛있는 먹잇감일 뿐인데.'
그곳의 악마들 역시 먹잇감을 알아본 눈치였다.
"보기 드물 정도로 풍족하고 맛있는 영혼을 가진 이가 제 발로 와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푸르손은 군침을 흘리며 긴 혀로 입을 쓸었다.
꺄하하학! 하급 악마들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활을 꺼내 들었다.
로베르는 여차하면 나설 생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타나스가 로베르의 뒷덜미를 가로챘다.
"잠깐, 뭐야?"
"일단 조금 떨어져 있도록 하죠."
아타나스는 한쪽 눈을 감고 푸르손의 뒤로 높이 솟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거리를 무시하고 두꺼운 가지를 잡았다.
"뭐... 으악!"
로베르는 아타나스의 손에 이끌려 순식간에 나무로 올라섰다.
"여기서 지켜볼까요."
로베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발밑을 내려다보는 사이, 아타나스는 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편,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최고의 먹잇감에 눈이 먼 푸르손은 나머지 두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의 수하들이여, 식사를 시작하자!"
순수한 기쁨이 어린 푸르손의 포효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휘이익! 마력이 실린 화살들이 일제히 아카키를 향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아카키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지나는 자리를 따라 화살이 틈 없이 박혔다.
그러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전부 피할 방법은 없었다.
"윽...."
날카로운 화살촉이 아카키의 어깨에 박혔다. 상처 주변의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맹독이네요."
"악마의 피를 묻힌 거다. 그게 사제한테 가장 잘 먹히는 무기니까. 봐, 잘 통하는 것 같네."
"곱게 자라신 분이라 엄살이 심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로베르는 아타나스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전투를 지켜봤다.
아카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화살을 뽑아냈다. 그리고 성의 없는 손짓으로 내던졌다.
탁. 붉은 피가 묻은 화살이 힘없이 나무에 부딪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궤도를 바꾸어 곧장 화살의 주인을 향해 날아갔다.
퍽-. 다시 활시위를 당기던 악마의 가슴에 화살이 꽂혔다.
"끄아악!"
악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주인의 손을 떠난 화살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다른 악마들이 그쪽을 바라본 차에, 아카키가 낮게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쾅! 동시에 폭발이 일어나며 악마의 몸이 산산이 조각났다.
"흐에엑...."
근처에 있던 하급 악마들이 놀란 신음을 흘렸다.
"하하, 이렇게 발악해 줘야 그 육신과 영혼을 씹어 삼킬 때의 기쁨이 더욱 큰 법이지."
푸르손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래. 겁먹은 인간의 발악 따위, 너 같은 악마 새끼들에게는 식사 전 유희일 뿐이겠지."
그들을 담은 아카키의 청안에 깊은 분노가 서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신성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일대를 뒤덮었다.
"크에엑!"
악마들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레 울부짖기 시작했다. 몇몇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추락했다.
"하.... 생각보다 격하구나, 사제!"
푸르손은 바람에 가로막혀 쉽게 그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이내 그 뒤에 선 두 사람까지 그의 영향권에 들었다. 로베르는 답답한 느낌에 옷깃을 풀어 헤쳤다.
"전방위 결계를 펼칠 수준이 된다고?"
"그럴 리가. 냉정하게 말해서 저분 수준은 특권 사제들의 평균에도 못 미칩니다. 이제 막 각성한 황자님보다 조금 나은 정도죠."
아티팩트는 그저 도구일 뿐, 신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주문이 특권 사제들의 가장 강한 무기였다.
그러나 주문은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현 제국에서 주문을 쓰는 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시동어와 기도문을 외운 뒤 발동하는 일반적인 주문을 얻는 데 그쳤다.
"저기 계신 당신 형님도 그중 하나입니다. 아마 다음 경지인 생략 주문이나 무언 주문은 평생 꿈도 못 꿀걸요."
"그, 그래?"
"검술이나 체술도 애매하고, 아티팩트 활용도가 높지도 않습니다."
'이런 데서 허튼 말을 하는 놈은 아닌데. 아타나스를 제외하고는 다 자기 밑이니 어쩌니 했던 건, 허세였나. 아니, 그럼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로베르가 혼란을 느끼던 때, 아카키의 발밑으로 주인을 잃은 화살통이 굴러갔다.
아카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화살통을 집었다. 빼곡히 들어찬 화살들을 확인한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끼리만 유희를 즐기면 안 되지, 섭섭하잖아?"
아카키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허공으로 튀어 나간 화살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퍽, 퍽, 퍽.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화살들이 목표물에게 정확히 꽂혔다. 단 하나의 화살조차 빗나가지 않았다.
"끄아아악!"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발악해 봐."
쾅! 뒤이어 화살을 맞은 악마의 육체들이 차례대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맥없이 제 수하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푸르손의 팔에 마지막 화살이 박혔다. 펑! 동시에 한쪽 팔이 완전히 날아갔다.
"쳇. 힘이 모자랐나."
"정말 이만한 강자가 제국에 남아 있었다고?"
푸르손이 팔을 재생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지않게 당황한 로베르가 또 새로운 화살통을 줍는 아카키를 가리켰다.
"말이 틀리잖아. 저건 어떻게 설명할래?"
"제가 한 말들은 전부 사실인데요. 다만 그럼에도, 아카키 황자님은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라고 할 수 있죠."
어느 것 하나 이렇다 할 경지에 오르지 못한 평범한 수준의 아카키가 그런 수식을 얻은 이유는 간단했다.
신성 영웅을 능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압도적인 양의 신성력.
주문을 채 배우기도 전에 신성력의 극치라 불리는 고유 주문을 각성한 이례적인 재능.
덕분에 교황청에서 아카키는 혼자서 아타나스를 제외한 나머지 특권 사제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을 가진 천재로 평가받았다.
"아카키 황자님의 고유 주문은 표적을 절대 놓치지 않는 '명중'입니다. 주로 대충 무기를 박아 넣은 다음, 신성력을 흘려보내 폭발을 일으키는 식으로 사용합니다."
이 순간에도 사방으로 발산해 둔 신성력이 화살로 흘러 들어가 악마들의 몸을 터뜨리고 있었다.
줄지어 선 나무들이 검게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펑, 펑! 연이은 폭발음과 함께 신성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터져 버린 심장의 파편들이 쏟아졌다.
"저런 식으로 싸우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그렇게 힘을 남발하는 데 코어가 버틸 수 있나?"
"별로 좋은 방식은 아니죠. 전투가 길어질수록 빠르게 한계에 다다를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개선할 의지가 없으니...."
퍽. 그 순간 화살 하나가 아타나스의 곁을 스쳐 나무에 박혔다.
저 아래에 선 아카키가 불량한 자세로 고개를 까딱였다. 쾅!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진심으로, 저런 분이 죽지 않았으면 하십니까? 다시 생각해 보세요."
땅에 가뿐히 착지한 아타나스가 손에 들린 로베르를 내려 주었다.
'이대로 끝인가?'
로베르는 잠자코 푸르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푸르손은 몸을 잘게 떨며 한순간에 일족들을 학살한 남자를 마주했다.
"이제야 알겠군. 네가 군단장의 절반을 죽였다는 아타나시오인가?"
"허, 지금 나더러 누구라고? 성수로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야."
아카키가 흙에 파묻힌 목걸이를 주우며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칭-.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가 곧바로 검으로 변했다. 아카키는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 검으로 푸르손의 목을 겨누었다.
"그 입부터 도려내 주지. 어이, 아타나스! 이놈 혀를 잘라 줄 테니 점심으로 먹겠어?"
"그딴 걸 먹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습니다."
아타나스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로베르에게만 보이도록 손을 접었다 폈다. 슬슬 때가 되었으니 푸르손과 함께 이동하자는 신호였다.
"아타나스? 그건 또 누구지? 저 인간 놈의 이름인가?"
"이런 멍청한...."
"뭐, 상관없다. 저런 아무 힘도 없는 인간과 상급 악마마저 능가하는 영혼의 맛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일족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식사가 되겠지?"
"젠장, 망했다."
막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로베르는 다급히 귀를 막았다.
크아아앙! 그러기를 무섭게 맹수가 입을 벌려 크게 포효했다.
그 울림이 끝도 없이 메아리치며 장막처럼 덮인 신성한 기운을 전부 쓸어 냈다. 주변의 나무와 전투의 흔적들이 함께 쓸려 나갔다.
"큭...."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아카키는 간신히 코어를 감싼 채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의 코와 귀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미처 닦아 낼 틈도 없이, 푸르손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카키의 한쪽 팔을 물어뜯었다.
"컥-."
길 위로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아카키는 그 핏자국 위를 힘없이 굴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꿈인가?'
삐-. 귀에서 강한 이명이 들려왔다.
자꾸 눈앞이 일그러지는 탓에, 아카키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자신의 팔을 빠르게 씹어 삼키는 푸르손이 보였다.
"아, 수십 년의 허기가 단번에 가시는 맛이야. 조금 더 음미해야겠어."
깜빡, 깜빡.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맹수의 얼굴을 가진 악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긴 혀로 입가의 피를 쓸어내리는 모습에서 아카키는 문득 잠시 잊고 있던 공포를 떠올렸다.
"네가 기습 한 방에 잡혀 줄 줄이야, 아타나시오."
공포에 화답하듯 푸르손이 인간의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다시금 먹잇감을 향해 돌진했다.
"거기까지."
그 순간, 신성력이 실린 손이 푸르손의 이빨을 잡아챘다.
"아타나시오는 나다, 짐승 대가리."
그대로 사자의 머리 위에 올라탄 아타나스는 힘을 주어 이빨을 뽑아냈다.
"뭐, 크에에엑!"
푸르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거대한 몸을 흔들었다. 아타나스는 곧장 아카키의 곁으로 착지했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아타나스의 부름에도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혼자만 살려는 어떤 멍청이 때문에 잠시 귀가 나가서요. 황자님? 설마 죽었습니까?"
아타나스가 연거푸 말을 걸자 그는 겨우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그러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이 인간 놈들이 감히.... 다 죽여 버리겠어!"
악마의 입가에서 새 어금니가 자라기 시작했다. 푸르손은 더욱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사, 살려 줘...."
아카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타나스는 힘없이 꿈틀대는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정말 안 들리시는 거 맞죠, 황자님."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아타나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계획을 바꾸죠. 바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로베르 황자님. 대신 삼십 분 안에 끝내 주세요. 당신 형님이 외팔로 살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삼 분 안에 끝나."
크아아앙! 푸르손이 다시금 포효하던 찰나, 음산한 기운이 번졌다.
폐허가 된 깊은 숲속에서 자색 빛이 일렁였다. 익숙한 힘을 느낀 푸르손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권능, 지배."
일순 작게 수축한 맹수의 동공 위로, 마왕의 얼굴이 비쳤다.
[32]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2화. 악마의 숲 (2)
"권능, 지배."
거역할 수 없는 마왕의 주문이 귓가에 울린 순간, 푸르손은 본능에 이끌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쿵! 거대한 무게로 땅이 크게 울렸다. 이빨에 남은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푸르손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선 마왕을 바라봤다.
"베, 벨페고르 마왕님?"
"안녕, 푸르손."
로베르는 태평한 인사를 건네며 처참하게 쓰러진 아카키를 바라봤다.
한쪽 팔을 잃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족들이 죽어도 아무 느낌이 없더니, 형님이 저 꼴이 된 건 묘하게 거슬리는군. 나도 이제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자신이 지금 아카키의 원한을 되갚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카키의 옆에 선 아타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살아 계셨던 겁니까? 그런데 왜 지금껏 저희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던 거죠? 분명 다들 마왕님을...."
뜻밖의 재회에 당황한 푸르손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로베르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귀를 후볐다.
"너희들이 뭘 원하든 내 알 바 아니거든.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왕이었는지."
수천 년간 아무런 문제가 없던 계승 의식에 실패한 문제의 악마.
그럼에도 설명이 불가한 힘으로 탐욕 일족의 정예군을 홀로 쓸어버리고 마몬을 궁지에 몰아넣은 유일한 마왕.
벨페고르의 힘을 견제한 다른 마왕들은 온 힘을 다해 그가 왕의 의무를 다하지 않도록 부추겼다.
유난히 본능이 강했던 어린 악마는 온갖 유혹에 눈이 멀어 일찌감치 일족을 등졌고, 그렇게 나태 일족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성 전쟁이 시작되며 뒤늦게 그의 힘이 필요해지자 다른 마왕들은 그제야 갖은 수를 쓰며 벨페고르를 연합군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벨페고르는 마몬의 금광 일부까지 넘겨받은 뒤 입을 싹 닫아 버렸다.
"그냥 놀고먹지 않으면 힘을 합쳐 내 일족을 몰살시키겠다더니, 이제 내가 필요해졌어? 근데 어쩌지, 덕분에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의 즐거움을 알아 버렸거든. 그러니까, 꺼져. 낮잠 시간이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 내전까지 벌일 수 없었던 연합군은 결국 조용히 마왕성에서 물러갔다.
이후 벨페고르는 악마들 사이에서 일족마저 등진 최악의 폐급 마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얼마나 많은 동족이 허무한 개죽음을 당했는지 아세요? 지금 저희는 그런 왕이라도 필요한...."
퍽-.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로베르의 손이 푸르손의 가슴을 꿰뚫었다.
"나도 너희가 필요해, 나를 위해서. 너희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니 사과할 필요는 없겠지? 이게 우리 방식이잖아."
"컥, 커어억...."
"권능, 약탈."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고, 자색 빛이 푸르손의 위로 드리웠다.
"예고는 좀 하시지."
"뭐, 뭐야. 손 안 치워?"
아타나스는 급한 대로 아카키의 눈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아카키가 발버둥 치며 손을 떼어 내려 하자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삼 분 지났습니다, 황자님."
"깐깐하긴."
푸르손의 심장에 응축된 마력이 로베르에게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베르는 심장이 충만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씩 웃었다.
"잘 가라, 푸르손. 네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마력은 착실히 써 주마."
"...."
푸르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내 힘을 모두 빼앗긴 심장이 바스러졌다.
생명을 잃은 육신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로베르는 마법진을 지우며 가만히 제 안의 힘을 느꼈다.
'생각보다 간당간당하군.'
군단장의 마력을 빼앗았음에도, 온전한 심장을 지녔을 때 비하면 터무니없이 미약한 힘이었다.
"솔직히 처음으로 당신이 마왕이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매번 이런 식이면 순회가 금방 끝나겠습니다."
아타나스가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로베르는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악마 사냥에 관해서는 내가 몇 수 위랬잖아?"
"그래서 실패인가요, 성공인가요?"
"성공에 가까워."
로베르는 고유 권능이 제대로 발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에 익숙한 문양을 그렸다.
다행히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작은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예상대로 인간을 상대로 사용할 정도는 되었다.
목적을 이룬 로베르는 곧장 아카키의 의식에 침범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위협적인 마기가 퍼졌다.
"어?"
"황자님!"
먼저 그 힘을 감지한 아타나스가 다급히 손을 뻗어 로베르를 끌어당겼다.
쿠우웅! 뒤이어 마력 광선이 길 위를 쓸어버렸다.
빛이 번지며 순식간에 숲의 중앙이 폐허로 변해 갔다. 조금 전 로베르가 서 있던 자리에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와,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그곳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로베르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들은 아타나스의 성역 안에서 간신히 공격에 휘말리지 않고 버텼다.
공격의 여파로 부서진 나뭇가지와 돌멩이들이 휘몰아쳤다.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짙은 녹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어머, 반가운 얼굴이 있네."
그녀의 한기 서린 목소리가 거대한 구덩이를 넘어 그들에게 닿았다.
"레라지에? 이거, 단단히 망했군."
왜 교만 일족의 군단장이 여기서 나오는 건데?
망연자실한 로베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레라지에는 루시퍼의 정예군인 다섯 군단장 중 하나로, 마왕과 맞먹는 힘을 가진 강자였다.
그녀를 마주한 순간 로베르는 직감했다, 지금의 자신은 결코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하, 이러다 진짜 죽겠네. 이게 대체 뭔 상황인데."
여전히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아카키는 멍하니 깊은 구덩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라리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왜 하필...."
아타나스가 답답한 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푸르손이 나간 뒤 왕의 힘이 느껴지길래 급히 온 것인데... 너무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어 당황스럽군요."
펄럭-. 레라지에가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고는 곧바로 날아올라 그들의 앞에 당도했다.
"제가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셔야겠어요, 벨페고르 마왕님."
그들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로베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뭐라고요?"
"예?"
레라지에와 아타나스가 거의 동시에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로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벨페고르라니, 저는 신성 제국의 황자인 로베르라고 하는데요."
"황자님...."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로베르가 소리를 빽 지르며 어서 도망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아타나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 악마가 황자님 정체를 눈치챈 이상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합니다."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죽을 때까지 악마들과의 추격전을 벌이고 싶으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악마 하나를 죽이고 끝내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는 걸 생각하세요."
그사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레라지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들의 왕이시여, 결국 당신의 우려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레라지에는 사라진 악마들의 자리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고는 황자의 이름을 쓰며 사제의 보호 아래에 있는 마왕에게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나태 일족의 왕께서 우리를 배신하셨군요. 왕을 맞이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제가 참 우스우셨겠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분노로 타올랐다. 주인의 분노를 머금은 마기가 숲을 둘러쌌다.
순도 높은 마기가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이른 석양이 지는 듯한 하늘을 등진 그녀가 허공에 고유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제와 한패가 되어 동족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일족은 지키지 못했어도, 최악의 마왕이라는 이명은 지킨 채 죽어 가시겠군요. 축하할 일이네요."
"그러니까, 다 오해라고요."
로베르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자님, 잠깐 제 말 좀...."
"권능, 침범."
약자의 싸움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한 것이 바로 기습이다.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고유 권능을 발동시킨 로베르는 곧장 마력 베리어를 뚫고 그녀의 뒤로 침범했다.
"뭐...."
"우리가 언제부터 한편이었다고, 배신은."
당황한 레라지에가 뒤를 돌아보던 찰나, 로베르의 손이 먼저 마법진을 깨트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을 짚었다.
'쳇, 아직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거지 같은 상황이군.'
방금 일격으로 싸움을 끝내려 했건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방법은 요행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권능, 지배."
일순 거대한 마력이 그녀를 찍어누르려 했다. 그녀는 급한 대로 모든 마력을 거둬들여 권능에 저항했다.
쿠우웅-. 양쪽의 힘이 부딪치며 커다란 파장이 일었다. 충돌 끝에 팽팽한 힘겨루기에서 진 쪽은 로베르였다.
"앗, 실패한 다음은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는 자신이 굴복시키지 못한 힘에 공격받았다. 그녀와 닿은 손에서부터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윽...."
로베르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튕겨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구덩이로 추락했다.
"야, 이 망할 사제 놈아! 안 도와주고 뭐 하는데!"
"그러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니까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아타나스는 다시금 거리를 무시하고 로베르를 잡아채 막 안으로 던져넣었다.
쿵! 로베르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발끝을 땅에 박아넣어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한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기로 하지 않았냐? 알아서 보조했어야지!"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아타나스부터 노려봤다. 아타나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험한 말을 삼켰다.
"레라지에는 제가 직접 잡을 수 없는 악마입니다."
"그게 뭔 소린데?"
"교황이 명한 사냥 금지 목록에 그녀가...."
아타나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적으로 교황을 언급하자 맹약의 반동이 전해져 온 탓이었다.
"무슨 교황이라는 놈이 악마 사냥을 금지해? 어이가 없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반동이 전보다 약해졌어. 계약 덕분인가.'
아타나스는 부서질 듯 조여 오는 목을 매만지며 눈앞의 악마를 올려다봤다. 그러면서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을 떠올려 냈다.
"그보다 권능이 왜 통하지 않는 겁니까?"
"교만 일족 놈들은 태생이 오만해서 제 왕한테만 복종하니까. 다른 마왕들의 권능에는 저항한다고."
"다시 시도하면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 심장이 온전하면 모를까, 요행에 두 번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는 왜 이럴 때 쓸모가 없는 건데?"
로베르는 잠시 아타나스에게 계약 이행을 강제하는 명령을 내릴지 고민했다. 그러나 신과의 서약 쪽이 걸렸다.
만약 단번에 맹약을 깨트리지 못한다면 양쪽의 반동으로 아타나스는 죽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래저래 쓸모가 많은 놈인데, 고작 여기서 버리기엔 아깝지.'
결국 로베르는 명령을 포기하고 아타나스를 재촉했다.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봐. 쓸모를 쥐어짜 내 보라고."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껏해야 전투를 보조하는 역할만 가능합니다. 참고로 시간을 더 끌면 아카키 황자님 쪽도 위험하고요."
그사이 힘을 완전히 회복한 레라지에는 마법진을 완성했다. 마법진을 통해 발산된 마기가 위협적인 화살로 돌변했다.
가장 순수한 마력을 머금은 거대한 화살들이 일제히 로베르를 겨누었다.
"동족들이여, 우리를 배신한 왕을 처단하라!"
휘이익-. 인간의 피처럼 붉은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높이 날아올랐다.
쿠구궁! 뒤이어 숲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신호를 확인한 숲의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벨페고르 마왕이 우리를 배신했다! 인간의 편에 선 왕을 죽여라!"
군단장의 분노가 동족들 사이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이내 길 위로 수많은 악마가 발을 디뎠다. 어림잡아도 푸르손이 이끌고 온 군단의 열 배는 되어 보였다.
그들은 지금 개미굴 깊숙이 던져진 먹이 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씹, 진짜 여기가 우리 무덤인가 보다."
절망에 빠진 아카키를 뒤로하고, 로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얼굴들을 둘러봤다.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졌네?"
"그 부분은 제게 맡겨 두시고, 황자님은 형님과 힘을 합쳐 레라지에를 잡아 주시죠."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권능이 안 통한다니까?"
탁. 아타나스는 잠자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카키의 시간이 곧장 부상을 입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신성한 빛을 머금은 신체에 다시 팔이 솟았고, 뒤이어 모든 상처가 차례대로 아물었다.
로베르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회복력이 없는 게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인데, 그걸 저런 식으로 보완해 버린다니. 저놈 옆에 있으면 죽을 일은 절대 없겠어.'
아카키는 잘린 팔마저 다시 자라나는 걸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팔을 몇 번 돌려 보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제 일로 능력에 뭔 문제라도 생겼나 했더니 그냥 날 엿 먹인 거였냐, 짜증 나는 놈."
"계획이 여러모로 틀어져서요. 그래서 두 황자님께서 힘을 합쳐 저 교만 일족의 군단장을 잡아 주셔야겠습니다."
"뭐? 너 미쳤냐?"
"그러니까, 무슨 수로!"
아카키와 로베르가 차례대로 소리쳤다. 아타나스는 살짝 웃으며 악마들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신의 힘으로 잡읍시다."
우우웅-. 고요한 공명음과 함께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막이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크아아악!"
그 길에 있던 악마들이 거대한 힘에 맥없이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잡는다."
아타나스의 승리를 예감한 로베르는 주머니에서 브로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주인의 힘을 머금은 저주 검이 허공을 겨누었다.
[33]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3화. 악마의 숲 (3)
아타나스의 신성안은 단순히 인간과 악마를 판가름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는 신성안에 담기는 영역을 자신의 성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신성력이 발견된 이래 '성역 개방'의 경지에 오른 인간은 이미 죽은 신성 영웅을 제외하면 아타나스가 유일했다.
평소 아타나스는 고유 능력이 더해진 성역 '시공간의 벽'을 축소된 형태로 상시 개방해 늘 만전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제국 곳곳의 대형 결계를 관리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역의 진가는 지금처럼 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성역 개방."
성역을 완전히 개방하는 순간, 그곳의 시공간은 아타나스의 손아귀에 놓였다.
비록 최대 삼십 분이라는 제한이 있었으나 눈앞의 적을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타나스는 시야를 빼곡히 메운 악마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정화."
막의 표면을 따라 그 밖의 것들을 단번에 멸해 버릴 수 있을 강한 신성력이 흘렀다.
그는 다른 손으로 손목을 받친 채 힘을 쏟아부어 결계를 전진시켰다.
그것은 바다 깊은 곳에서 시작된 재난의 징조처럼 고요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변해 앞에 선 모든 존재를 덮쳤다.
"크에에엑!"
막의 경계에 닿는 순간 악마들은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허무하게 타올라 재가 된 육신이 흩날렸다.
"이게 대체 무슨...."
레라지에는 자신이 펼친 베리어마저 무력화되는 걸 느끼고 다급히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알아서 수고를 덜어 주니 고맙네."
아타나스는 그대로 계속 성역의 범위를 넓혀 갔다. 신성한 파도가 순식간에 악마의 숲을 휩쓸었다.
"구, 군단장님. 살려... 으아아악!"
악마들은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쓸려 나갔다. 레라지에의 마력 화살마저 차례대로 결계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그러나 그녀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 모든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을 부를 게 아니라, 도망치라고 신호했어야지. 여긴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도 없는데."
아타나스는 그녀의 코앞까지 가서야 결계를 다시 거두어들였다.
"히이익-. 도, 돌아가! 그놈이다! 아타나시오, 그놈이 왔다!"
운 좋게 성역에 들지 않아 목숨을 건진 악마들은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도망치기 바빴다.
탁, 타닥. 다급한 발소리가 한동안 숲속을 울렸다.
이윽고 성역 밖의 존재들이 자신의 공간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숲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 * *
악마의 피가 스며든 폐허는 깊은 어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
홀로 남겨진 레라지에는 멍하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고작 한 인간의 손에 휩쓸려 간 동족들의 최후는 그녀의 가슴에 남았을 뿐,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지금 태어나 줘서 고맙다, 사제 놈아. 전쟁에서 널 만났으면 뭐라도 지렸겠는데."
로베르는 비로소 아타나스가 신성 영웅의 환생이라 찬양받는 이유를 실감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한, 그들 중 누구도 홀로 이만한 전력을 내지는 못했다.
'맞네, 주인을 반드시 승리하게 할 카드. 교황은 무슨 수로 이런 괴물을 묶어 둔 거지? 어떤 의미에서는 이놈보다 대단한 인간이군.'
정말 이길 생각으로 그에게 덤볐던 사제 무리에게 경외심이 들 지경이었다.
"이제 아카키 황자님에게도 들릴 테니 쓸데없는 농담은 삼가세요. 이분은 재미없는 농담을 싫어하십니다."
아타나스는 아주 일상적인 일을 해낸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저 주의하라는 듯 아카키를 가리킬 뿐이었다.
정작 아카키는 충격을 받은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어이, 아타나스. 힘 자랑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아무리 너라도 이렇게까지 힘을 남발하면 단명할 거다."
"상황이 급해서요. 그리고 저한테는 이런 식의 전투가 가장 쉽습니다. 단순히 표면에 힘을 실어 성역을 넓히기만 하면 되니까요."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만큼 평소에는 절대 쓸 수 없는 방식이기도 했다.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래서 마음 놓고 날뛰었다, 이거지. 이렇게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거냐? 교황의 명령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놈이...."
"모르셨겠지만, 저도 가끔은 반항할 때가 있답니다. 그리고 제게는 한 놈도 살려 보내면 안 될 이유가 있었거든요."
악마들 사이에서 로베르가 표적이 될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거 교황이 몇몇 상급 악마의 사냥을 금지한 순간부터, 아타나스는 교황이 악마들과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적어도 그들이 교황에게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해. 그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저 마왕의 존재를 최대한 감추는 수밖에.'
그러니 로베르의 존재는 인간은 물론이고, 악마들에게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야 했다.
"돌아가서 엄청나게 혼날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이니, 반드시 잡아 주셔야 합니다."
아타나스는 지친 얼굴로 결계를 완전히 거두었다. 힘을 잃고 흐려진 막이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너도 못 잡은 놈을 우리가 어떻게...."
"레라지에는 이미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했으니, 지금 상태로는 해볼 만하겠군."
아카키와 달리 로베르는 아무 망설임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아타나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 판단이 빠르셔서 다행이네요, 끝까지 도망가자고 버티시면 어쩌나 했는데."
"싸워야 할 때가 언제인지 정도는 알거든."
로베르는 여기서 레라지에를 처리하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가능한 한 쉽고 빠른 길을 걷고 싶은 저로서는 이 기세를 몰아 끝을 내야만 했다.
"이길 자신은 있으십니까?"
"이참에 알아 둬라. 싸움은 귀찮지만, 꼭 해야만 한다면... 난 반드시 이겨."
위잉-. 신성력을 머금은 새카만 검날이 옅게 진동했다. 저주 검을 확인한 아타나스가 인상을 썼다.
"자신이 넘치시는 건 좋지만, 그 검을 들고 그런 말을 하니 괜히 불길하군요. 그게 뭔지는 알고 받아 오신 겁니까?"
"뭘 알아야 해? 그냥 검인데, 마음대로 쓰면 그만이지."
"그건 아티팩트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아, 괜히 초 치지 말고 보조 역할이나 착실히 해, 스승님. 형님은 협조 안 하려나?"
로베르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아카키의 상태를 살폈다.
몸을 회복하고 소모한 힘까지 되찾았음에도, 아카키는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늘 따분해 보이던 푸른 눈은 공포에 젖은 채였다.
'아까부터 왜 저렇게 무서워하지? 악마 사냥이야 익숙할 테고,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미 아카키의 실력을 엿본 로베르는 그 사실이 의아해졌다. 그러나 의문을 풀 틈도 없이, 마력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레라지에는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거대한 베리어를 만들어 냈다.
"이유가 뭐든 방금 나를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사제."
동족을 배신하고 제국의 황자 노릇을 하는 마왕과 한계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힘을 가진 사제.
그녀는 그들을 살려 보내면 악마들에게 전쟁과 맞먹는 재난이 닥치리라는 걸 깨달았다.
"내 심장을 바쳐서라도 너희를 여기서 처단하겠다. 왕이시여, 부디 제게 승리를...."
심장이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면서도 그녀는 계속 힘을 발산했다. 허공에서 붉은 화살들이 형체를 갖추어 갔다.
"정말 끝장을 볼 생각이군. 저건 교만 일족의 방식이 아닌데."
심장의 발화가 시작되었다는 걸 느낀 로베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카키 황자님, 이제 정신을 좀 차리시고...."
"아, 됐어. 그냥 놔둬. 혼자 처리하는 게 빠를 거 같으니까."
일격으로 승패가 갈릴 전투에서 겁에 질린 인간은 별 쓸모가 없었다. 로베르는 아카키의 협조를 구하는 걸 빠르게 포기했다.
"어이, 스승님. 레라지에를 결계로 가둬."
"그녀에게 직접 힘을 쓰려면 보호 결계만 가능하고, 저 화살에 쉽게 부서질 겁니다."
"부서지면 곧바로 다시 쳐서 계속 움직임을 방해해. 연속으로 몇 번이나 가능하지?"
아타나스는 잠시 제 손바닥을 응시하더니 금방 답을 주었다.
"지금 상태로는 열 번 정도 가능합니다."
"결계를 다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처음에는 텀이 거의 없겠지만, 반복하다 보면 점점 길어질 겁니다. 가장 늦어진다고 가정하면, 십 초 정도."
"더 길어지면 죽는다."
로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고쳐 잡았다. 눈으로는 허공에서 자신을 겨눈 화살의 수를 셌다.
'일곱 발. 저게 한계인가.'
레라지에의 마력이 깃든 '심판의 화살'은 스친 자리에 산 것을 남겨 두지 않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으로 지금의 자신은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를 잡기 위해서는 힘이 빠진 본체를 노려야 했다. 그동안 단 한 발의 화살도 저를 스치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무슨 힘으로 잡으실 생각입니까?"
"내 힘으로 잡는다. 결계."
로베르가 시작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타나스는 곧바로 그녀의 위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결계를 쳤다.
"고작 이따위 막으로 나를...."
"권능, 침범."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로베르는 곧바로 그녀를 가둔 결계 안에 당도했다.
"칫...."
"쳇."
기습을 허용한 레라지에와 이번에도 공간을 침범하는 데 그친 로베르가 동시에 혀를 찼다.
퍽-.
뒤이어 로베르가 휘두른 저주 검이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세게 돌아갔다.
"어? 이게 아닌데...."
검에 실린 신성력이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베어 주기를 기대했던 로베르는 크게 당황했다.
'뭐가 문제였지? 힘이 모자랐나?'
잠시 정적이 흐르고, 레라지에의 머리에서 검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인간의 몸에 들다 보니, 힘이 온전치 않은 모양이죠?"
그녀는 반쯤 검게 물든 얼굴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승리를 확신한 악마의 눈이 자신을 응시한 순간, 로베르는 두 발로 있는 힘껏 그녀의 복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무사히 결계를 통과해 허공으로 솟구친 찰나, 화살이 막을 덮쳤다.
화르륵-. 화살이 막의 경계에 닿은 순간 불꽃이 일었다. 그 자리를 따라 타오른 불길이 순식간에 결계를 집어삼켰다.
"결계, 빨리!"
로베르는 추락하기 전에 곧장 불길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기를 무섭게 그녀의 주변으로 다시 결계가 내려왔다.
푹! 검이 막의 경계에 꽂혔다. 로베르는 검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간신히 버텼다.
"저, 저 미친...."
"...쓰라는 주문은 안 쓰고, 검을 참 다양하게 쓰시는군요."
흔들리는 발밑으로 경악한 두 인간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 이슈타르가 참 슬퍼하겠어."
막에 갇힌 불꽃 속에서 레라지에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로베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네가 언제부터 이슈타르랑 친했다고. 그보다, 이제 여섯 발 남았네?"
타이밍 좋게 힘을 다한 막 안의 화살이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그걸로도 너를 죽이기엔 충분하다, 벨페고르."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또 다른 화살이 결계에 매달린 그를 향해 날아왔다.
로베르는 검을 지지대 삼아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쾅! 뒤이어 결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화염이 피어오른 찰나, 저주 검이 불길을 갈랐다. 로베르는 모든 신성력을 쥐어짜 내 검에 실었다.
"몇 번을 말해, 나는 로베르라니까?"
퍽-. 불이 붙은 검이 그대로 레라지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마치 단단한 바위를 친 것처럼 강한 반동이 전해져 왔다. 그녀가 급히 만든 마력 베리어가 옆구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번에는 먹혀라, 제발.'
이미 체력이 바닥난 로베르는 이번 일격으로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며 검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대치 끝에 승기를 잡은 쪽은 로베르였다. 베리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아악!"
그녀가 크게 포효하며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든 검날에 새카만 피가 묻어났다.
우웅-. 검은 피가 검면을 적신 순간, 고요한 공명음이 일었다.
"어?"
쿠구궁, 쾅! 뒤이어 검이 닿은 자리를 따라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자색 빛 아래에서 그녀의 두 날개와 옆구리 절반이 터져 나갔다.
"황자님!"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친 로베르는 힘없이 추락했다. 아타나스가 다급히 그의 주변으로 보호 결계를 쳤다.
툭. 로베르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막이 그의 무게를 받아 냈다.
"저주 검이라더니, 이 정도로 제멋대로일 줄 누가 알았냐고...."
그리고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듯 저주 검이 그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로베르는 멍하니 저주 검과 그 너머에 선 레라지에를 바라봤다.
레라지에는 화살 두 개를 거두어 만든 베리어로 간신히 폭발에서 벗어난 뒤였다.
"죽여, 반드시 죽여 버린다."
그녀가 혼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쾅! 또다시 결계가 내려오자, 그녀는 그것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화살을 꽂아 부수었다.
"어딜...."
아타나스는 곧바로 다시금 결계를 쳐 그녀의 걸음을 저지했다. 그녀가 검게 물든 동공으로 두 사제를 응시했다.
"그래, 너희들이 있었지...."
그사이 로베르는 힘겹게 손을 뻗어 저주 검을 쥐었다.
'말도 안 돼. 멀쩡하잖아?'
모든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 낸 검의 표면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조금 전 일어난 의문의 폭발이 저주 검이 가진 힘인 듯했다. 그리고 이 검은 몇 번이고 그 충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어이, 사제! 어떻게 하면 방금처럼 할 수 있지?"
로베르가 그것을 묻기 위해 고개를 돌린 찰나, 남은 두 개의 화살이 서로를 잡아먹고 몸집을 불렸다.
"죽어라, 인간들."
펑! 거대한 화살이 스스로 폭발하며 불꽃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 수많은 잔해가 마력을 머금고 다시금 화살로 돌변했다.
"아, 이런 개 같은...."
붉은 하늘 아래에서, 심판의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34]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4화. 악마의 숲 (4)
악마의 심장을 땔감 삼아 타오른 지옥 불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휘이익-. 그 화염을 머금은 수많은 화살이 대지를 향해 쏟아졌다.
"제대로 된 검이었다면 일격에 끝났을 텐데, 굳이 왜 저 유물을 들고 와서는."
아타나스가 짜증스레 혀를 차며 두 손을 모았다. 치지직! 다시 성역을 펼치려 하자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짧게 열었던 거라 리스크가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성역 개방 후에는 일시적으로 성역을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원래라면 제약을 무시하고 강제로라도 개방했겠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어젯밤, 아카키의 반동을 대신 받은 데다 갑작스레 과한 힘을 쓰자 한계가 온 탓이었다.
"황자들 뒤치다꺼리를 하기가 벌써 벅차군."
아타나스는 급한 대로 일반적인 보호 결계를 쳤다. 뒤이어 수많은 화살이 막 위로 내리꽂혔다.
화르륵-! 원형 결계를 따라 불길이 일었다. 아타나스는 억지로 결계를 더 강화했다.
그러나 막의 경계에 깃든 신성한 힘으로는 겨우 그 열기를 막아 내는 게 고작이었다.
팽팽한 힘겨루기가 계속되는 동안 막을 감싼 불꽃이 더 높이 치솟았다. 결국 그들은 불기둥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사이 아카키는 두 손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푸른 눈동자에 새빨간 불꽃이 담기며 일순 자색 빛이 드리웠다.
싸울 의지를 잃은 허무한 눈에서는 조금 전 팔이 뜯긴 채 바닥을 나뒹굴던 그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못 본 새 더 형편없어지셨네요."
"뭐?"
아카키가 매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타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앞선 전투에서 왜 푸르손부터 처리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러니 기습을 허용당해 그 꼴이 되셨죠."
"갑자기 뭐라는 거야? 하려고 했어, 실패했을 뿐이지."
"그럼 상급 악마를, 그것도 한 일족의 군단장을 평소처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잔챙이부터 노린 거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공격을 명중시켰음에도 고작 팔 하나를 날리는 데 그쳤다는 걸 확인한 순간, 아카키는 푸르손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판단했다.
푸르손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나면 그다음은?
그는 푸르손을 확실히 쓰러트릴 자신이 없었고, 바닥난 힘으로 하급 악마 무리를 홀로 상대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우선 푸르손을 목표에서 제외하고 다른 하급 악마들부터 노렸다.
차라리 그편이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격에 실패했을 때, 황자님은 곧바로 수십 배의 힘으로 다시 푸르손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 악마를 죽일 수 있었겠죠."
"확실치도 않은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모든 힘을 써 버리라고? 혹시나 성공했다 쳐도, 그다음은?"
"고작 그 수십 배의 힘이 황자님이 가진 전부라고요? 아니요, 푸르손을 죽이고도 하급 악마들을 쓸어버릴 힘 정도는 충분히 남았을 겁니다."
"웃기지 마.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난 혼자서 그런 걸 상대해 본 적도 없다고...."
아카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의 2황자이자 특권 사제인 아카키오는 황실이 교황청에 굴종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교황청에서는 그에게 외곽 마을에 나타난 하급 악마 한둘을 상대하는 일을 주로 맡겼다.
아타나스와 함께 순회를 돌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보잘것없는 임무들이 주로 아카키의 차지가 되었다.
반강제로 특권 사제가 된 황자의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황제파 귀족들이 결집할 기회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덕분에 아카키는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저 이쯤이 자신의 한계이겠거니 짐작하면서, 그 너머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황자님 힘으로는 가능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든 건, 황자님의 의지였죠."
"...."
아타나스는 사실 그가 승산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그저 불확실한 승리의 가능성보다는 확실한 패배를 고르는, 그의 관성이었을 뿐이다.
"저는 황자님이 그런 선택을 할 줄 알았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철저히 짓밟혀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그래서... 굳이 악마 앞에 던져 놓고 네 생각이 옳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냐?"
아카키의 눈빛이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그 눈은 결코 바깥을 향하는 법이 없었다.
아타나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금이 가기 시작한 결계를 바라봤다.
"글쎄요, 이래저래 복잡해서. 황자님은 어떠세요, 아직도 악마가 두려우십니까?"
"...그래, 무섭다. 제길, 무서워서 미치겠다고!"
결국 한계에 다다른 아카키는 제 본심을 털어놓았다.
황실의 보존을 위해 감추어진 비밀 하나. 전대 황후는 악마에 의해 죽었다.
아카키는 어머니의 시신을 안은 채 악마 앞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고유 능력인 '명중'을 각성해 악마를 잡았다.
사방에 진동하던 피 냄새, 알아볼 수도 없게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 시체가 품은 죽음의 한기.
그날 그는 처참한 풍경을 담은 악마의 커다랗고 투명한 눈동자를, 거기에 비친 자신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아카키가 가진 생의 첫 기억이자 가장 오래된 공포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하고 교황청에 끌려가 사제가 된 후로도, 그날의 공포는 도무지 가시지를 않았다.
"뭐가 무서워? 내가 너를 죽게 두지 않을 텐데."
"그래, 우리는 계속 둘째 황자님 곁에 있을 거야. 약속할게."
그게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그들의 말을 믿었던 순진한 시절에는 잠시나마 두려움을 잊기도 했으나, 좋은 한때는 금방 가 버렸고 그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그러고는 다시 제국을 떠돌며 악마를 잡는 날의 연속이었다.
아카키는 이따금 제 손짓 한 번에 죽을 악마의 앞에서도 두려워지고는 했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는 채로.
"아, 이제 정말 한계인가."
아타나스가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파지직-. 금이 간 자리를 따라 결계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틈새로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이 정도면 로베르 황자님 쪽은 이미 희망이 없을지도요."
"...뭐?"
순간 아카키는 까맣게 잊고 있던 로베르의 존재를 떠올려 냈다. 그러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로베르 황자님께는 미처 보호 결계를 치지 못했거든요. 그분이 바깥에서 시간을 끌어 주시는 동안 불을 꺼 보려 했는데, 불길이 더 거세진 걸 보니 다 글렀군요."
아타나스는 누군가의 피가 스며든 것처럼 한없이 붉은 허공 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야, 아타나스. 그따위 농담은 집어치워라, 더럽게 재미없으니까."
"저도 농담이면 좋겠습니다."
"웃기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이렇게 두 손 놓고 당할 리가...."
혼란에 빠진 아카키가 주먹을 틀어쥔 채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나 아타나스는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멍청한 윗분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상태가 나빠서요."
그 말을 증명하듯 아타나스는 계속해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카키는 멍하니 아타나스의 입가에 번진 핏자국을 바라봤다.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 로베르가 결계 없이 남겨졌고, 내가 여기 있는 사이 바깥에서 목숨을 걸고 저 상급 악마를 상대했다면.... 설마, 정말로 로베르가 죽었다고?'
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쾅! 뒤이어 연이은 충돌을 견디지 못한 결계가 부서져 내렸다.
아타나스는 어딘가 후련한 눈으로 불기둥 앞에 섰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카키를 바라봤다.
"황자님. 만약 이기고 싶다면,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오로지 앞만 보세요. 저 밖에는 누가 있습니까? 당신이 여길 나가서 그 악마와 대면해야 하는 이유는 뭐죠?"
바깥에 누가 있냐고?
그곳에는 로베르가 있었다.
오랫동안 미워해 온, 그래서 비겁하게 외면했던, 그럼에도 저를 앞질러 간 동생이.
그제야 그는 자신이 지금 반드시 악마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을 나가 동생과 나란히 서야만 했다. 신과의 서약을 어기고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신이시여, 여기에 눈과 귀가 멀어 버린 당신의 자식이 있습니다. 미흡한 저는 친구와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늘 제 형제를 불구덩이 속에 홀로 던져두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아카키의 음성에는 극한의 공포를 뒤로하고 마침내 다다른 평온이 서려 있었다.
"그러자 루멘께서 이르시길. 두려워 말아라, 나의 아들아. 너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도 끝내 믿음만큼은 앗아 가지 못했으니."
우우웅-. 그의 손바닥 위로 신성력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이내 완벽한 구의 형태가 되어 갔다.
하늘을 담은 것처럼 푸르른 구의 주변으로 거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너는 지옥 불 속에서도 반드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타나스는 곧장 그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기를 무섭게 그가 손을 대지 위로 내리꽂았다.
쿠궁, 한껏 압축된 신성력이 퍼지며 땅이 울렸다.
찰나의 진동과 함께 불길이 바람에 흩어졌다. 그의 힘이 몰고 온 태풍이 그대로 불기둥을 부수고 이미 폐허가 된 숲에 내려앉았다.
"반드시 명중시킨다."
태풍의 눈에 선 아카키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 아카키의 의지를 머금은 푸른 칼날이 빠르게 전진했다. 그리고 곧바로 악마의 복부를 꿰뚫었다.
"보세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크아아악!"
칼날을 따라 거대한 신성력이 흘러 들어갔다. 레라지에는 고통스레 울부짖으며 칼날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신성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칼날에 닿은 순간, 푸른 불꽃이 일며 손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악마를 속박하라."
아카키의 주문이 발동되자 수많은 칼날이 그녀의 위로 내리박혔다. 그녀는 사지가 결박된 채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아니야,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절대!"
그녀가 악을 쓰는 동안, 아카키는 폐허로 뛰어들어 로베르를 찾아다녔다.
"로베르! 정말 죽은 거 아니지? 로베르, 대답 좀 해 봐!"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자색 빛이 번뜩였다. 곧이어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가 전해져 왔다.
"잘도 자기들끼리만 숨었겠다."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가 실려 온 것을 끝으로, 바람이 완전히 가셨다.
* * *
평화가 드리운 숲속에서, 사람 키만큼 높게 자란 얼음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서 로베르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로베르? 이건 대체...."
아카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로베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의문의 폭발로 입은 상처 역시 이미 사라진 뒤였다.
"결계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요."
아타나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제야 로베르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바로 튀어나와서 계속 보조했어야지. 그쪽 상황을 모르니 덤비지도 못하고 시간만 끌었잖아."
조금 전, 심판의 화살이 같은 방식으로 로베르를 불기둥 속에 가두었다.
서둘러 화염을 꺼트리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로베르는 결계 표면을 따라 얼음 안개를 내렸다.
휘이익-. 그러기를 무섭게 또 다른 불화살이 내리꽂혔다.
"아, 정말 끈질기네. 분노 일족도 아니면서 왜 자꾸 지옥 불을 쓰는 거야?"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을 잡기 위해 애쓰는 동안 어느새 얼음 장벽은 로베르의 키만큼 자라났다.
그동안 두 인간은 불기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죽었나 했더니,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로베르가 주먹으로 얼음벽을 부수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투둑-.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제 쪽에 슬슬 한계가 와서요.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아카키는 얼빠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아타나스에게 은근히 조소 어린 눈빛을 받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또다시 아타나스의 손에 완벽히 놀아났다는 걸.
"뭐, 희망이 없어? 로베르가 죽었을지도 몰라? 희망이 없는 건 네 그 너덜너덜해진 인간성이겠지."
"하하, 불 끄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타나스는 너무 열 내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릴 뿐이었다.
"이 개새끼가 진짜...."
로베르는 두 인간의 다툼을 말릴 생각도 않고 레라지에가 있는 쪽을 살폈다.
힘없이 떨구어진 그녀의 머리 아래에서 불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로베르는 가만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육체의 전소가 시작됐나.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교만 일족에겐 최악의 죽음이군.'
연이은 전투를 버티지 못한 심장이 완전히 부서지며, 그 조각에 남은 미약한 마력이 육체를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어어, 잠깐. 형님, 제대로 한 거 맞아? 아직 움직이는데."
"그럴 리가...."
로베르가 저주 검으로 레라지에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검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카키의 얼굴 위로 경악이 번졌다.
"어이, 저거.... 왜 죽어서도 움직이는 건데?"
그녀를 속박하던 신성한 칼날들이 맥없이 녹아내렸다. 불이 붙은 그녀의 육신이 천천히 일어섰다.
이렇게 끝낼 수 없다.
그녀의 간절한 유언에 깃든 힘이 곧 소멸할 육신을 잠시나마 붙잡아 두고 있었다.
그 마지막 의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로베르였다.
"피하세요, 황자님! 당장은 결계를 못 만듭니다!"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최후의 불길이 로베르를 덮쳤다.
[35]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5화. 버림받은 황자 (1)
쾅! 새빨간 화염을 입은 레라지에의 주먹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노렸다.
세 사람은 재빨리 서로 흩어지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팔이 스친 길을 따라 불꽃이 튀었다.
"와, 날 엄청나게 죽이고 싶었나 본데? 어쩔 수 없네, 응해 주는 수밖에."
로베르는 아카키가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검을 고쳐 잡았다. 남은 그녀의 마력이나마 흡수할 기회였다.
'이 정도면 마법진은 필요도 없겠어. 심장이 온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이 자폭을 해서는....'
그건 다른 일족에게 힘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스스로 소멸을 선택하는 분노 일족의 방식이었다.
어째서 교만 일족의 군단장인 그녀가 그런 방식을 선택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녀를 완전히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로베르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며 검에 다시금 힘을 불어넣었다. 저주 검이 전과 같은 힘을 내주기를 기대하면서.
퍽-. 힘차게 휘두른 검이 그녀의 가슴 정중앙을 강타했다.
"앗, 실패...."
그러나 이전과 같은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꽃이 검에 옮겨 붙으며 엄청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윽, 뜨거...."
로베르는 순간적으로 검을 놓아 버렸다. 휘이익-. 그러기를 무섭게 그녀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퍽! 그녀의 주먹이 로베르의 얼굴에 닿기 직전, 아카키가 던진 단도가 그녀의 팔에 꽂혔다.
"속박당해라, 악마!"
이미 신성력을 대부분 소진한 아카키는 무작정 힘을 흘려보내는 대신, 속박 주문을 선택했다.
그녀는 허공에 매달린 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었다.
퍽, 퍽, 퍽. 뒤이어 아카키가 가진 모든 단도가 그녀의 사지에 박혔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축 늘어졌다.
"고맙다, 형님."
로베르는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권능, 약탈."
그녀의 육신에 스민 마력이 로베르에게 흘러 들어갔다. 예상대로 남은 마력은 최하급 악마와 맞먹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여튼 도움이 되는 놈이 없다니까. 그래도 잘 가라, 레라지에.'
불길이 완전히 잦아들고, 모든 힘을 잃은 육신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괜찮냐? 로베르. 넌 어떻게 된 게 상급 악마 앞에서도 겁을 안 먹어."
아카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르는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을 느끼며 뒤돌았다.
"그러게, 형님 덕분에 살았어. 이런 건 처음이라 또 새롭네."
로베르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카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은 피가 묻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우리가 이겼어, 오늘 밤에 술이라도 마시면서 자축하자고."
"어젯밤에도 말씀드렸지만, 순회 중에는 절대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뒤에 서 있던 아타나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를 가로챘다.
"저놈 말은 무시해. 어차피 그런 것까지 교황에게 보고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카키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하며 로베르를 마주 봤다. 그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스쳤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카키는 애써 웃으며 로베르와 손바닥을 세게 부딪쳤다.
그 순간, 로베르가 아타나스를 향해 신호했다. 지금 계획을 완수하겠다는 신호였다.
"저를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닌가요."
아타나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그러기를 무섭게, 로베르가 주문을 외웠다.
권능, 침범.
* * *
벨페고르의 고유 권능 '침범'은 모든 제약을 무시하고 원래라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침범하는 능력이었다.
어떤 공간이나 장소, 심지어는 누군가의 육체와 의식마저 침범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공격이 목적이 아닌 경우, 의식을 침범하는 일에는 큰 위험부담이 뒤따랐다.
대상의 영혼에 가해지는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아주 섬세하게 다듬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유일한 대비책은 실패하는 순간 아타나스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었으나, 결코 완벽한 대책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는 게 아타나스가 가진 능력의 한계였으니까.
'한 번에 성공해라, 제발.'
아직 심장이 온전치 않은 탓에 로베르는 그답지 않게 실패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러나 귀찮아서라면 모를까, 실패가 두렵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권능, 침범."
짧은 주문과 함께 로베르는 곧장 아카키의 의식에 구축된 시간선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번졌다.
그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무한한 공간을 가로질러 아카키가 가진 최초의 기억에 안착했다.
"아카키, 내게서 떨어져!"
한 여자의 간절한 외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속이 울렁이는 감각이 가시고,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된 건가?"
로베르는 무사히 형체를 갖춘 육신을 내려다봤다.
발밑으로 악마의 것과 인간의 것이 뒤섞인 검붉은 피가 고여 있었다.
'이게 형님이 가진 최초의 기억이라고?'
사방에서 인간에게 날 리 없는 악마의 냄새가 진동했다. 로베르는 멍하니 피로 젖은 길을 눈으로 좇았다.
죽은 기사와 하녀들의 시체가 널린 길의 끝에 고작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카키가 주저앉아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어린아이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쾅! 뒤이어 거대한 여자의 손이 아카키의 옆을 스쳐 벽에 박혔다.
"엄마...."
아카키가 울먹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로베르는 그녀가 전대 황후라는 걸 알아봤다.
'이상하군. 왜 황후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전대 황후는 이미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조차 없이 흉측해져 있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달린 두 팔은 인간의 것이었으나, 옆구리에서 솟아 나온 나머지 두 팔은 분명 악마의 것이었다.
쿠궁, 쾅! 악마의 팔은 본능처럼 계속해서 아카키를 노렸다. 그 안에 깃든 신성한 힘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력이 실린 날카로운 손톱은 아카키를 감싼 신성한 막을 쉽게 뚫지 못했다.
거대한 악마의 팔이 아카키를 노릴 때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빙의인가. 영혼의 형태까지 악마처럼 바꾸어 놓은 걸 보면 상급 악마의 짓인데. 왜 딱히 생각나는 놈이 없지?'
로베르는 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이미 악마의 숙주나 다름없었다. 흰자위가 시커멓게 물든 눈이 아카키를 향했다.
"엄마, 그만해. 나 무서워. 응?"
그러나 아카키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애원하자, 아직 인간의 흔적이 남은 그녀의 한쪽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랑해, 내 아들. 너만은 꼭 이 궁에서 살아남으렴."
그녀가 애써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자라난 송곳니로 혀를 세게 깨물었다.
치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모든 핏줄이 솟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이 생기를 잃어 가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툭. 그녀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엄마, 엄마!"
아카키는 곧장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벌어진 입가로 흐른 피가 아카키의 옷을 적셨다.
"크악, 크에에엑!"
아카키와의 접촉을 이기지 못한 악마가 고통스레 울부짖으며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뭐야, 빙의가 아닌가?"
분명 숙주를 잃은 악마를 이곳에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악마의 심장 조각이었다.
그녀의 몸 밖으로 튀어나온 조각은 순식간에 그녀의 남은 생명력을 모두 빨아들여 악마의 형체를 갖추어 갔다.
"엄마...."
아카키는 멍하니 품에 안은 어머니의 시신이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죽여 버릴 거야."
아카키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눈물이 번진 푸른 눈이 천천히 그 너머의 악마를 향했다.
"죽어, 죽으라고!"
어린아이가 악을 쓰며 제 장신구를 집어 던진 순간, 푸른 빛이 일었다.
퍽-. 날카로운 브로치가 순식간에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자리를 따라 푸른 불꽃이 번졌다.
"크아아아악!"
악마가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동안, 그 움직임에 방 안의 가구들이 전부 쓸려 나갔다. 그러나 아카키만큼은 신성한 기운에 보호받았다.
펑! 심장이 터져 나가며 있을 곳을 잃은 악마의 머리가 아카키의 앞으로 굴러갔다.
"아카키, 괜찮으냐! 여깁니다!"
그즈음 복도에 조너선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아티팩트로 무장한 특권 사제들이 곧장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일이 다 끝나고서야 오는군."
로베르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등장을 지켜봤다.
그때까지도 아카키는 제 앞에 떨어진 악마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머리가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릴 때까지.
"이건...."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방 안을 살폈다.
처참한 풍경 속에서 그들에게 가장 먼저 보인 건 악마를 처리하고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은 어린 황자와, 그가 품은 어떤 가능성이었다.
"신성력을 각성하셨군요, 황자님."
"...아버지, 엄마가 죽었어요."
"아카키 황자님은 지금 당장 저희와 함께 교황청으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악마의 시체는 내려놓으세요."
사제들은 아카키의 힘을 억누른 뒤 황후의 시신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쉽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안아 올린 채 방을 나서려 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아카키가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제의 팔을 잡아챘다.
그러나 그 손은 사제의 팔을 지나쳐 허공을 웃돌 뿐이었다.
"맞다, 여기서는 서로 영향을 못 미치지."
로베르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이제 황제가 그들을 막아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당장 황자를 놓지 않으면 황법으로 다스리겠네!"
조너선이 핏대를 세우며 다가서자 사제들이 앞을 막아섰다.
"악마가 출현한 곳에서 저희 특권 사제들은 치외법권에 있게 됨을 아실 텐데요, 폐하. 이건 황후의 얼굴을 한 악마가 황궁까지 침투한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건... 아직 무엇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황청에서 공식적인 조사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모든 제국민이 이 사건을 알게 되어도 상관이 없으신지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황후에게 악마가 깃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황실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신을 거스르고 타락한 황실을 섬길 백성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황자님에게 악마의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허가해 주신다면, 이 일은 저희 선에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조너선은 사제들이 지금 황후와 황자를 걸고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임을 깨달은 눈치였다.
조너선의 망설임 가득한 눈에 황후의 처참한 시신과 울부짖는 어린 황자가 담겼다.
"그대들 눈에는 오로지 악마만 보이고, 죽은 황후와 방금 어미를 잃은 황자는 보이지 않는가! 적어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은 준 후에...."
"황족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악마의 씨앗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국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하. 그리고 황제께서는... 황후와 이혼을 진행 중이셨던 것으로 압니다만."
어차피 궁을 나갈 예정이었던 여인 하나를 위해 정녕 황실의 존속을 걸고 교황청과 전쟁을 불사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조너선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인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쯧, 게임 끝이군."
로베르는 조너선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혀를 찼다.
"...황자는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엄마가, 엄마가 죽었다고요. 아버지."
아카키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너선은 아들의 원망 어린 눈을 애써 외면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오늘 황제 폐하가 내린 결단을 높이 사실 겁니다. 루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사제들은 그대로 등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그들에게 붙잡혀 가는 내내 아카키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아버지, 왜 가만히 있는데요? 엄마가 죽었다니까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아빠. 가지 마세요, 네? 폐하!"
그러나 조너선에게서는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야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아카키는 곧바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로베르는 그들을 뒤따라가며 축 늘어진 아카키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두 황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 냈다.
전대 황후가 병으로 죽자마자 유리아가 곧바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새로운 황후를 맞이해야 했던 제국민들은 유리아를 향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가만, 형님과 내가 네 살 터울이니, 못해도 이즈음에 나와 율란이 생긴 것 아닌가? 미친...."
그것이 아카키가 로베르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이자,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36]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6화. 버림받은 황자 (2)
황태자 시절, 조너선은 황실에서 정해 준 대로 칼릭스 공작가의 에일린과 정략혼을 치렀다.
고결한 출신에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인품을 가진 에일린 황태자비는 모든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황후가 되도록 끝내 남편의 마음만큼은 얻지 못했다.
"황가의 여인이 된 대가로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에게 매번 안겨야 하는군요."
"...미안합니다, 황후."
그럼에도 황실의 대를 이을 의무를 진 부부는 정해진 날마다 관계를 했고, 첫아들을 가졌다.
황제 부부의 노력으로 1황자 하론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마냥 순탄하지 않았던 출산 이후 에일린 황후는 큰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하론이 유모의 젖을 먹으며 자라나는 사이, 황후는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황후를 진찰한 의사들은 입을 모아 그녀의 심신이 너무 지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우리 아들은 잘 크고 있습니다. 그러니 황후는 당신 몸부터 챙기세요. 어서 일어나서 황자를 안아 보셔야지요."
조너선은 바쁜 일정을 쪼개어 하루에 한 번은 꼭 그녀의 침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밤새 그녀의 넋두리를 들어 주었다.
황궁이 너무 외롭고, 이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너선은 쉽게 수긍했다.
"당신에게는 늘 미안합니다. 혹시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꼭 이야기해요."
조너선은 한결같이 다정했다. 그러나 점점 지쳐 가는 얼굴까지 미처 숨기지는 못했다.
"폐하. 저, 아이를 더 가지고 싶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제가 바라는 대로 해 주세요."
에일린 황후는 남편의 마음을 붙들어 놓을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황자 아카키오가 태어났다.
모두의 우려대로 황후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을 부려 아카키를 제 품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나도 허울뿐인 남편 따위 당장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내게 대체 뭐가 남지? 조너선은 황제로서 새 황후를 맞이할 텐데, 나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그 꼴을 보며 늙어 가야 하잖아! 그럼 너는? 하론은? 내 아들들은 어떻게 되는데?"
한동안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카키를 붙잡고 화를 냈다.
그 아우성은 아카키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릴 즈음에야 간신히 끝이 나곤 했다.
결국 조너선은 파토르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청에 황후의 상태를 알렸다. 그리고 간절한 도움을 청했다.
사제들은 황후에게 악마가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궁인들을 모두 물리고 그녀와 대면했다.
"황후는 좀 어떻습니까?"
"늘 저희와 함께 루멘께 기도를 올리고 계시니 금방 차도를 보이실 겁니다."
실제로 황후의 상태는 서서히 호전되는 듯 보였다.
그녀는 갑작스레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 없이 차분해졌고, 아카키는 물론이고 하론과도 자주 시간을 보냈다.
황후궁이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았을 즈음, 조너선은 고민 끝에 그녀와의 이혼을 결정했다.
"황후도 알다시피 제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늘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거겠죠. 그러니 이만 끝을 내는 게 모두를 위한 선택인 것 같은데, 황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부부로 남겠지요, 영원히."
결국 황후는 이혼에 동의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아주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에일린 황후는 악마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황후의 병세가 너무 나빠져서... 그래서 갑작스레 그렇게 되었다고, 그냥 그런 식으로 발표하도록 하세요."
패닉에 빠진 조너선은 유리아의 충고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러고는 유리아에게 안겨 잠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작고하셨다고? 갑자기 왜?"
당시 막 대공의 자리에 올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파토르는 뒤늦게 모든 상황을 전해 듣고 급히 수도로 올라왔다.
황후가 죽은 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황궁 내에서 조용히 치를 예정이라던 황후의 장례식은 열리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황후궁에는 울음소리 대신 소음만이 가득했다. 공사라는 명목으로 악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파토르를 발견한 궁인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전하."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정무를 보고 계십니다. 밀린 일이 많아 밤을 넘기겠다고 하셨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심이 어떠신지요."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그저 주인의 명령대로 파토르를 돌려보내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황후의 죽음이 어떻게 이런 식일 수 있지?'
그녀의 죽음 이후 풍경은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파토르는 궁인들을 추궁해 본궁 예배당에 그녀를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모든 미움은 잊게 하시고, 제가 가질 수 있는 사랑만을 알게 하소서."
텅 빈 예배당에서 하론이 홀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파토르는 무사히 살아남은 조카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하론, 괜찮니?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형수님이 갑자기 왜...."
"제 어머니는 악마였어요."
"...뭐?"
제단으로 다가서던 파토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런 대공을 바라봤다.
"하지만 교황의 은혜로 어머니는 그저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황후로 남게 될 거고요."
"하론,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그 거래의 증거로 아카키오가 교황청으로 넘겨졌어요. 신성력을 각성했다니, 아마 사제가 되겠죠. 아버지는 숙부가 남겨 두고 간 그 여인과 밤을 보냈고요."
그제야 파토르는 지난 며칠간 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저는 끝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숙부."
"...그래,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파토르는 제단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이 구해 내야 할 조카의 얼굴을 떠올려 냈다.
"교황청으로 간다, 지금 당장."
곧장 궁을 나선 그는 대기 중이던 자신의 기사단과 함께 교황령으로 향했다. 말발굽 소리가 한동안 대지를 울렸다.
* * *
전대 황후가 죽은 그날, 아카키를 태운 마차는 곧장 교황청으로 향했다. 로베르는 그 마차를 얻어 타고 함께 그곳에 당도했다.
통신구로 상황을 전해 들은 교황이 직접 황자를 마중 나왔다.
"깊게 잠드셨군. 황자께서 마음 편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차를 내어드려라."
사제들은 잠든 아카키의 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교황청의 지하로 그를 데려갔다.
로베르가 뒤를 따르려던 순간, 사방이 점멸했다.
"쳇, 의식마저 완전히 차단해 버린 건가. 골치 아프게."
로베르는 암흑 속에서 전대 황후의 죽음을 곱씹었다.
그건 분명 단순한 빙의가 아니라 심장을 통한 악마의 부활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남아 있던 탓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악마의 그릇을 만들려던 게 분명해. 그 배후는 인간인가? 아니면 악마?'
교황청이 황실을 무너뜨리고 싶었다면, 황후를 빙의자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악마의 그릇까지 만들 이유가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악마는 그들의 가장 큰 적이었으므로.
"그렇다고 생존한 악마가 수작을 부렸다기에는, 심장이 있다면 굳이 인간 몸으로 부활시킬 필요도 없잖아. 아, 젠장. 뭔가 성가시고 구린 냄새가 나는데."
처음부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로베르는 골치가 아픈 탓에 머리를 싸맸다.
그사이 다시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로베르는 생각을 관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교황의 알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키는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방의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교황의 명을 받은 두 사제가 아카키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황제는 예상대로 유리아와 놀아났다더군. 황후 인생도 기구하기 짝이 없어, 귀하게 자란 공작가 여식께서 고작 시골 촌뜨기한테 밀리다니."
"참 대단한 여자야. 단장, 아니 대공에 이어 황제까지.... 작정하고 덤벼드는 미인을 어느 사내가 당해 내겠냐만, 황제가 대공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어머니와 숙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로베르가 기함하며 소리쳤다.
파토르에 관한 부분이 찢긴 일기장, 숙부가 내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어린 로베르의 말, 이상하리만치 사이가 나빠 보이던 황후와 대공.
그제야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상상치도 못한 진실과 맞닥뜨린 로베르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두 사제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왜 대공이 먼저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황제가 황태자 시절부터 에일린 황후와 소원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오히려 대공이 허니 트랩에 걸려든 게 의외였지."
"하긴. 유리아가 교황의 첩자라는 걸 알고도 바로 내치지 못했던 걸 보면 단단히 빠지긴 했나 보지. 고결하신 에피파네스 황가의 취향이 그리 저렴할 줄은. 나라면 에일린 황후 쪽이 더 끌렸을 텐데."
"말을 삼가게, 신을 모시는 자가 불경하긴."
"어, 엄마...."
그때, 아키키가 뒤척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제들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아아, 그러니까 아버지는 숙부의 애인인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전대 황후와 정략혼을 했고, 이혼 중에 황후가 죽자 곧장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덧붙여 유리아 황후는 원래 교황이 심어 놓은 첩자였다. 예언의 저주받은 아이를 낳은 뒤로도 그 관계가 이어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지럽군. 대체 어떻게 된 집구석이야? 메리가 말한 가족이랑은 완전 딴판이잖아.'
모든 형제가 자신의 잠재적 적이 된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로베르가 곤히 잠든 아카키의 온순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차에,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멈추십시오, 대공! 정녕 교황청과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입니까!"
"내가 그까짓 걸 두려워할 것 같나? 비켜."
쾅! 뒤이어 두꺼운 창이 문을 뚫고 들어왔다. 그 너머로 분노가 서린 파토르의 청안이 나타났다.
쾅, 쾅, 쾅. 굉음이 이어지며 보호 주문이 걸린 문이 부서져 갔다.
두 사제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곧바로 보호구를 꺼내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소파에 누운 아카키를 안아 들었다.
쿠우웅! 이윽고 문이 완전히 부서졌다. 신성한 힘이 깃든 창을 든 파토르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대공."
"내 조카를 찾으러 왔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기꺼이 상대해 주지."
로베르는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청년의 얼굴을 살폈다.
'이때 숙부는 막 성년이 된 건가. 나랑 동년배인 숙부라니, 낯설군.'
그러나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은 로베르가 아는 대공의 것이었다.
사제들이 아카키를 내어주지 않자, 파토르는 곧장 날카로운 창으로 그들의 심장을 겨누었다.
"물러서세요, 대공 전하. 저희를 향해 겨눈 창끝에는 신이 있음을 정녕 모르십니까!"
"내가 겨눈 것은 제국의 황자를 납치한 반역자다."
"저희는 단지 황자님에게 남았을지도 모를 악마의 흔적을 확인하고자...."
파토르가 손을 들어 사제의 말을 끊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겁먹은 사제들의 얼굴이 비쳤다.
"너희들 또한 교황청의 개가 되기 전에는 제국의 백성이었겠지. 그러니 아카키 황자를 돌려주고 물러나라. 나의 제국민으로 남을 마지막 기회다."
파토르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그 안에 깃든 살기를 느낀 두 사제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카키를 안은 젊은 사제의 시선이 잠시 대공을 지나 바깥에 쓰러진 사람들에게 닿았다.
"허억-."
정말 대공이 자신들을 공격할 생각임을 깨달은 젊은 사제가 놀란 신음을 흘렸다.
한참을 방황하던 눈동자가 다시 대공을 향한 순간, 로베르는 젊은 사제의 선택을 직감했다.
"저, 여, 여기...."
젊은 사제는 아카키를 대공에게 넘겨주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통신구로 교황에게 상황을 전하던 다른 사제가 경악하며 크게 소리쳤다.
"자네 미쳤나? 감히 성하의 뜻을 거스르고 대공의 말을 따라? 자네가 그러고도 루멘 님의 신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으음, 숙부? 왜 여기...."
소란이 길어진 탓에 아카키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파토르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잠시만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렴, 아카키."
파토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카키가 순순히 그 말을 따른 순간, 곧장 창을 내질렀다.
푹-. 날카로운 창이 아티팩트 보호구를 관통해 단숨에 사제의 심장을 꿰뚫었다. 통신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끄어억...."
"신민? 올라가서 정말 신을 만나거든 꼭 물어보거라. 우리가 당신의 자식이라면, 왜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만 봤느냐고."
파토르는 차가운 목소리로 통보하고는 피로 젖은 창을 빼냈다. 뒤이어 사제가 힘없이 쓰러졌다.
그 허무한 죽음을 지켜본 젊은 사제는 다급히 대공의 앞으로 기어가 고개를 조아렸다.
"대, 대공.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전하의 백성입니다! 전하께서 지켜 주셔야 할 에피파네스 제국민입니다요! 황자님을 넘겨드린 것으로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대는 제국민으로 남을 여지가 있겠지. 이름은?"
"아, 안토니오라고 합니다."
"안토니오 사제, 따라오거라."
파토르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창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카키를 더 단단히 안은 채 곧장 방을 나섰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파토르를 따라 교황청을 나서는 내내, 로베르는 교황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교황은 분명 대공이 단신으로 교황청을 휘젓도록 둘 인간이 아니었다.
"기어코 일을 벌이셨군요, 대공."
"그럼 그렇지."
교황청 입구에 특권 사제와 성기사단이 모두 모여 있었다. 파토르가 타고 온 말은 이미 목이 잘린 채였다.
치잉-. 그들은 피가 묻은 창을 보자마자 대공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그 뒤편에서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전을 침입해 형제들을 죽인 반역자 파토르를 체포해라."
교황의 엄숙한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아티팩트 검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37]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7화. 버림받은 황자 (3)
특권 사제와 성기사단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공을 포위했다.
"안토니오, 감히 신을 등진 너를 사제직에서 파문하고,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한다. 불만은 없겠지?"
"허억-."
새롭게 부임한 성기사단의 단장, 눅스가 으름장을 놓았다. 안토니오 사제가 놀란 숨소리를 내며 파토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수, 숙부."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던 아카키가 화들짝 놀라 파토르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파토르는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며 아카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쩌려는 거지? 아무튼 여기서 무사히 나가긴 할 텐데.'
이미 파토르의 미래를 알고 있는 로베르는 따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대공에게 검을 겨눈 이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채였다. 자신이 결코 대공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습니까, 대공."
교황이 앞으로 걸어 나와 파토르를 마주했다. 파토르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의 적을 노려봤다.
"황자를 납치할 때는 저와의 전쟁을 불사할 각오를 하셨어야지요, 성하."
"그래서, 기사단까지 끌고 이 땅에 발을 들였군요. 하지만 정작 홀로 이곳에 온 걸 보면, 어느 쪽이 패배할지는 이미 대공도 알고 있는 듯한데요."
"뭔가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제가 홀로 온 이유는, 그저 혼자서도 충분한 일에 굳이 부하들의 힘을 빼는 못난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하, 여전히 오만하십니다."
"감히 신을 흉내 내는 성하만 하겠습니까."
파토르의 말에 교황의 엄숙한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교황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신의 대리자가 명한다. 성전을 침입해 형제들을 죽인 반역자 파토르를 체포해라."
"해 보십시오, 할 수 있다면."
파토르가 피식 웃으며 창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쿵! 대지에 꽂힌 커다란 장대가 옅게 진동했다. 성기사들은 움찔 놀라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파토르는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면서 날카로운 창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서걱-.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다들 어서 주문을...."
대공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본 눅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 그때, 신성한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
붉은 핏줄기는 금세 창의 형태를 갖추었다. 파토르의 청안이 성기사들을 지나쳐 사제복을 입은 무리를 비추었다.
"저건...."
교황이 미간을 찌푸린 찰나, 붉은 창이 순식간에 가장 앞에 선 특권 사제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허억-."
휘이익-. 주인의 의지를 머금은 가장 신성한 창이 허공을 가르며 둥근 원을 그렸다.
미처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특권 사제들은 차례대로 그 창에 관통당했다. 그렇게 같은 피에 속박당한 채 쓰러졌다.
가장 큰 전력을 허무하게 잃은 성기사단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이게 뭐야? 대공은 분명 오러를...."
"주로 오러를 썼을 뿐, 신성력을 쓸 줄 모른다는 말은 한 적 없다."
파토르는 이미 오래전 고유 주문을 각성한 뒤였다. 단지 그 사실을 감추어 왔을 뿐이다.
"뭐야, 분명 신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사제들 못지않게 당황한 로베르는 급히 파토르를 살폈다.
미래의 그와 달리 지금의 파토르에게서는 아카키 이상으로 강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그럼 이 힘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로베르가 의아해하는 사이, 파토르는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아카키를 넘겨주었다.
"잠시 황자를 맡기겠다."
"예? 예...."
"숙부, 제가 도울게요, 도울 수 있어요."
"황자님, 그러다 떨어집니다!"
아카키가 몸을 뒤틀며 안토니오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파토르는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아카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건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미루도록 하자. 잠시만 눈을 감고 아는 숫자를 전부 세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 끝나 있을 거라 약속한다."
아카키는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수를 세기 시작했다.
파토르는 그런 아카키를 등진 채 땅에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언젠가 자신을 따르던 성기사단을 겨누었다.
"검을 들어라, 기사단. 나의 가르침을 잘 행하고 있는지 시험해 보지."
뚝, 뚝. 벌어진 손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창을 적셨다.
"다들 뭣 하고 있어! 대공을 쳐라!"
눅스의 고함과 함께 기사단이 열을 맞추어 파토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토르는 날카로운 날을 뒤쪽으로 돌린 채 장대를 잡았다.
와아아! 거친 함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쯧."
파토르는 혀를 차며 창을 휘둘렀다. 두꺼운 장대가 깔끔한 궤적을 그렸다. 그 길을 따라 강한 오러가 퍼져 나갔다.
쾅! 가장 앞 열의 기사들이 나가떨어지며 대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공은 망설임 없이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창을 휘둘렀다.
눅스가 검을 들어 간신히 장대를 막아 세웠다. 칭-. 두 오러가 충돌하며 검파가 퍼져 나갔다.
"오랜만이야, 눅스 경."
"지금이 그런 한가한 인사나 나눌 때는 아닌 듯한데, 단장."
눅스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눅스는 사정없이 떨리는 팔에 힘을 실어 검을 단단히 잡았다.
퍽! 팽팽한 대치 끝에 검날이 장대에 박혔다.
기회를 잡은 눅스는 작은 흠으로 검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려 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이제 단장은 그대가 아닌가."
장대가 반쯤 갈라진 그때, 파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이어 그의 피가 검에 닿았다.
치이익-. 핏방울이 검날 위로 빠르게 번졌다. 그 자리를 따라 검이 맥없이 녹아내렸다.
눅스가 다급히 파토르의 등 뒤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대공을 노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뚫기가 쉽지 않아서...."
그 순간에도 파토르에게서 거대한 양의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 힘에 짓눌려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너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적을 상대할 때 부하들을 앞세우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말했었지."
파사삭. 이내 눅스의 검이 완전히 바스러졌다. 패배를 직감한 눅스는 두 손을 떨구었다.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단장."
퍽-. 오러가 실린 장대가 눅스의 급소를 세게 후려쳤다. 눅스는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힘없이 쓰러졌다.
칭, 칭-. 그다음부터 전투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오러가 충돌할 때마다 성기사들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들은 이미 기절한 동료 위로 엎어져 탑을 쌓아 갔다.
"저 많은 인간이 숙부 하나를 못 잡다니. 아타나스가 없던 시절에 대체 어떻게 교황청의 권세를 유지했는지 모르겠군."
로베르는 그들의 검이 파토르를 스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파토르는 금세 교황청의 앞뜰에 있던 모든 전력을 쓰러트리고 교황에게 향했다.
깔끔하게 반원을 그린 창의 날카로운 끝이 교황을 겨누었다. 교황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게 오는 길에 한 명도 죽이지 않은 것이 용하군요."
"한 명은 죽였습니다. 당신 방에서 한동안 그의 피 냄새가 진동하겠지요."
"살생이 두려운 것도 아니라면, 왜 저 불쌍한 형제들을 살려 두었을까. 역시 대공이라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교황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토르는 말없이 창끝으로 교황의 목을 그었다.
서걱-. 반듯한 선을 따라 살결이 갈라졌다. 교황은 미간을 찌푸린 채 쉽게 더럽혀진 새하얀 법복을 내려다봤다.
"착각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살려 두는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나의 제국민들이 아직 너희를 믿기 때문이고, 그 굳건한 믿음이 그들을 살게 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두를 지키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가능하다 믿는 건 오만입니다, 대공."
"나는 지키기 위해 승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그따위 말로 나를 현혹하려 하지 마라."
차가운 금속이 교황의 목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교황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들었으면, 내가 오늘 당신을 살려 주는 대가로 무엇을 얻게 될지 직접 말해 보시지 그래."
"오늘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이면 되겠습니까."
"황자를 납치한 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해. 덧붙여 황후 폐하의 장례를 방해하지 않는 것까지 조건으로 하지."
"그렇다면 황후에게 악마가 들렸고, 2황자는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으며, 교황청에서는 황자의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임을 함께 공표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파토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의 동요를 알아본 교황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대공. 대공이 그토록 아끼는 제국민들이 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되는군요."
"...."
"이제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헛된 꿈을 꾸고 있는지. 황실은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협조를 구해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대공이지요."
파토르는 제 뒤에 있는 아카키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는 망설이다 끝내 창을 거두었다.
교황이 너그럽게 웃으며 대공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일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맹약이 무엇인지 알 테니 피차 덧붙일 말은 없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대공은 반드시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성하야말로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제국민들 덕분에 오늘 이 성전이 무너지지 않았고, 당신이 무사히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그러나 언젠가 내가 반드시 이곳의 꼭대기에 앉은 게 신이 아니라 추악한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파토르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남긴 뒤 먼저 돌아섰다.
'숙부가 저렇게 날뛰는 걸 봤으니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할 텐데.'
로베르는 곧바로 그를 따르지 않고 잠시 그곳에 남아 있었다.
"모르는 사이 대공이 너무 강해졌군. 설마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이야. 저자를 확실히 견제할 방법이 필요하겠어...."
덕분에 교황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로베르는 자연스레 아타나스를 떠올렸다.
'견제할 방법이라, 그게 아타나스인가? 확실히 그놈이라면 숙부를 죽일 수 있겠지.'
그러나 악마의 계약에 걸린 아타나스는 더는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로베르는 교황을 비웃어 주고는 곧장 대공과 합류했다.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앞으로 이 한 몸 제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대공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안토니오는 굽신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의 맹세를 믿겠다."
파토르가 아카키를 안아 들며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지키기 위해 승리한다. 이슈타르와 내 일족들이 내게 바란 것도 그런 건가.'
로베르는 그의 뒤를 따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교황의 말대로, 그건 정말 헛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 * *
에일린 황후의 죽음 이후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황제와 대공은 자주 다투었고, 황후궁이 새로 지어졌으며, 아카키는 깊은 각성통을 앓으며 침실에 머물렀다.
아카키의 의식 속에서 그 시기는 굉장히 빠르게 지나갔다. 덕분에 로베르는 따분한 풍경을 오래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유리아가 새로운 황후가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에 맞추어 교황청은 2황자 아카키오의 신성력 각성을 공표하고 그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였다.
"나더러 벌써 새로운 어머니를 맞이하라니. 그것도 모자라 교황청의 개가 되라고? 어떻게 아버지가 나한테...."
"그래, 형님. 그만 누워 있고 화라도 내 보라고."
아카키는 분노에 사로잡혀 황제를 찾아갔다. 로베르는 휘파람을 불며 그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황제를 찾아온 숙부가 그곳에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성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사와 궁인들을 물렸는지,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아카키는 숨죽인 채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기어코, 정말 기어코 유리아랑 결혼을 하겠다고?"
파토르는 본 적 없는 얼굴로 조너선을 향해 화를 쏟아 내고 있었다. 로베르는 아카키와 나란히 서서 싸움을 구경했다.
"형수가 그렇게 가신 지 이제 고작 반년이야! 어떻게 그사이에 유리아가 황제의 씨를 배게 해? 그런데도 제국민들이 유리아를 황후로 받아들일 것 같아?"
"나도, 유리아도 각오한 일이야. 그래도 교황청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쨍그랑-. 파토르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화병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조너선의 멱살을 잡아챘다.
"예나 지금이나, 형님은 정말 발전이라는 게 없구나."
"파, 파토르...."
"그럼 아카키는? 기껏 가서 구해 왔더니, 다시 교황 앞으로 던져 주겠다고? 그놈이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여자에 미쳐서 아들을 팔아먹어?"
"나라고 아카키를 사제로 만들고 싶은 줄 알아?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황실의 불문율을 잊었어? 전대 황제들께서 이미 교황청과 약조하신 일이라고!"
조너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토르는 애써 주먹을 풀고 조너선의 어깨를 쥐었다.
"방법이 없으면 찾아내! 그게 황제가 할 일이란 걸 알 때도 됐잖아!"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파토르. 난, 절대 네가 될 수 없다고. 나 같은 놈은 황제로 사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차단 말이야...."
"처음부터 내 일이 아니었어. 알기는 해? 형님이 구했어야지. 그때도, 지금도 아카키를 위해 화를 내는 건 너여야지! 네 아들이잖아! 그 애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너라고, 조너선!"
"...화를 낸다고 힘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파토르. 나도 괴로워. 죽은 형제들 대신 황실을 떠맡게 된 후로 하루도 그렇지 않은 날이 없단 말이야."
조너선이 기어코 눈물을 보인 순간, 파토르의 얼굴 위로 체념의 기색이 스쳤다.
"와, 정말 다 귀찮아진 모양인데."
파토르의 심정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로베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파토르는 맥이 풀린다는 표정으로 조너선의 멱살을 놓았다.
"그래, 이제 나도 모르겠다. 형님 마음대로 해."
파토르는 벗어 두었던 재킷을 챙겨 곧장 알현실을 나섰다.
쾅! 문에 그대로 이마를 부딪친 아카키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카키?"
그제야 아카키를 발견한 파토르의 얼굴 위로 경악이 스쳤다.
닮은 듯 다른 두 쌍의 청안이 맞물린 찰나, 대공은 아카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겨눈 수많은 검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던 파토르는 그 순간만큼은 공포를 내비쳤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 조카가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려 그에게 다가갔다.
"흐윽-. 나도 황제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때, 문 너머로 조너선의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파토르가 무언가에 붙들린 듯 멈추어 섰다.
아카키는 울먹거리며 파토르를 올려다봤다.
"숙부, 그러지 마세요. 숙부까지 절 모르는 척하면, 전 이제 어떡해요...."
"울지 마라. 제국의 황자가 이렇게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 되겠어?"
파토르는 머뭇거리다가 끝내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팔을 벌렸다. 아카키는 대공에게 안겨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그러면서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이번에도... 구해 줄 거죠? 구해 주시면 안 돼요? 네?"
"...그래, 그럴게."
파토르가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그제야 아카키는 안심한 듯 파토르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세요. 벌써 지키지 못하는 게 생기잖아요, 숙부."
얼마 뒤, 새 황후가 된 유리아가 예언의 저주받은 아이를 출산하며 황실은 끝내 교황청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했다.
제국의 2황자 아카키오는 강제로 신학교로 보내졌고, 십 년 뒤 열넷의 나이로 특권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루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 저, 아카키오는 삶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이 내린 사명을 받들 것입니다."
교황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맹세한 날, 아카키는 복수를 다짐한 채 황궁으로 돌아갔다.
[38]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8화. 버림받은 황자 (4)
로베르가 예언의 저주받은 아이로 지목당했을 당시, 대공은 교황청과 대립하며 막내 황자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저주받은 황자를 죽여라! 신을 등진 황실을 섬길 자는 없다!"
그러나 대치가 길어질수록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갔다.
대공이 사제들과의 언쟁 중에 성녀를 부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제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주요 지방 곳곳에서 폭동의 조짐이 보였고, 그러던 중 수도에 있는 대공의 저택에 누군가가 불을 지르는 일까지 생기고 말았다.
황자 시절부터 제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파토르가 성난 민심의 표적이 된 사건은 황실파 귀족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제국민들이 대공마저 등질 줄은.... 우리도 생각을 달리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황실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연달아 이탈하며 대공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세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결국 파토르는 조너선이 백기를 들고 로베르가 저주받은 황자임을 공인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기억하십시오, 대공. 저주받은 황자를 품은 황실이 살아남을 방법은 신에게 선택받은 아카키 황자를 내세우는 것뿐이라는 걸."
황실을 지키려는 대공의 발악은 간신히 로베르를 살리는 데 그쳤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아카키는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아카키. 네게는 그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는데.... 나를 원망해도 좋아."
"저는 괜찮아요, 숙부. 설마 황자인 저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침통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숙부 앞에서, 아카키는 간신히 원망을 삼켰다. 파토르가 너무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파토르는 연고도 없는 여자아이 하나를 입양해 딸로 삼더니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모시러 왔습니다, 아카키 황자님. 인사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아니, 필요 없어. 바로 출발해."
"아카키...."
아카키는 신학교로 가는 저를 마중 나온 가족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깊은 원망이 서린 시선이 유모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에게 잠시 닿았다.
반짝이는 자안이 아카키를 향한 순간, 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징그러운 악마 새끼."
"와우, 말이 심한데."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로베르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에게서는 자신이 교황청의 볼모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어린 동생을 향한 명백한 혐오가 느껴졌다.
아카키는 이를 갈며 가족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가득 안은 채 신학교로 끌려갔다.
'좀 억울하군.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아?'
로베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아카키와 긴 침묵을 함께했다.
마차는 하루를 꼬박 달려 교황령 깊숙이 들어갔다. 깊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했습니다, 황자님."
막 신학교에 들어선 순간, 또다시 시야가 점멸했다. 정체 모를 힘이 로베르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권능, 침범. 아, 왜 안 되는 거야?"
로베르는 몇 번이나 권능을 발동하려 했으나, 의식 안에서 차단된 기억을 파헤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로베르는 암흑 속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내 코어 봉인에 관한 비밀을 밝히려 온 거니, 신학교에서의 일은 딱히 알 필요는 없지만."
원래 목적을 상기하자 초조한 마음이 가셨다.
로베르는 새로이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전대 황후도 악마의 그릇이 될 뻔했지만, 실패하고 죽었다. 원래 교황의 첩자이자 숙부의 애인이던 어머니가 그 빈자리를 차지해 나와 율란을 낳았다. 그로 인해 아카키 형님은 꼼짝없이 사제가 됐고, 나를 혐오하게 됐다.'
로베르가 태어나기까지의 사건을 되짚어 보면, 아카키에게는 범인이 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대체 그때 율란의 이름은 왜 나온 거야? 따지고 보면 형님한테는 나나 율란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그 의문을 해소해 주겠다는 듯, 드디어 시야에 다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윽...."
날카로운 두통이 이는 탓에 로베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풍경이 로베르를 반겨 주었다.
"뭐야, 다시 황궁이잖아?"
본궁 앞에 모인 황족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너선은 초조한 얼굴로 연신 두 손을 비볐다.
그사이 시간이 꽤 흘렀는지, 하론은 어느덧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커 버린 뒤였다.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로베르와 율란 역시 어머니의 허리춤까지 올 만큼은 자라났다.
'한 십 년쯤 지난 건가. 이때는 율란이 훨씬 컸군. 나는 저 옷 때문에 더 작아 보이는 것도 같고.'
어린 로베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품이 한참 남는 옷을 입고 있었다. 바닥에 끌린 바짓단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쯧."
유리아는 그런 아들을 향해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율란이 곧장 로베르를 타박했다.
"왜 네 옷을 안 입고 오라버니들이 버린 옷을 주워 입어? 진짜 기분 나빠, 오라버니들도 그럴걸."
"나, 나는...."
어린 로베르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좀 말해!"
율란이 짜증스레 소리치며 어린 로베르의 어깨를 밀쳤다. 율란보다 한참 작은 로베르는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율란, 행동이 과하구나. 형제를 늘 기다려 주며 그 부족함을 감싸 주어야 한다고 배웠잖니."
하론이 어린 로베르를 일으켜 주며 자상한 목소리로 율란을 꾸짖었다.
율란은 괜히 어린 로베르를 노려봤다. 그러다 제 쌍둥이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기 옷이 아니라 형님들 옷을 입었다고? 굳이 왜...."
그렇게라도 그들과 형제라는 걸 드러내고 싶어서?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사 보려고?
어느 쪽이든, 어린 로베르는 철저히 실패한 듯했다. 그런 행동을 반길 황자는 아무도 없었다.
우웅-. 그때, 허공에 난데없이 신성 문자가 쓰였다. 이동 스크롤에서 본 것과 같은 글자였다.
황족들이 놀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환한 빛이 일더니,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카키, 황궁 안에서는 스크롤을 쓰면 안 된다니까. 그리고 이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도 되잖아."
"내가 내 집 좀 편하게 가겠다는데, 안 될 건 뭔데."
이내 빛이 걷히고, 법복을 입은 아카키와 아타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사제 놈이 왜 여기서 나와?"
로베르는 하마터면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앳된 얼굴들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보다 키가 두 뼘쯤 작았으나, 눈빛은 훨씬 또렷하고 밝았다. 표정에선 그 나이대 특유의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쩐 일로 내놓은 자식 마중까지 나오시고."
먼저 가족들을 마주한 아카키가 조소를 띤 채 고개를 까딱였다.
아타나스는 뒤늦게 황족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위대한 에피파네스 황가의 주인들을 뵙습니다."
"뭘 그렇게 격식을 차려, 됐다니까."
아카키가 아타나스의 등을 툭툭 쳐 몸을 바로 세우게 했다. 아타나스는 그를 향해 잠시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뭐야, 그렇게 서로 죽이느니 어쩌니 하더니. 존나 친해 보이는데."
로베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조너선이 애써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구나, 아카키 황자. 어서 오거라. 같이 온 분은 누구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타나시오라고 합니다, 폐하. 아카키 황자님의 뒤를 이어 특권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아, 그럼 자네가...."
"맞습니다, 교황이 기존의 법도를 뒤엎고 제 밑으로 들일 만큼 아끼는 새로운 신성 영웅."
"과찬이십니다, 전하."
"웩.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아카키는 예의를 갖추는 아타나스의 모습이 낯선지 있는 힘껏 헛구역질했다.
"초대도 받지 않고 궁에 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아타나스는 간신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황족들을 둘러봤다. 율란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유독 아타나스를 오랫동안 담았다.
'이때부터였나. 정말 그냥 생긴 게 마음에 들었던 거군.'
그 모습을 발견한 로베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너선이 아타나스에게 답하려던 차에, 아카키가 선수를 쳤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설마 내버린 자식이라고 그 정도 권리도 없는 건 아니겠죠. 이 궁에서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놈은 저 기분 나쁜 막내 놈 하나일 텐데요."
그가 어린 로베르를 삿대질하며 빈정거렸다. 반가움이 가득하던 어린 로베르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아카키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적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저게 그래도 폐하 친자이긴 한가 봅니다, 고작 이 정도 말에 눈물을 보이는 나약한 놈인 걸 보면. 내심 폐하와 숙부 사이를 끝장낼 시한폭탄이길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작정하고 화풀이할 생각으로 왔군.'
"흑, 히끅."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그 희생양이 된 어린 로베르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어린 로베르를 달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 부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침묵을 지켰다.
아카키의 뒤틀린 기대는 결코 사실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두 사람이 아카키의 앞에서 결백할 수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카키오, 대체 그 간악한 혀로 몇 사람을 모욕하는 거니. 걸핏하면 신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폐하를 곤란하게 만들더니 반성하는 기색이라고는 없고,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잠깐의 평화를 깨트리려 하는구나."
하론이 대신 나서서 아카키의 무례한 언행을 꾸짖었다. 아카키는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평화라고요? 황후가 죽고 황자가 볼모로 끌려가며, 황제란 작자는 평생의 충신인 아우의 여인과 놀아나는 이 궁의 어디에 평화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간신히 평화를 찾았단다. 네가 오기 전까지는."
하론은 그 언사가 대단히 모욕적이라는 표정으로 단칼에 답했다. 그러자 아카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전쟁을 일으킬 악마의 씨앗마저 얻을 수 있는 그 빌어먹을 평화를, 신에게 선택받은 내가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글쎄, 적어도 조용히 우는 이 아이보다 화를 내며 날뛰는 네가 더욱 위험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형님이 나처럼 살아 보십시오, 하루라도 화를 내지 않고 배길 수 있는지."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르니, 아카키오야. 그러니 철없이 굴지 말고 조용히 지내 주면 좋겠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걸 기억하렴."
하론은 단호하게 일갈하고는 황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황후 폐하께서 저런 무례한 발언에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만찬을 즐기러 가실까요, 어머니."
"...그래, 그게 좋겠다. 가시죠, 폐하. 2황자를 반기기 위해 오늘을 공들여 준비하지 않으셨습니까."
유리아는 하론의 옹호에 힘입어 간신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타나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주었다.
"아타나시오 사제는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습니다. 손님의 식사는 따로 준비하라 일러둘 테니 별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누구 마음대로...."
"황후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타나스가 발끈하려는 아카키를 말리며 공손하게 답했다. 황후는 발길을 돌리려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얹었다.
"그리고 궁에서는 이동 스크롤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음을 기억하세요. 신분이 오를수록 법도를 따르는 일은 더욱 중한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도 사제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금 유리아는 충고를 가장해 아타나스의 출신을 문제 삼고 있었다. 로베르는 그 사실이 의아했다.
'이 시점에서는 교황과 사이가 틀어졌나?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우는군.'
"다시 한번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황후 폐하."
아타나스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고개 숙였다. 이미 그런 식의 대우에 질릴 만큼 익숙해 보였다.
반면, 황후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카키는 한껏 표정을 구겼다.
"저의 무례를 탓할 용기가 없으니, 제 손님을 모욕하려 하시는군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황자."
"의도대로 궁의 얄팍한 평화를 깨트린 이 황자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손님을 가장 귀하게 대우하라는 게 황후 폐하의 가르침이었거든요. 그럼 오래 준비한 자리를 마음 편히 즐기시길."
"아카키 황자, 잠깐...."
조너선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카키를 불러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아타나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아카키를 뒤따랐다.
로베르는 두 갈래로 나뉜 가족들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이 함께 가야 하는 쪽을 금방 골라냈다.
앞서간 아카키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타나스에게 제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봤지? 우리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은 여자 옆에 붙어서 평화를 운운하는 형님의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론 황자가 지나칠 정도로 새 황후를 따르긴 하더라. 하지만 아카키 너와는 달리 지금의 황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그게 누구 때문인데. 다 저 악마 새끼 때문이잖아."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계속해서 아카키의 증오가 저만을 향하자 로베르는 슬슬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볼모로 끌려간 것도, 새 황후가 제 자식한테 정을 못 붙이고 형님한테 틈을 보인 것도, 형님이 그걸 알고 딱 붙어서는 유일한 위협인 나를 고립시키는 것도. 다 로베르 때문이라고. 저 새끼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그러나 아카키는 진심으로 모든 일이 로베르의 탓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뜻밖의 순간에 그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라버니, 나 신성력을 가지고 싶어. 그래야 아무도 날 저주받은 황자의 쌍둥이라고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도와줘, 응?"
열 번째 탄신연을 뒤로하고 아카키를 찾아온 율란은 코어를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다. 자신이 그 방법을 알고 있노라고.
[39]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9화. 버림받은 황자 (5)
"아카키, 로베르 황자님을 잘 대해 줘. 형제 중 유일하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이잖아."
궁에 머무는 내내 아카키가 로베르를 대하는 모습을 본 아타나스는 틈만 나면 그렇게 충고했다.
"난 부정한 결합으로 태어난 배다른 동생을 품어 줄 대인배는 못 돼. 그게 하론 형님이 저를 짓밟는 줄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헤실거리는 모자란 새끼라서 더더욱."
사실 로베르를 탓하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쯤은 아카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 빠지면 완벽해 보이는 가족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애처가가 된 조너선, 그 사랑을 받는 유리아, 그녀를 친모처럼 여기는 하론, 자상한 오빠를 따르는 율란.
아카키는 저를 교황청에 볼모로 보내 놓고 멋대로 화목해진 가족 앞에서 분노하다가도, 가끔은 왜 거기에 제 자리는 없을까 생각하곤 했다.
"좆같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어머니를 잊어 가는 스스로가 증오스러웠고, 자신 또한 어머니와 함께 철저히 버려졌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그럴 때마다 늘 구석진 곳에 머무는 로베르가 눈에 밟혔다.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자신보다 불쌍하고 불행한, 모두의 미움을 받아 마땅한 저주받은 막내 황자가.
그래서 아카키는 다른 가족들처럼 로베르를 미워하기로 했다.
로베르를 미워하는 동안 아카키는 잠시나마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자신도 그 가족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그건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율란의 열 번째 탄신연이 열렸다.
율란은 오직 황녀를 위한 화려한 연회를 뒤로하고 궁에 틀어박혀 있던 아카키를 찾아왔다.
"오라버니, 들어가도 돼?"
"율란이냐? 네가 웬일로 나를 찾아와?"
아카키는 왠지 들뜬 기분을 느끼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율란의 옆에는 늘 그렇듯 하론이 함께였다.
"형님은 또 어쩐 일로."
"율란이 네게 청하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홀로 둘째 오라버니를 만날 용기가 안 난다기에. 들어가도 될까?"
"...처음부터 제 허락은 필요 없었던 거 아닙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가세요."
아카키는 마지못해 불청객들을 안으로 들였다. 하론의 손을 잡고 아카키의 앞에 선 율란은 상상치도 못한 것을 선물로 요구했다.
"오라버니, 나 신성력을 가지고 싶어."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야?"
"그래야 아무도 날 저주받은 황자의 쌍둥이라고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도와줘, 응?"
율란은 아카키를 붙잡고 사정했다. 아카키는 차마 작고 가냘픈 손을 내치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코어라는 게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건가? 타고나는 거라면서."
소파에 드러누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베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아카키의 입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코어는 말 그대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표야. 각성 시기가 다를 뿐, 타고나는 거라고. 열 살까지 조짐이 없었다면 글렀다고 봐야...."
"코어를 만들 방법이 있대. 내가 알고 있어."
"뭐?"
"그렇지, 하론 오라버니?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쓰면 된다면서."
율란의 재촉에 하론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주먹만 한 크기의 원형 아티팩트였다. 얇은 은색 장식이 투명한 구를 감싸고 있었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장식은 황가의 문장을 연상케 했다. 교황청에서 배급하는 아티팩트와는 형태가 미묘하게 달랐다.
아카키는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전대 황제께서 돌아가신 숙부들과 함께 신성력을 보급하기 위한 연구를 하셨다는 걸 아니? 이건 그 연구의 부산물이란다."
하론은 황제의 정무를 도우며 여러 보관실에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연구 기록과 미완성된 아티팩트를 몇 개 발견했다고 했다.
'그런 연구를 교황청에서 가만히 뒀다고? 다른 숙부들이 다 죽은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로베르는 교황청과 황실의 대립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언제나 수많은 변절자를 낳는 법이었다.
로베르는 하론이 그중 하나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하론은 대의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을 제 편의대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아티팩트는 신성력을 응축된 형태로 보관해 코어를 대체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내 힘으로 채워 달라는 겁니까? 그런 다음에는요?"
"곧장 율란의 몸속으로 넣으면 된단다. 비슷한 아티팩트를 다뤄 봤을 테니 어렵지 않겠지?"
하론은 마치 그게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아카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 쳤다.
"무슨 식용 아티팩트라도 따로 있는 줄 아세요? 그건 이미 영혼의 형태가 악마처럼 변형된 빙의자를 정화하기 위한 겁니다. 그자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에 율란이 움찔 놀라며 하론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을 본 아카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형님이라면 이런 물건은 본인을 위해 쓸 것 같은데요. 신성력을 가진 저를 견제하기도 지치실 텐데, 왜 좋은 기회를 마다하십니까?"
"하하, 아카키오. 나는 그런 힘을 가진 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란다. 그런 힘을 가진 자들을 부리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지."
"미친놈. 교황이 1황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소문이 난 이유가 있군."
아카키는 하론의 면전에 대놓고 욕을 중얼거렸다. 하론이 화를 참으려는 듯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율란이 두 황자를 번갈아 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오라버니...."
"어린 누이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셈이니, 아카키오. 참 비정한 오라버니구나."
"그런 뭔지도 모를 물건을 누이 몸에 집어넣으려는 형님은 어떻고요. 애초에 제대로 된 완성품은 맞습니까? 그 연구는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흐지부지된 걸로 아는데요."
"비록 미완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구나. 그렇지, 율란?"
"...네, 오라버니."
율란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가득했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확실한 답이었다.
"네, 오라버니? 언제부터 하론 형님께 말을 높였다고."
아카키가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아티팩트를 하론에게 내던졌다.
퍽-. 하론의 어깨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아티팩트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윽...."
"오라버니! 이게 무슨 짓이야!"
하론이 어깨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율란은 다급히 하론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아카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론을 노려봤다.
"이봐, 형님. 사람을 등신 취급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아카키오. 우리가 너에게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한 거니?"
"성공하면 형님 손에 새로운 카드가 생기고, 실패하면 다 나한테 덮어씌워서 이참에 아예 치워 버리고. 어떻게 매번 반드시 이기는 선택지만 가지려 하냐, 비겁한 놈아."
"...."
율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오빠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른 아카키는 하론을 향해 모욕적인 손짓을 하며 쐐기를 박았다.
"꺼져, 내 주인이 되어 보기도 전에 물어뜯기기 싫으면."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결국 하론과 율란은 끝내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하고 물러가야 했다.
한편, 뜻밖의 상황을 지켜보게 된 로베르는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율란이 언급된 게 이런 이유였나. 하론이 율란을 이용해 아카키 형님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말이 되네. 하지만 이 일이 내 코어가 봉인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더군다나 아카키는 하론의 수상한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재고의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며칠 뒤, 하론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황후 유리아가 아카키를 불러내며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후궁의 알현실, 유리아는 하론을 제외한 모두를 물리고 조심스레 아카키를 맞이했다.
"황후께서 무슨 일로 저를...."
아카키와 그를 따라 들어선 로베르가 하론을 발견하고 동시에 표정을 구긴 그때, 유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카키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대뜸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하론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나머지 두 황자의 얼굴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를 부정하려는 듯 늘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던 황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은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2황자의 도움으로 율란에게 코어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안 되겠어요?"
아카키는 하론을 노려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너무 위험합니다. 잘못되면 율란이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로베르와 율란이 쌍둥이라는 것도 생각하셔야...."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지금의 삶이 비참하기에 드리는 부탁입니다! 로베르가 태어난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 본 적이 없어요. 그 악마 같은 놈이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요."
유리아는 저주받은 황자를 낳은 황후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은 것인지 한참을 토로했다. 그러고는 제발 자신과 율란을 이 비참한 삶에서 구해 달라고 빌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인해 가장 비참했을 진짜 황후의 자식에게.
그 순간, 아카키는 어쩌면 이것이 완벽한 복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율란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 우리 모녀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입니다. 그 가능성에 모든 걸 걸려 하니, 제발 도와주세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카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사실상 긍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유리아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만 일어나세요, 어머니. 바닥이 차가워요."
하론이 황후를 부축해 일으키는 사이, 아카키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찰나를, 로베르는 기어코 보고 말았다.
'무슨 생각이지? 나와 율란이 쌍둥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또 뭐고.'
로베르는 머지않아 그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 * *
얼마 뒤, 아카키는 첫 순회를 앞두고 수도에 들어온 구마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교구청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온 아타나스를 만났다.
"어이, 아타나스. 잠깐 시간 되냐? 개인 의뢰 때문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카키가 무언가 감춘 듯한 얼굴로 아타나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순간, 로베르는 오늘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라는 걸 직감했다.
"그래, 잠깐 괜찮아. 뭔데?"
"아, 귀찮게 의뢰인이 자식 문제로 이것저것 묻는데 제대로 공부를 했어야 말이지. 일단 열 살까지 아무 조짐이 없었다는 건, 사실 코어가 없는 거라 봐도 되냐?"
예상대로 아카키는 율란의 부탁과 관계있는 질문을 했다. 로베르는 숨죽인 채 둘의 대화를 들었다.
"사람마다 각성 시기가 다르긴 하지만, 열 살을 넘긴 사례는 없어. 코어 보유자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데 의뢰인의 자식이 쌍둥이란 말이야. 쌍둥이는 한 영혼을 둘로 나누어 태어난 존재이니 여러 변수가 있잖아?"
쌍둥이는 신성 전쟁 발발 이후 종종 발견되기 시작하며, 악마가 인간에게 남긴 흔적이라 불렸다.
루멘교에서는 쌍둥이를 한 영혼이 두 육신으로 나뉘어 태어난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고 일컬었다.
'쌍둥이가 그런 식으로 이어져 있다면, 율란 쪽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내 코어가 봉인된 건가?'
한 영혼을 공유하는 쌍둥이는 같은 마력을 공유하는 악마의 본체와 분신의 관계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악마의 경우, 분신을 공격해 본체에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했다.
로베르가 그럴듯한 추리를 하는 사이, 아카키는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이를테면 쌍둥이 중 한쪽만 코어를 가지는 게... 가능한가?"
"아니, 내가 알기로는 불가능해. 코어는 영혼에 깃든 힘으로 만들어지니까. 영혼을 반으로 나누었으니 힘은 약할 수도 있지만, 한쪽이 있다면 다른 쪽도 반드시 있는 게 맞아."
"그렇지? 그런데 그 쌍둥이는 한쪽만 코어를 가졌다는 거야.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지...."
"글쎄, 다른 한쪽에 악마라도 들었나? 빙의자의 코어가 망가지는 경우는 종종 있으니.... 대체 무슨 의뢰를 맡은 거야? 내가 같이 갈까?"
"그건 됐고, 하나만 더 묻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돼? 다들 빤히 아는 걸 나만 몰랐다고 하면 창피하잖아."
"웬일로 그런 걱정을 하지?"
아타나스가 수상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금방 표정을 풀고 대수롭지 않게 답을 주었다.
"근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들 쌍둥이를 악마의 흔적이라고 믿고 손가락질할 뿐, 깊은 관심은 없으니까."
쌍둥이들은 그 수가 극히 적고 악마의 낙인을 피하려 숨어 버리는 탓에 관련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교황청 기록실 깊숙한 곳에 그 흔적이 간단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쌍둥이 중 한쪽만이 코어를 가졌다는 이유로 곧장 다른 한쪽의 빙의를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으나, 어쨌든 그 사실을 증명할 기록이 있긴 하단 거지."
"그래. 오히려 기록을 보지도 않은 네가 거기까지 생각한 게 신기한데."
"하하, 너한테 머리 굴리는 게 옮았나 보지.... 역시 네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아타나스. 이미 해결했거든."
그렇다는 건, 율란의 신성력 각성은 로베르의 저주를 공고히 할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아카키는 그 증거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게 구해 달라고 빌지는 말았어야죠, 황후 폐하. 그게 제발 마지막 희망까지 부숴 달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날, 아카키는 교황청의 기록실로 숨어들어 끝내 아타나스가 말한 기록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숨겨 둔 채 율란을 찾아갔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선물을 안겨 줄 시간이었다.
[4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40화. 버림받은 황자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