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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0화. 신성력 훈련 (2)

2황자 아카키오가 거주하는 루비궁에는 오래된 규칙이 두 가지 있다.

사제와 성기사 등 모든 성직자의 출입을 금할 것.

궁의 주인이 침실로 들어가면 방문객을 받지 않을 것.

"1황자 전하 드십니다!"

그러나 오늘, 예정에 없던 하론의 행차로 기어코 규칙이 깨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비궁의 사용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쩌지? 하론 황자님을 돌려보낼 수도 없고...."

"우선 아카키 황자님께 소식을 전해 드려. 그 여자라도 빨리 내보내야 할 거 아니야!"

아카키의 시종이 다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하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저, 전하."

시종은 식은땀을 흘리며 하론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불안한 시선이 침실을 향하는 것을 눈치챈 하론이 살짝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다. 혈기 가득한 주인을 둔 탓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아카키 황자님께 소식을 전할 테니, 전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면...."

"아, 아카키."

그때, 안쪽에서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종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하론이 싸늘하게 웃었다.

"괜찮으니 문을 열어 주렴. 아카키오는 딱딱한 자리를 아주 싫어하는 아이잖니. 괜히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어."

'지금 문을 여는 게 더 심기를 거스르는 일일 텐데요!'

그러나 하론은 뜻을 물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1황자를 거스를 힘이 없는 시종은 눈물을 머금고 문고리를 잡았다.

"아, 아카키 황자님. 1황자님께서 드십니다."

"뭐?"

날카로운 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머! 화, 황자님!"

아카키와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시녀가 다급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내가 방해한 걸까?"

"아, 안, 아니요. 죄, 죄송...."

사제와의 금지된 애정 행각을 하필이면 1황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예견된 불행을 그리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가 봐. 어차피 없던 일이 될 테니 걱정 말고."

아카키가 반쯤 벗겨진 셔츠를 다시 입으며 짜증스레 말했다. 시종은 그녀를 챙겨 금방 침실을 떠났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하론은 경멸이 담긴 눈빛을 굳이 숨기지 않고 아카키를 내려다봤다.

"이제 하다 하다 어머니의 시녀와 붙어먹어? 오늘부로 저 여자를 궁에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퇴직금이라도 두둑이 챙겨 주세요. 죄 없는 사람을 쫓아내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이셔야죠."

"신을 모시는 사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지?"

"정 그러시면 이 아우의 죄도 함께 물으시든가요."

아카키가 비웃듯 말했다.

제 행실이 문제가 되어 교황청과 갈등이 생기면, 하론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순간 하론의 주먹 위로 힘줄이 솟았다. 하론은 주먹을 더 세게 쥐며 간신히 분노를 삼켰다.

'애쓰는군.'

아카키는 실소를 흘리며 탁자에 놓인 파이프 담배를 집었다. 그 모습을 본 하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굳이 숨기지도 않는구나. 애초에 넌 다시 순회에 나서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여태껏 궁에 있지?"

아카키는 답을 줄 의사가 전혀 없는 나른한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서로 길게 말 섞고 싶지 않은 건 피차 매한가지 아닙니까."

"그래, 그편이 낫겠다. 아타나시오 사제가 로베르의 스승이 된 건 알고 있니?"

"로베르의 스승이 탐나면 폐하께 가서 청할 일이지,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알면서도 망아지처럼 날뛰지 않은 게 의외구나. 아, 하긴 그는 네가 형제처럼 여기는 친우였지. 너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겠어."

하론이 나긋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아카키는 말없이 공중으로 연기를 흘려보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글쎄요, 형제다운 형제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나저나 형님은 반대할 이유가 있으신가 보죠?"

"이것이 성하의 뜻인지, 폐하의 뜻인지에 따라 다르겠지. 어느 쪽이든 성가신 건 마찬가지지만."

"아, 그래서 제가 알아서 둘을 갈라놓기를 바라셨나 봐요. 아쉽게도 저는 교황의 명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처지라서요."

"역시 성하의 뜻이었나."

하론이 중얼거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폐하가 로베르에게 힘을 실어 줄까 봐 그리도 불안하셨습니까."

생전 오지 않던 루비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하론은 아카키에게 자신의 불안을 들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베르에게 정치적 파트너라도 생긴 줄 알았나? 교황이 아타나스를 보내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니 그런 오해를 하지.'

아카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내내 마음 졸였을 하론이 우습기만 했다.

"아타나스가 로베르의 감시관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속이 시원하시겠네요. 교황청이 멋대로 황족을 부리는데도 분노하기는커녕 엉뚱한 생각만 하시니. 숙부의 걱정이 이해가 갑니다."

"대공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겠지. 굳이 먼저 소식을 전하지는 말렴."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왜 이래, 아카키오. 다 잊은 사람처럼. 로베르에 관해서만큼은 한배를 탄 사이잖니."

하론은 아카키에게 말려들지 않고 도리어 그를 도발했다. 아카키의 푸른 눈동자가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

"...무슨 뜻입니까?"

"돌이켜 보면 너도, 나도 로베르에겐 참 가혹한 형이었다는 뜻."

아카키의 얼굴이 한껏 구겨지는 걸 보며 하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의미 없는 반항은 그만두고 어서 떠나지 그래. 형 된 도리로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카키는 이만 가려는 듯 뒤도는 하론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러다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님. 어제가 어머니 기일이었던 건 아세요?"

하론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이상한 말을 하네. 제국의 황후는 여전히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시잖니. 우리의 어머니는 그분이란다."

"자기 자식도 내팽개치는 그 여자가 형님을 진짜 자식으로 여길 거라고...."

아카키가 홧김에 막말을 내뱉은 그때, 하론이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갔다.

쿵. 하론은 그것을 바닥으로 던지더니 구둣발로 매섭게 짓이겼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가 사그라졌다.

"아카키오, 멍청하게 굴지 마라. 두 명의 어머니를 섬길 수는 없어. 그러다가는 둘 다 잃게 될 거다."

"그게 두려우시면, 형님은 형님의 어머니를 섬기세요. 저는 제 어머니를 그리워할 테니까."

"그렇다고 로베르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고. 그 아이는 죄가 없잖니."

"...하!"

아카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론은 온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아카키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가,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금방 다시 힘을 풀었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길 바란다, 아카키오."

그 정반대의 말이 하론의 진심이라는 것을 아카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반드시 그러도록 하지요, 형님."

그럼에도 그는 모르는 척 이를 악물고 웃어 보였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황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 * *

쿠웅, 쾅! 신성한 힘이 요동치며 거대한 태풍이 되어 응접실 안을 쓸어버렸다.

방 안에 성한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고서야 비로소 로베르가 가진 코어의 틈새가 막혔다.

아타나스는 더 이상 마력이 코어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나가떨어졌다.

'이만한 힘을 쓰는 건 오랜만이네. 성역에 영향이 갈 정도인가.'

아타나스는 저를 감싼 막이 흐려진 걸 확인하고는 애써 숨을 골랐다.

반면, 로베르는 바임의 마력을 빼앗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만함을 느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듯한 불쾌한 통증이 싹 가시고, 늘 무겁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이상한 건 없습니까? 전처럼 뭔가 보였다거나."

"아니? 딱히.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해 주다니, 다시 봤어. 너 정말 진심으로 교황청이 망했으면 하는구나?"

힘에 취해 잔뜩 신이 난 로베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댔다. 아타나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 성의를 봐서라도 당분간 마력은 쓰지 마십시오. 순회 날까지 매일 최선을 다해 훈련하시고요. 아셨습니까?"

"훈련을 왜 해? 네가 이만한 힘을 줬는데, 그냥 잘 쓰면 되지."

"...이렇게 빨리 사람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네요."

로베르가 여전히 이 모든 일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새삼 깨닫자, 진심으로 그에게 퍼 준 힘을 회수라도 하고 싶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겁니다. 좋은 코어를 가졌다고 하루아침에 악마를 때려잡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라고요."

"기껏해야 악마를 몇이나 잡아 봤다고 나를 가르치려 들어? 이 몸은 말이다, 마왕의 심장을 가지자마자 탐욕 일족의 정예군을 홀로 쓸어버렸거든. 너 같은 평범한 인간들과 비교하면 곤란하지."

"남의 힘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주제에 으스대는 꼴이란."

아타나스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빈정거렸다.

"이제 그냥 막 나가자는 거지. 이참에 네 힘으로 널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볼까?"

로베르는 금세 싸늘해진 눈으로 아타나스를 빤히 바라보며 아티팩트의 파편을 발로 짓뭉갰다.

두 사람이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 가던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안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나서...."

"앤디냐? 들어와."

로베르는 응접실을 치우게 할 요량으로 앤디를 불러들였다.

철컥. 그때, 아타나스가 손가락을 까딱여 걸쇠를 다시 굳게 걸어 잠갔다.

"어, 어. 이게 왜 안 열리지? 황자님, 잠시만요...."

바깥에서 당황한 앤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이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그러나 아타나스는 뻔뻔한 얼굴로 계속 문을 막아 두고 있었다.

"뭐야? 진짜 한판 하자고?"

"저 시종은 믿을 만한 자입니까?"

"그렇게 만들었지. 쟤도 내 계약자거든. 물론 너처럼 합의된 건 아니고, 모르는 사이에 계약당한 것에 가깝지만."

"...노예 계약이란 뜻이군요. 아무튼 마침 잘됐습니다. 연습 삼아 시종과 대련을 해 보면 되겠네요."

그 말과 함께 문이 세게 열렸다.

우당탕! 문고리를 잡고 있던 앤디가 요란하게 넘어지며 등장했다.

"뭘 해?"

"네? 제가 뭘 한다고요? 그, 그보다 방 꼴이 대체 왜...."

로베르와 앤디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아타나스는 응접실을 보고 잔뜩 울상이 된 앤디를 외면했다.

"가르친 게 뭐 있다고 벌써 싸우래?"

"황자님이 힘에 대해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실전을 통해 익히는 편이 더 빠르지 않겠어요? 무엇보다 그토록 자신이 넘치시니 증명할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 거면 전처럼 성기사를 데려다 쓰면 되지, 저런 아무 힘도 없는 한낱 인간을 상대로 뭘 증명하란 거야?"

노골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에도 앤디는 민망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타나스는 그런 앤디를 힐끗 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숙련된 상대와 맞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이제 막 신성력을 각성하셔서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따르니까요."

"하, 하지만 황자님은 이미 성기사 결투에서 이기셨는데요...."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황자님."

그때는 마력이었고, 지금은 신성력이잖아. 망할 마왕 놈아. 아타나스가 내뱉지 않은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뭐, 그러든가. 나야 좋지. 훈련을 거저먹을 수 있으니까."

"만약 황자님께서 승리하시면 오늘 훈련은 그걸로 끝입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죠."

"저, 저기. 제 의사는...."

"그렇단 말이지. 한 입으로 두말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가자, 앤디."

앤디의 동의를 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앤디는 강제로 로베르의 손에 이끌려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쨌든 훈련이 되어야 하니, 황자님의 시종에게는 제 검을 드릴 겁니다."

"준다고 저놈이 쓸 수는 있겠냐?"

로베르는 검을 들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 드는 앤디의 앙상한 팔목을 내려다봤다.

"쓸 수 있게 해야죠."

아타나스는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신성력을 머금은 성검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21]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1화. 신성력 훈련 (3)

자수정궁의 연무장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 탓에 그곳의 상태는 망가진 응접실만큼이나 엉망이었다.

먼지가 쌓인 무기 거치대는 텅 비었고,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기둥 곳곳에 감긴 거미줄은 그물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크고 길었다.

"...가관이군요."

아타나스는 혀를 차며 로베르에게 투명한 반원 모양의 아티팩트를 건네주었다.

"우선 검을 꺼내는 것부터 시작하죠. 연습용 하급이니 별로 어렵지도 않을 겁니다. 단, 신성력으로 꺼내세요."

"신성력이 아니면 뭐겠어? 그대는 다른 힘으로 꺼내 본 적이 있나 보지?"

로베르는 아타나스가 눈빛으로 건네는 욕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제 안을 가득 채운 힘을 움직이려 했다.

'마력이랑 원리는 같겠지, 뭐.'

예상대로 코어의 힘을 손안에 모으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티팩트에서 검 손잡이를 꺼내는 데 성공했을 때만 해도 로베르는 의기양양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아무 이유 없이 힘의 출력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뭐야?"

간신히 검날까지 만들어 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사이 아타나스는 작은 성검이 달린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생각만큼 안 풀리시나 봅니다, 전하."

발끈한 로베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타나스의 손에는 악마의 심장까지 단번에 베어 낼 법한 매서운 검이 들려 있었다.

"야, 야, 그건 반칙이지."

작은 구슬이 알알이 박힌 줄이 백금색 손잡이를 감쌌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이 검날을 타고 흘렀다.

"이걸 쓰시면 됩니다."

아타나스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앤디의 손에 검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구슬이 박힌 줄이 앤디의 손등과 검 손잡이를 단단히 묶었다.

"지금부터 황자님의 시종이 제 검을 놓치게 만들면 됩니다. 그때까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겁니다. 어쨌든 이건 검을 든 결투니까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아, 한 가지 빠트린 게 있네요. 저는 맞으면서 배우는 게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아들었으면 시작하세요."

로베르보다 먼저 그 뜻을 알아들은 앤디가 심호흡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화, 황자님. 가겠습니다."

뜻밖의 기회를 얻은 앤디는 그간의 밀린 설움을 풀어낼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망할 인간 놈들. 절대복종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니, 이참에 가르쳐 주지."

로베르가 이를 갈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앤디가 검을 앞세워 돌진해 온 순간, 로베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저건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좆 된다.

앤디의 검이 일직선으로 들어오며 정중앙의 급소를 노렸다. 로베르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돌려 공격을 피했다.

"와, 앤디. 해보자는 거냐?"

"그, 그게, 제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검이 멋대로...."

당황한 얼굴의 앤디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검이 그대로 로베르의 옆구리로 들어왔다.

치잉-. 로베르는 간신히 검을 옆으로 세워 공격을 막아 냈다.

"어?"

그러나, 막아 내기엔 너무 강한 힘이었다. 로베르는 거대한 위력에 떠밀려 그대로 연무장 구석으로 날아가 꽂혔다.

쾅! 굉음과 함께 로베르는 검을 놓치고 바닥을 굴렀다.

"켁, 쿨럭!"

그러기를 무섭게 검이 또다시 로베르를 향해 튀어 나가려 했다.

"이, 이게 왜.... 아타나시오 사제님! 대체 제게 뭘 주신 겁니까!"

앤디는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애처롭게 소리쳤다.

바깥 기둥에 기대어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아타나스가 고개를 들었다.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제 신성력의 극히 일부가 든 검입니다. 성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서, 성검이요? 저, 저희 황자님이 사제님의 힘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당장 멈춰 주세요! 이러다 제 손으로 황자님을 죽이기라도 하면 제 인생은...!"

앤디는 검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악을 썼다. 아타나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는 로베르를 힐끗 쳐다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은 그 정도로 안 죽습니다."

로베르에게는 이미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신성력이 들어간 뒤였다.

그가 힘을 다루는 법을 깨닫기만 한다면 성검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위험한 건 당신일지도.'

그 사실을 모르는 앤디는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성검의 움직임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성검은 앤디의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로베르를 향했다.

"화, 화, 황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쿵, 앤디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성검이 꽂혔다. 조금 전까지 로베르가 뒹굴던 바닥에 균열이 일었다.

"넌 끝나면 뒈졌어."

로베르는 그사이 재빨리 검을 주워 앤디와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눈으로는 앤디의 움직임을 좇으며 검에 힘을 실으려 했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렇게 힘이 넘치는데, 왜 발산이 안 되냐는 말이야. 내가 뭘 놓치고 있지?'

아무리 애를 써도 제 안의 낯선 힘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 사제. 보고만 있지 말고 선생질 좀 해 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원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숨 쉬는 거랑 비슷하거든."

"이미 알고 계시네요.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타나스의 무성의한 답변과 함께 로베르의 머리 위로 매서운 검날이 떨어졌다.

"너한테 물은 내가 등신이지."

촤악-. 로베르는 흙을 집어 앤디의 얼굴로 뿌렸다.

"악!"

앤디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눈을 감쌌다. 일순 검이 방향을 잃은 순간, 로베르는 망설임 없이 앤디의 손목을 노렸다.

치잉-. 그러나 성검을 둘러싼 신성한 막을 뚫기는 역부족이었다. 로베르의 검으로 강한 반동이 전해졌다.

"쳇."

로베르는 그 힘을 정면으로 받아 내는 대신 검을 놓아 버렸다. 쾅! 주인을 잃은 검이 힘없이 날아가 기둥에 박혔다.

"검을 버려...?"

아타나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사이 로베르는 앤디가 다시 눈을 뜨기를 기다리다가, 다리를 감아올렸다.

퍽! 그의 발끝이 땅을 세게 스쳤다. 흙바람이 일며 앤디는 무방비 상태에서 모래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악! 황자님!"

크고 작은 알갱이들이 눈알을 사정없이 긁어 댔다. 앤디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눈을 비볐다.

타닥-. 로베르는 바닥을 딛고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 기둥에 박힌 제 검을 회수해 앤디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숨 쉬듯이 더러운 방법을 쓰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싸움에 더러운 게 어딨나. 승패만이 있지."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승리할 수 없으리라는 건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대로 하라고? 원래 하듯이, 그러니까 숨을 쉬듯이....'

로베르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문득 과거 이슈타르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마왕님은 제게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살아 숨 쉬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엇도 마왕님을 가로막지 못할 겁니다."

그래, 숨 쉬는 거랑 같은 거잖아?

내 안의 힘을 느낀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한다.

그 힘이 내 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주 당연해질 때까지.

이미 지금의 몸으로 바임을 죽이고 성기사단을 격퇴했다. 힘이 드나드는 문은 진즉 열려 있었다.

마침내 방법을 깨달은 로베르는 차분하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검에 신성한 기운이 차올랐다.

지이잉-. 그 힘에 감응한 아타나스의 성검이 크게 진동했다.

"이, 이건 또 왜 이래. 사제님! 제발 저 좀 구해 주십쇼!"

앤디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검에 끌려가며 애타게 소리쳤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마왕은 마왕이라는 건가.'

오늘의 훈련이 곧 끝나리라는 걸 예감한 아타나스는 벗어 뒀던 장갑을 다시 꺼냈다.

치이잉-! 두 검이 다시 한번 부딪쳤다. 사방으로 검파가 흩어지며 거센 바람이 연무장을 휩쓸었다.

"이제 내 몫을 할 차례인가."

아타나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너머의 누군가를 정확히 응시했다.

'쥐새끼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군.'

타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 * *

낯선 인영이 자수정궁의 외부 복도를 가로질렀다.

'아타나스가 나를 봤어.'

도망치는 동안, 오직 그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헉, 허억-."

그녀는 연무장에서 충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겨우 멈추어 섰다. 그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치잉-.

그곳에는 여전히 매섭게 검을 부딪치고 있는 로베르와 앤디가 있었다.

"어?"

자신이 한 발짝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퍽!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떠밀었다. 그녀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으로 넘어졌다.

벗겨진 구두 한쪽이 굴러가는 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아...."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왜 여기 계십니까."

그러나 늘 그렇듯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타나스와 마주했을 때, 율란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여기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황녀님."

아타나스의 두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서늘한 살기마저 품고 있었다.

"저, 저는 그냥...."

한껏 위축된 율란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꺾인 팔과 발목에서 뒤늦은 고통이 밀려왔다. 율란은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황녀는 아닌가.'

하필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 수상쩍었지만, 위험한 목적을 가졌다면 자신이 있는 곳에 호위 하나 없이 왔을 리가 없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물 고인 눈에서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감정만 가득했다.

아타나스는 율란의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손을 거두려 했다.

그때, 뒤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신이시여, 여기에 감히 당신의 자식을 위협하는 자가 있습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면, 그건 강력한 주문을 쓸 때나 필요한 시동어였다.

"그러자 루멘께서 말씀하시길. 그자에게는 나의 가호가 닿지 않을지니, 신의 이름으로 벌하라."

기어코 주문이 발동되었다. 공격을 위해 쓰인 신성 문자들이 긴 띠처럼 아타나스의 주변을 휘감았다.

잠시 정지된 세상 속에서, 기둥 사이로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아카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키는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한 아타나스를 보며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떨어져, 새끼야."

펑! 아타나스의 곁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아타나스를 감싸고 있던 막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러자 신성 문자들이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사방에서 내리꽂혔다.

'미친놈, 자칫하면 황녀까지 휘말릴 텐데....'

아타나스는 급한 대로 무언 주문을 외웠다.

황녀가 아카키의 옆으로 이동한 찰나, 단검 하나가 아타나스의 이마를 스쳤다.

그러나 나머지 검들은 아타나스에게 닿은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가루가 된 채였다.

"쯧."

아카키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율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지 못한 율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타나스? 언제 거기에...."

"정말 저를 죽이기라도 하시려고요?"

아타나스는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흰 장갑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꺅! 아카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율란은 그제야 아카키를 발견하고 또 한 번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둘째 오라버니, 겠지."

아카키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율란과 나란히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미쳤.... 아, 아니. 뭐 하는 거야?"

생전 하지 않던 둘째 오빠의 친근한 행동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떨쳐 내려 했다.

"가만히 있어. 너 이 오라버니한테 방금 목숨을 빚진 거거든. 안 그러냐? 아타나스."

아카키가 한껏 이죽거리며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숨겨진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저는 로베르 황자님의 스승으로서 본분을 다한 것뿐입니다."

"황녀를 겁박하는 게 네 본분인가?"

"침입자의 위협으로부터 황자님을 지키는 것이...."

"지랄하지 말고. 너라면 진즉 알아봤을 거 아냐? 황녀인 걸 알고도 신성력까지 써 가며 위협했지. 내 말이 틀려?"

금세 인내심이 바닥난 아카키가 형식적인 답변을 끊고 끼어들었다.

'황녀가 있는데도 무작정 공격해 놓고, 황녀를 위해 화를 낸다. 내게 시비를 거는 게 취미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부자연스럽군.'

아타나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코어를 봉인할 만큼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 마력을 수급할 수 있는 자, 오랫동안 곁에서 로베르 황자를 지켜봐 온 자.

모든 조건이 아카키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아타나스는 범인을 확신하지 못했다.

'형제에게 일부러 해를 끼칠 위인은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어딘가 초조한 듯한 얼굴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아카키를 보자 새로운 의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황녀가 아니라면, 너인가?

[22]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2화. 신성력 훈련 (4)

"황녀인 걸 알면서도 공격한 것이 맞냐고 물었다, 아타나시오."

아타나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카키가 다시금 물었다. 아타나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 주제에 아직도 고개가 빳빳한 이유는 뭐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오해했습니다."

율란은 쩔쩔매며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아타나스를 만류했다.

"아, 괜, 괜찮아요. 제가 괜히 아타나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그만...."

그것이 그녀가 전속 시녀와 호위들까지 따돌리며 자수정궁으로 숨어든 이유였다.

그 이유를 제 입으로 직접 밝히게 된 지금, 율란은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이 정신 나간...."

아카키는 율란에게 한마디 하려다 수치심에 물든 얼굴을 보고 간신히 삼켰다.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또다시 아타나스를 향했다.

"황녀를 죽일 뻔한 자가 하는 사죄라기엔 너무 약소한데. 조금 더 성의를 보이지 그래."

"평소에는 나한테 신경도 안 쓰면서 오늘따라 왜 이래! 아, 아타나스. 전 괜찮아요."

"동의 없이 황족의 몸에 손을 댄 것도 중죄인데, 심지어 저놈은 널 위협하기까지 했어. 그런데 이 정도 요구도 못 하나?"

"아타나스는 내가 침입자인 줄 알았다잖아! 괜히 오버해서 이번 일을 문제 삼기만 해 봐, 나도 가만히 안 있어."

율란이 대신 반발하는 사이, 아타나스는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황녀의 구두를 주웠다.

그러고는 율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구두를 다시 신겨 주었다.

"더한 사죄를 원하십니까, 전하."

아타나스의 손끝이 살짝 스치자, 발목의 부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반면 율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 아니요. 좀 놀라긴 했지만... 정말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그녀는 횡설수설하다가 갑작스레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아카키는 율란의 뒷모습에 대고 기가 막힌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게 결혼할 나이가 돼서까지 저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 한숨밖에 안 나온다."

"황녀님께 그 정도로 마음을 쓰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그럼 무작정 공격하기 전에 보호 주문이라도 하나 걸어 주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내 공격이 너한테 닿기나 했겠냐?"

아타나스가 황녀의 보호를 우선할 것을 알고 일부러 노렸다는 의미였다.

"제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쩌시려고요."

"생각 안 해 봤는데. 아무리 너라도 직계 황족을 두 번이나 다치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거라면 이미 두 번을 채웠는데. 속에 마왕이 든 황자도 황족으로 친다면.'

그러나 아타나스는 굳이 자신의 죄를 밝히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황녀를 보호하지 않았기에 아카키는 자신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건 확실히 그다운 발상이었다.

신물이 날 정도로 걸핏하면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평소의 그와 다르지 않았다.

'잘못 짚었나.... 그래도 확실히 할 필요는 있겠지.'

아타나스는 피로 붉어진 시야에 제국의 2황자를 담았다.

"황자님은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오면 안 될 곳을 온 쪽은 따지자면 너 아닌가. 로베르의 스승이 됐다지?"

아카키가 시비조로 대꾸하며 본론을 꺼냈다. 앞선 질문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소식이 느리시군요. 그래서, 이제라도 저를 로베르 황자님 곁에서 쫓아내시려고요?"

"하하, 왜 다들 내가 이 소식을 반기지 않을 줄 알지? 그저 하나만 기억해. 저 모자란 동생 놈을 다치게 한다면, 숙부가 반드시 너를 죽일 거라는 거."

"황자님과는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난 숙부와는 입장이 좀 달라서. 나야 그냥 재미있으면 그만이거든. 있지도 않은 저주받은 놈을 무슨 수로 찾아서 정화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해 봐라. 저 모자란 황자를 끌고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모자란 황자라.... 여전히 로베르 황자님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각성 후로 싹 달라져서 제법 재밌긴 했다만, 아쉽게도 오래가지는 못할 테니까."

신성력 각성자가 적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각성 뒤 취한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아카키는 최근 로베르의 행동들을 그렇게 이해했다.

"로베르처럼 억눌려 살던 놈이 갑자기 꽤 강한 힘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구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로베르 황자님의 변화를 앞장서서 떠든 게 황자님이라고 들었는데요."

"그야, 적당히 장단 맞춰 주는 편이 서로 즐겁잖아. 어쩌면 신이 저놈에게 기적을 내려 준 것도 같은 이유일지도."

정작 그렇게 말하는 아카키는 전혀 즐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베르 황자님을 얕보시는군요."

"너는 생각보다 로베르를 높게 평가하나 보지? 왜, 네가 준 검을 쉽게 부순 게 충격이었나?"

"그저 제대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타나스는 피 묻은 장갑을 벗으며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자신의 힘을 양껏 먹어 치운 악마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쓸 수 있다면....'

로베르는 언젠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를지도 몰랐다. 그건 아타나스에게는 퍽 달가운 일이었다.

눈앞의 황자에게는 아니겠지만.

"얼마나 대단한 선생질을 하는지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헛걸음한 모양이야. 저놈은 왜 기사들을 놔두고 시종이랑 저러고 있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베르 황자님을 겨눈 것이 제 검이라는 게 중요하죠, 상급 악마의 심장 정도는 우습게 베어 내는."

아카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제 동생이 상대하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봤다.

로베르는 널리고 널린 연습용 아티팩트로 아타나스의 검과 대등하게 겨루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선 일말의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베르는 더 약한 검을 쥐고도, 제 쪽이 더 강자라고 확신했다.

'저게 진짜 로베르라고?'

아카키는 정말로, 최근 벌어진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다.

"이제야 숨이 아주 잘 쉬어지는군. 이걸로 끝이다, 앤디."

로베르가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러, 자신이 단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검을 쉽게 꺾기 전까지는.

쿵. 아타나스의 검이 바닥을 울렸다. 빛을 잃은 구슬이 그 주변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카키는 끊어진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쌍하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은 로베르라니.'

이제 정말 그런 로베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자, 이유 모를 공포가 엄습했다.

"...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냐?"

"수작이라뇨."

"모르는 척하지 마. 잠깐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변한다고? 네가 뭔가 한 거지. 아, 네 신성력을 나눠 주기라도 했나?"

"수작은 제가 아니라, 궁 안의 누군가가 부렸던데요."

그리고 아타나스는 기어코 아카키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 둔 것을 파헤치려 들었다.

"...뭐?"

"로베르 황자님은 원래 힘을 되찾은 것뿐입니다. 제가 도움을 드린 것은 맞으나, 앞서 누군가의 방해가 없었다면 이보다 훨씬 빨랐겠죠."

"네가, 지금 감히 황족을 모함해? 이번에는 또 내 곁의 누굴 죽이려고...."

여유를 잃은 아카키는 순간 날것의 감정을 훤히 드러냈다.

"봤냐, 아타나스! 뭐야, 어디 갔어?"

아타나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를 찾는 로베르를 등지고 아카키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후 폐하의 기일은 잘 보내셨습니까."

아카키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위험한 발언은 삼가라. 제국의 황후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

"황자님께는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뭘 안다고...."

"황자님의 생각보다는, 많은 것을요."

아타나스는 그가 그 이유로 배다른 동생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고 있었다.

저주받은 황자의 불행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이 동정했다는 것도.

어느 쪽이든, 그건 로베르가 바라지 않은 것이었다.

"'불쌍한 로베르, 잘해 봐라. 그래 봤자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만.' 대충 그런 생각이었다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그간 즐거우셨겠네요."

아타나스는 연무장에서 제 형들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린 황자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카키는 로베르가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 줄만 알았을 것이다. 감히 무언가를 바라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위협할 리가 없는 존재로.

그러나 그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이까짓 황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대공이 불쌍해질 지경이군요."

"웃기지 마라,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냥 로베르가...."

"보세요, 그렇게 무시하던 동생이 황자님을 앞섰습니다. 그런데 황자님은 대체 언제까지 그대로 서 있을 겁니까?"

"...."

"제발 철 좀 드세요, 전하."

오랜 치부를 들켰음을 직감한 아카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아타나스는 미련 없이 그를 지나쳐 연무장으로 향했다.

'역시 범인은 하론 황자였나.'

궁 안의 누군가라는 말을 바로 황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하론이 할 법한 말을 입에 담는다니.

하론이 범인이고, 자신은 공범이거나 적어도 그 일을 모르지 않는다고 자백한 셈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치심은 절대 못 견디는 인간이다. 자극해 뒀으니, 조만간 동생을 찾아와 고해성사라도 하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게 된다. 아타나스가 예상치 못한 형태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 * *

"아타나시오 사제님이 막내 황자의 스승이 되어 함께 순회를 나선다니요? 저희도 감히 꿈꿔 보지 못한 일을...."

소식을 들은 하급 사제와 부제들은 크게 분개했다. 평소 아타나스를 추종하는 그들은 로베르가 자신들의 기회를 가로챘다고 여겼다.

반면, 교황청 건물의 고층에 마련된 응접실에서는 전혀 다른 대화가 오고 갔다.

"귀족들 앞에서 보란 듯이 3황자를 인정해 준 것도 모자라 스승이 되었다고? 뻔하지, 이곳에서는 한계가 보이니 새로운 줄을 잡은 게야."

수도의 교구를 관리하는 나이 든 주교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하, 출신부터 미천한 평민 사생아 따위가 그 나이에 그만한 위치에 올랐으면 신의 은혜에 눈물 흘리며 감사할 일이지, 대체 뭘 더 바란답니까? 염치도 없는 놈 같으니."

특권 사제 펠릭스가 목소리 높여 맞장구쳤다.

그는 화이트 백작가의 둘째로, 신학교 출신 사제였다.

신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내로라하는 가문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평민 이하의 신분으로 특권 사제가 된 아타나스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펠릭스는 유별날 정도로 아타나스를 싫어했다.

"어릴 때 그놈 싹을 잘라 놨어야 했습니다. 아카키 황자만 아니었어도...."

"하하, 그때 싹을 자르지 못한 것이 너무 크게 자랐군요.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신성 영웅의 환생으로 통한다죠?"

그때, 그의 뒤편에서 웃음기 어린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짙은 푸른빛 머리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오, 오셨습니까, 예하."

그들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추기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루시안에게선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안은 금색 비단으로 지어진 옷자락을 흩날리며 조용히 그들을 지나치더니, 펠릭스의 앞에 멈추어 섰다.

"펠릭스 형제님?"

"추기경 예하를 뵙습니다."

"사실 저도 형제님과 같은 생각을 했답니다. 더 나아가 언제나 그를 의심했죠."

뜻밖의 말에 펠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이십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예하께서 유독 그와 가까이 지내시는 듯하여...."

"의심 가는 자일수록 더 가까이 두어야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성하께서도 같은 뜻인 줄만 알았는데, 조금은 다른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타나시오는 나의 시대를 빛낼 영웅이다. 그러니 괜한 시샘은 그만두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렴.

'물론 앞뒤로 정신 나간 소리를 덧붙이긴 했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의도적으로 교황의 말을 일부만 전달한 효과는 굉장했다.

"정에 가려 혜안이 흐려지신 것 아닌가. 어찌 그자를 그렇게까지...."

"이러다 추기경 자리까지 주려 하시겠네. 힘 있는 아랫것은 채찍으로 먼저 다스려야 하는 법이거늘."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탄식과 함께 교황을 향한 우려 섞인 말들이 번져 갔다.

모든 의심은,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었다.

"왜, 제가 아니라 아타나스를...."

펠릭스의 눈동자에 깊은 증오와 열등감이 서리는 걸 보며, 루시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영웅은 그야말로 고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건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또한,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펠릭스 형제님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분이지요?"

"반드시 예하의 기대에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펠릭스가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이 싸움을 먼저 시작한 건 너다, 아타나스. 온갖 치졸한 방법으로 물어뜯어 줄 테니 기대해.'

루시안은 끝까지 위엄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씰룩이는 입꼬리를 미처 감추지는 못했다.

조만간 보게 될 아타나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기대되는 탓이었다.

[23]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3화. 교황청의 사제들 (1)

순회를 앞두고, 로베르 황자에게 교황의 부름이 있었다.

[3황자는 순회를 나서기 전 성전으로 와 루멘에게 기도를 올리고 제작된 아티팩트를 받아 가시오.]

교황청의 전언을 받은 황제는 로베르를 불러 직접 소식을 전했다.

"아, 그거. 아타나스한테 들었는데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황령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은 로베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렇구나. 조심히 다녀오렴, 로베르."

"예, 폐하."

조너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황자의 외출을 승인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성검 문장이 박힌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자수정궁으로 들어섰다.

궁인들은 넋을 놓고 마차 표면을 수놓은 화려한 순금 장식과 보석 들을 바라봤다.

"우리 황자님이 난생처음 교황청에 가신다더니, 그게 오늘이었어? 어젯밤에도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그랬나?"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한 로베르가 어느새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헉, 황, 황자님?"

"교황청에서 마차를 보낼 거라더니, 굳이 직접 왔군."

마차가 궁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진 탓에 로베르는 예정보다 일찍 기상했다.

숨을 옥죄는 듯한 위험한 기운은 분명 아타나스의 것이었다.

"황자님, 잠시만요!"

앤디가 다급히 뒤따라와 황실 정복을 마저 입혀 주었다.

로베르는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문을 툭툭 걷어찼다.

"어이, 사제. 문 열어."

"세상에, 황자님!"

마차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기겁한 궁인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부가 경악 섞인 눈동자로 로베르를 내려다봤다.

"아타나시오 사제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분은 처음 봅니다."

"나도 황자에게 지적질이나 하는 마부는 처음 보네. 교황청 문턱만 밟아도 하늘에 닿은 줄로 안다더니...."

로베르가 위험한 발언을 내뱉은 그때, 다급히 문이 열렸다.

평소처럼 빈틈없는 모습의 아타나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황자 전하."

공손한 인사와 달리 두 눈에서는 입 좀 그만 놀리고 어서 타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로베르는 마지못해 마차에 올랐다.

"공기가 왜 이렇게 텁텁해?"

"안쪽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음 결계를 쳐 놨거든요, 듣는 귀가 있다 보니."

아타나스가 마부석과 통하는 작은 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사이 밖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앤디와 호위 기사들이 로베르를 뒤따르려 하자 마부가 그들을 막아 세운 것이다.

"따라올 생각 마시오. 알다시피 교황령의 문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열립니다."

"황자 전하가 호위 하나 없이 궁을 나서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정 그러시면 저와 단장만이라도...."

"불가하다고 말했잖소! 아타나시오 사제님의 귀중한 시간을 얼마나 더 빼앗을 셈인가!"

로베르는 창문 너머로 마부와 앤디의 말다툼을 지켜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마부는 네 하인?"

"제게 하인이 있을 리가. 그는 교황 성하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서 과하게 설치는군. 앤디는 저래 봬도 귀족인데 말이지."

그러나 교황을 모시는 자리가 제법 큰 권력이 되는 모양인지, 대치 끝에 물러선 쪽은 앤디였다.

앤디는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화이트 백작은 교회파 귀족이라면서. 그래 봤자 교황 하인 앞에서도 힘을 못 쓰나 봐?"

로베르의 말에 아타나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귀족들 앞에서는 절대 앤디 영식을 인정해 주는 발언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내 인정이 중요한가. 그냥 사실이잖아."

"제국에서 사생아는 평민 이하의 취급을 받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부정한 결합의 산물이니까요."

"내키면 하고, 그러다 애를 배면 낳는 거지. 축복이니 뭐니... 인간들 사고방식은 참 신기해. 그래서 너도 속으론 앤디를 개처럼 무시한다, 이거지?"

"그럴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보다 못한 처지인걸요."

아타나스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덜컹-. 그 말을 신호로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평민 출신 수도원장과 빈민가 여자 사이의 사생아는 귀족 가문에 입적된 앤디 영식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아타나스의 출신에 관해서는 익히 들어 왔으나,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작 로베르는 그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출신과 혈연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인간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거듭 묻겠는데, 그게 중요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교황의 직속 사제 아니신가."

"평민 사생아가 특권 사제 서품을 받은 것부터 기적에 가깝습니다. 귀족 대우를 바랄 수는 없죠."

"결국 네 자랑이지? 기적을 이룰 정도로 네 신성력이 대단하다는. 뭐, 나도 네 능력 하나는 인정해."

지난 일주일간 로베르는 그의 덕을 톡톡히 봤다.

아타나스의 힘으로 코어를 완성한 뒤 훈련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그의 성검을 든 앤디를 꺾은 것을 시작으로, 로베르는 날마다 새로운 상대와 대련했다.

앤디, 자수정궁의 호위 기사들, 황실 근위대, 황궁 주둔 성기사단까지.

아타나스의 요청으로 궁 안의 모든 병력이 돌아가며 로베르의 훈련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로베르는 언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타나스가 장담했던 대로 대련은 로베르에게 가장 맞는 훈련 방식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 로베르는 신성력에 완벽히 적응했고, 코어를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쓸모가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재수는 없지만."

로베르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새 그들이 탄 마차가 황궁을 벗어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성문 밖으로 낯선 거리가 펼쳐졌다.

"교황청의 마차다!"

거리를 누비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누군가는 황금 마차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또 누군가는 고개 숙여 기도했다.

이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넓은 길을 따라 줄지어 선 엇비슷한 가게들과 그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궁에서 멀어질수록 그곳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이나 허름한 집, 초라한 행색을 한 인간들이 창에 비쳤다. 로베르는 자연스레 멸망 직전의 마계를 떠올렸다.

"여긴 하늘은 참 밝은데, 그 빛이 어디에나 내리쬐지는 않나 보지."

"...어디에나 있다면 그것이 귀하게 여겨질 수 있겠습니까."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아타나스가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 사제님!"

그때, 절박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마차가 갑작스레 속도를 줄이며 그 반동이 안쪽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로베르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으악!"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응할 틈이 없었다. 로베르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맞은편 의자에 충돌하기 직전, 일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꼭 연회 때처럼....'

로베르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 앉은 채였다.

"방금 뭐야. 네 짓이냐?"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아타나스가 전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답했다. 로베르는 괜히 주변을 감싼 신성한 기운을 노려봤다.

'시간 마법 비슷한 건가? 분명 숨겨진 힘도 꽤 되는 듯한데 통 드러내지를 않는단 말이지. 제대로 한번 보긴 해야겠는데....'

그러나 미처 방법을 고민해 보기도 전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사제님! 제 병든 아내를 좀 살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아타나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희 부부 밑으로 딸린 애만 무려 넷입니다요. 입에 풀칠도 못 하는 처지라 의사 진찰 한번 못 받았습니다.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상태를 좀 봐주시면, 아니 짧게 기도라도 해 주시면...."

남자는 연거푸 땅에 머리를 박으며 눈물겨운 사연을 늘어놓았다.

"비켜서라! 네가 감히 어느 분이 가시는 길을 막고 있는지 아느냐!"

마부가 말채찍을 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수록 남자는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로 더 세게 머리를 박았다.

"저를 탓하시기 전에, 저희 부부가 얼마나 신실한지 아셔야 합니다. 자식 배는 곯려도 헌금은 밀린 적 없이 꼬박꼬박 냈고, 예배도 빠진 적이 없다고요! 그러니 사제님,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좁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소리에 이끌린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로베르는 금방이라도 남자의 뒤를 이어 무릎을 꿇을 듯한 사연 많은 얼굴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헌금할 돈을 아껴서 의사를 찾아갈 일이지, 왜 여기서 저래?"

"흔한 일입니다. 제국민들은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보다 사제의 기도나 손길 한 번을 더 신뢰하니까요."

교황청의 마차가 지나가면 사정이 절박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그 앞으로 몸을 던지고는 했다.

그런 이유로, 아타나스는 순회를 갈 때는 마차를 타지 않을 거라고 덧붙였다.

"왜? 저런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쯤이야 너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은혜를 누릴 자격을 판단하는 건 저의 역할이 아니라서요."

아타나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마부석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촤악-. 그러기를 무섭게 마부가 든 채찍이 남자의 등을 내리쳤다. 남자의 살점이 길가에 흩뿌려졌다.

"으, 아...."

남자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감히 교황청의 마차를 가로막고 신의 대리자와 흥정하려 해! 중죄를 지은 네놈을 살려 주는 것이 사제님이 베푸는 유일한 자비가 될 것이다!"

마부가 채찍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정적 속에서 매서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으아, 사, 살려...."

남자는 미친 듯이 기어 길에서 벗어났다. 모여든 구경꾼들은 뻣뻣하게 굳은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도와주는 인간 하나 없군. 자기도 같은 꼴이 될까 봐 무서운 건가.'

로베르는 집으로 돌아간 그들이 사제의 냉혹함을 비난할지, 남자를 손가락질하며 도리어 교황청을 두둔할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또다시 예배를 가고, 헌금을 바치고, 신의 기적을 꿈꾸리라는 건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너는 저런 게 지긋지긋한 건가. 악마의 손까지 빌려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을 정도로?"

"그건...."

아타나스가 무어라 답하려던 차에 마부석 쪽 창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타나스는 로베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창을 열었다.

"아이고, 사제님. 귀한 시간을 너무 지체하셔서 어쩝니까.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알현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길이 험해 예정보다 늦어진 것뿐이니까요."

조금 전 사건은 교황에게 굳이 보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아무도 감히 사제님이 가시는 길을 막지 못하도록."

마부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아타나스는 창을 닫고 잠시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로베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황자님, 교황청의 사제들과는 어떤 약속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뜬금없이 뭔...."

"성직자와의 약속은 신을 두고 하는 서약이나 마찬가지라서요. 대가는 없고 책임만 있는 종신 계약을 하는 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타나스는 이어서 특히 경계해야 할 세 사람을 꼽아 주었다.

교황, 루시안 추기경, 그리고 성녀.

"성녀는 왜? 오늘 그 여자와의 밀회를 주선하려는 게 너잖아."

"유일하게 황자님의 정체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는 분이거든요. 그와 별개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서, 방심이 특기인 황자님과는 상성이 최악입니다. 성녀님 앞에서는 되도록 말을 아끼고 진짜 로베르 황자처럼 구세요."

한창 성녀에 관한 대화가 오갈 즈음, 마차가 교황령으로 들어섰다.

두 영토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속이 울렁이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우웩...."

로베르는 헛구역질하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야, 사제. 여기 악마를 걸러 내는 결계 같은 게 쳐져 있지?"

"그렇습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차라리 안 묻느니만 못한 아타나스의 질문에 로베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영지마다 이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당장 순회를 때려치우고 싶어지는데."

"있긴 합니다만, 코어가 강해져서 이제 웬만한 결계는 황자님을 악마로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교황령에는 결계가 몇 겹씩 쌓여 있어서 좀 다른가 보네요."

"잠깐, 여기 결계는 날 악마로 인식한다는 거야?"

"네. 그래도 별문제는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쳐 놓은 결계라, 제가 관리하거든요."

그 말을 증명하듯 아타나스의 주변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악마가 결계를 침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자식, 혼자 제국 곳곳에 전방위 결계를 쳐 놓고 유지한다고? 그만한 힘을 계속 소모하고 있으면 의외로 순회에서는 별 쓸모없는 거 아닌가? 어쩌면 내 힘을 빌리려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과거 마왕으로 살던 시절, 로베르를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 일족을 위한 결계를 치는 것이었다.

결계 마법이 시전자의 신경과 체력을 어디까지 갉아먹는지 잘 알기에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첫 아티팩트를 받기 전에 신고식을 하는 것이 관례인데, 어쩌시렵니까?"

"괜찮군. 이쪽은 내 스승이 대신 나간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를 시험해 볼 기회가 주어졌다.

[24]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4화. 교황청의 사제들 (2)

희뿌연 안개가 지상의 풍경을 가렸다. 그러나 그들이 탄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가 적막한 거리를 울렸다.

영지의 중심에 우뚝 솟은 교황청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곳을 둘러싼 신성한 기운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불쾌해."

로베르는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황궁과 달리 이 땅은 결코 제게 좋은 곳이 될 수 없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교황령에 들어선 후로는 아타나스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도착했습니다, 사제님."

마침내 쉴 새 없이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황자님."

아타나스는 마부를 보내고 앞장서서 로베르를 교황청 건물로 안내했다.

"우선 교황 성하부터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현실은 저쯤입니다."

아타나스의 손가락은 언뜻 보기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자세히 살펴보자 그제야 구름에 가려진 교황청의 상층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걸어서 저기까지 올라가야 하나?"

"체력만 된다면 뛰어서 올라가셔도 됩니다."

"...열받게 굴지 말고, 정말 방법이 없냐고."

하지만 아타나스를 보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교황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중심부의 원형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로베르는 먼지 한 올 없는 계단을 오르며 교황을 향한 증오를 키워 나갔다.

"헉, 허억. 미친. 교황은 매일 여기를 오른다니, 믿을 수 없어."

"성하께서는 주로 이동 스크롤을 사용하십니다."

뒤따르던 아타나스가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귀족들도 쉽게 못 구할 정도로 비싸고 귀하다고 들었는데. 그걸 매일 쓴다고?"

"모든 성물은 신의 대리자이신 교황께서 관리하시니까요."

신을 위해 바쳐지는 재물과 신의 힘이 깃든 모든 물건의 주인이 교황이라는 뜻이었다.

'신의 힘을 쓰지도 못하는 놈이 그만한 신권을 가졌다니, 대체 어떤 작자이길래.'

그쯤 되자 로베르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모든 걸 누린다는 인간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러나 하늘에 닿을 듯한 건물의 꼭대기까지 오른 보람도 없이, 두 사람은 바로 교황을 만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루시안 추기경께서 먼저 성하를 뵙고 계십니다."

"루시안?"

그건 분명 아타나스가 미리 일러 준 이름이었다.

웬 불청객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차례를 가로챘다는 것을 눈치챈 로베르는 크게 분개했다.

"이 돼먹지 못한...."

아타나스는 간신히 로베르의 입을 막은 뒤 대신 교황의 보좌관을 설득하려 애썼다.

"황자께선 성하의 부름을 받고 먼 길을 오셨습니다.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은 교황청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송구합니다, 사제님. 그러나 황자님을 위해 예하를 쫓아낼 수도 없지 않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금방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보좌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베르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사람들과 연이어 마주치자 로베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황자님, 기다리는 동안 아티팩트부터 받으러 가실까요. 보관실이 여기서 가깝습니다."

아타나스는 무슨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 로베르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

"나더러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더니. 제국의 황자를 불러 놓고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게 이곳에서 통하는 예의인가? 그럼 나도 참고하고."

로베르는 그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보좌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보좌관이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아타나스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그 보관실은 아카키 황자님이 가끔 술을 훔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 술맛을 떠올린 로베르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휴. 그래, 아티팩트부터 받으러 가는 게 좋겠어."

사고 치지 말자. 삼 년만 참으면 나와는 평생 연이 없을 곳이다.

로베르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아타나스를 따라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성녀의 존재를 떠올려냈다.

"아, 참. 성녀를 먼저 보는 건?"

그 말에 아타나스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는 엿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소리를 낮추어 대꾸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교황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일이라 신중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성녀님을 만나려면 지하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 여자를 꼭 만나야 할까?"

"성녀님과 약속 비슷한 걸 해 버리는 바람에. 아마 피하려 하면 더 무서운 결과로 돌아오겠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몇 층을 내려가자 금방 연무장으로 통하는 복도가 나왔다.

아직 앳된 얼굴의 부제들이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아타나스와 같은 사제복을 입은 무리가 그들을 돕고 있었다.

"펠릭스 사제님! 아타나스 사제님께서는 언제 오십니까?"

그때, 갑작스레 아타나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멈추어 섰다.

"그를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네, 그분이 저희 훈련을 봐주신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눈길을 잘 주지 않으셔서.... 저희가 특권 사제가 되기에 모자란 재목은 아닐까 늘 걱정했거든요."

어린 부제가 눈을 빛내며 아타나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거, 네 얘기 맞지?"

"그런 모양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반갑지 않은 얼굴을 발견한 아타나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어린 부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주제도 모르고 눈이 높은지라 황족쯤은 되어야 제자로 받아 주는 모양이더라. 이제 막 각성한 황자에게 너희들 이상의 가치를 매긴 듯해."

"그 모자란 황자가요? 말도 안 돼요!"

펠릭스의 말에 부제들 몇몇이 기다렸다는 듯 로베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 황자님 이야기도 하는군요."

"네가 적이 많은 탓에 나까지 밉보인 건 아니고?"

"황자님은 태어나던 순간부터 모든 제국민에게 밉보였을 텐데요."

"이 자식이 남의 아픈 과거를...."

로베르가 아타나스의 멱살을 잡아챈 그때, 펠릭스가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접 와서 해명하지 그래, 아타나스!"

"어, 아타나시오 사제님!"

뒤늦게 아타나스를 발견한 부제들이 환호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반면 그의 멱살을 쥔 로베르에게는 적대감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난 어린애들이 싫어."

"저 중에는 황자님 또래도 많습니다."

"내가 몇 살인지 알기나 하냐?"

로베르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멱살을 놔주었다.

두 사람이 선뜻 움직이지 않자 펠릭스가 먼저 다가왔다. 아타나스는 옷깃을 가다듬고 펠릭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부제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왜 너처럼 순회를 다니지 않고 편하게 자리를 지키냐는 뜻인가?"

"부제들을 형제처럼 보살피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뜻입니다."

사생아 앤디를 입적시키며 구설에 오른 화이트 백작가의 펠릭스에게 형제를 운운하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타나스를 더욱 미워하는 펠릭스는 그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곁에 있던 사제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펠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부제들을 의식한 펠릭스는 애써 화를 참으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이런, 황자님도 계셨군요. 사제 펠릭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내 아티팩트를 가지러."

로베르가 대뜸 반말로 답하자 펠릭스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졌다.

"황자님, 귀족과는 상호 존대가 기본입니다."

"인사 예법을 안 지킨 건 저쪽이 먼저잖아."

제국의 예법대로라면, 펠릭스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로베르에게 먼저 인사해야 했다. 또한 로베르의 답을 듣고 나서 다음 말을 건네야 했다.

뜻밖의 상대에게 지적을 받게 되자 펠릭스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황자님은 예의를 갖추셔야 상대와 달리 품위 있는 분이 되시는 겁니다."

아타나스는 대놓고 펠릭스를 긁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겁을 먹은 부제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하, 하, 그동안 사제 관계가 꽤 돈독해진 모양입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펠릭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허?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그럼 '악마와 사제 게임'에 대해서도 들으셨겠군요. 특권 사제들끼리 즐기는 신고식 말입니다. 준비는 충분히 해 오셨습니까?"

"황자님은 정식으로 사제가 되신 게 아닙니다. 그러니 어린애들 장난 같은 관례와 상관이 없으시죠."

어리둥절한 표정의 로베르를 뒤로하고, 아타나스가 성가시다는 투로 딱 잘라 답했다. 그러자 펠릭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임시라도 당분간 사제직을 맡으셨잖아. 권리만 챙기고, 의무와 규율은 피해 가겠다? 우리 대신성 제국의 황자께서 고작 그런 사내일 리가."

"뭔...."

아타나스는 이상할 정도로 억지를 쓰는 펠릭스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황자께 직접 묻죠. 교황청의 사제들은 첫 아티팩트를 받기 전에 신고식을 하는 것이 관례인데, 어쩌시렵니까? 거절하신다면 재차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상관없나. 저 마왕이 귀찮은 일에 응할 리가 없으니까. 어서 보관실에서 아티팩트나 꺼내서 돌아가면 좋겠군.'

펠릭스가 결정권을 로베르에게 넘긴 순간, 아타나스는 긴장을 풀고 잠시 딴생각을 했다.

그사이 로베르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괜찮군. 다만 내가 오늘 몸이 좋지 않은 관계로, 이쪽은 내 스승이 대신 나간다."

"예?"

아타나스가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펠릭스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군요. 그것이 황족의 스승 된 자가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얼마 전, 루시안은 신고식을 들먹이며 로베르를 압박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아타나스가 대신 나서게 될 것이라고.

로베르가 손수 아타나스의 등을 떠미는 건 예상치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아니...."

"특권 사제의 대련을 지켜본다면 너희들의 훈련에도 큰 도움이 되겠구나."

펠릭스를 따르는 사제 몇몇이 부제들의 기대감을 부추겼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아타나시오 사제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있겠습니다! 네?"

실제로 특권 사제들의 전투를 볼 일이 거의 없는 부제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함정이라기엔 허술하고, 가볍게 여기기엔 찜찜한데.'

아타나스는 자신이 너무도 쉽게 누군가가 짠 판 위에 놓였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편,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로베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실실 웃음이나 흘리고 있었다.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아니, 늘 전방위 결계를 겹겹이 펴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의심이 들잖아. 나는 쓸모없는 종을 정으로 거둬 주는 타입은 아니라서 말이지."

그러니 이쯤에서 그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네가 앞으로도 쓸모 있을 예정이라는 걸 증명해 봐. 그럼 나도 네 소원을 찾는 일을 포함해서, 더 협조해 줄 테니까."

"아, 그러니까. 내가 결계를 유지하느라 평소에는 황자님 앞길이나 막을 만큼 약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셔서, 이 기회에 시험해 보고 싶으시다?"

아타나스가 고저 없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너무 기가 찬 탓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나는 결계가 얼마나 까다로운 건지 알거든."

마왕마저 일족들을 위해 대규모 결계를 펼칠 때면 터무니없이 약해졌다. 그동안은 웬 하급 악마에게 기습당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곱 마왕 중 한 명인 레비아탄은 그런 식의 기습에 당해 심장을 빼앗겼고, 그대로 멸족의 위기에 놓였던 적도 있었다.

"인간이 그걸 계속 유지하면서 제대로 힘을 쓴다? 네가 강한 걸 고려해도 말이 안 되지."

"하하...."

아타나스는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벌써 결투 준비를 끝낸 펠릭스 무리를 바라봤다.

"황자를 죽일 뻔한 일로 경고를 받고 나니, 아무리 저라도 몸을 사리게 되더군요. 지금 보니 그게 너무 과하긴 했나 봅니다."

"...그거 설마 아카키 형님 얘기냐?"

"오늘로 당신 얘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 드리면 될까요?"

색이 바랜 듯 어둡던 그의 회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으로 차올랐다. 로베르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농담입니다."

"아니잖아, 새끼야."

"진심인데요. 마침 좋은 교재가 굴러 들어왔으니, 이참에 제대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새로이 얻은 그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아타나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펠릭스 사제, 먼저 골라. 악마와 사제 중 어느 쪽을 원하지?"

어느 쪽이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날 아타나스가 사제들에게 베푼 유일한 자비였다.

[25]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5화. 교황청의 사제들 (3)

악마와 사제 게임이란, 신학교에서 전통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폭력에 가까운 정화 의식이었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정화의 대상이 될 한 사람을 지목한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자가 악마가 된다.

최소 세 명 이상으로 구성된 사제들은 각각 속박 주문, 공격 주문, 정화 주문을 사용해 악마를 정화한다.

그대로 악마를 쓰러트리면 사제들의 승리, 그 의식을 버텨 내고 결투를 통해 사제들을 모두 꺾으면 악마의 승리였다.

홀로 악마가 되어야 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이 게임은 원래 다수에게 낙인찍힌 사람을 철저히 짓밟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신학교의 연례행사처럼 열린 본 게임에서 악마가 승리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특권 사제의 신고식에 쓰이게 된 후로, 세 명의 악마가 사제들에게 승리했다.

"첫 아티팩트를 받기 전에는 가장 순결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너희들을 두들겨 패면 어젯밤 줄리아와 입을 맞춘 것도 없던 일이 되나?"

아카키에게 패배했을 때, 펠릭스는 생각했다.

황자를 상대로 죽일 듯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신고식이라니, 이런 건 처음 해 봐요. 그럼 이제 저를 동료로 인정해 주시는 거죠?"

글로리아 사제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것도 참을 만했다.

사제 여럿이서 귀족 영애를 이겨 봤자 그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승리도 없을 테니까.

"이제 알겠어? 부정한 건 내가 아니라, 이렇게 쓸모없는 주제에 매일 밤 비단 이불을 덮고 어머니의 품속에서 편하게 잠드는 너라는 걸."

하지만 아타나스에게 패배한 일은 매일 밤 펠릭스를 잠 못 들게 하는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껏 펠릭스는 굳이 노력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얻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특권 사제가 될 정도로 강한 신성력을 타고난 화이트 백작가의 영식.

가문의 사람들은 교황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준 막내아들을 아꼈고, 신학교의 학생들도 교황청의 사제와 부제들도 당연히 그 밑으로 모였다.

'그랬는데, 이게 뭐지?'

하지만 저보다 한참 어린 평민 사생아 따위에게 모욕당한 순간, 펠릭스의 견고한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자식은 나로도 모자라서 내 어머니까지 모욕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 주겠어."

그날부터 펠릭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를 올리고, 온종일 훈련하고, 수도의 교구로 들어오는 구마 의뢰를 도맡았다.

자식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 화이트 백작마저 이따금 우려 섞인 말을 건넬 정도였다.

'아니, 아직 그놈을 꺾기에는 한참 모자라.'

그러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펠릭스는 오직 그 목표만을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온 결과, 펠릭스는 얼마 전 저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아타나스가 쫓던 질투 일족의 상급 악마를 물리쳤다.

그제야 희망이 보였다. 그것은 곧 제 인생을 뒤흔든 적수를 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오랜 꿈이 눈앞에서 실현되려 했다.

"물어볼 것도 없었나. 네 패거리를 끌고 온 걸 보면, 내가 악마 쪽이겠지? 싹 다 올라와."

펠릭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꿈에도 모르는 아타나스는 아티팩트 하나 들지 않고 맨손으로 제 앞에 섰다.

"저 건방진 새끼...."

펠릭스를 따르는 사제들은 이를 갈며 둥근 원 안으로 들어섰다.

탁. 아타나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투명한 결계가 원을 둘러쌌다. 부제들은 눈을 반짝이며 결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결계를 또 친다고?"

상황을 관전하던 로베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는 결계 담당 사제의 몫이지만, 배려 차원에서. 황자님도 가까이 와서 보시죠. 슬슬 주문에 대해서 배울 때도 되셨으니까요."

"수작 부리지 마라, 아타나스. 이제 막 각성한 자가 벌써 주문을 배운다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서 뭘 얻으려는 거지?"

"어차피 온 세상이 알게 될 일, 먼저 알아서 손해 볼 건 없을 텐데."

아타나스는 건성으로 답하고는 극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간 펠릭스를 향해 눈짓했다.

"시작해."

그 말을 신호로, 사제들이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아홉 개의 검이 사방에서 아타나스를 겨눴다.

그를 포위한 사제들은 숨죽인 채 펠릭스의 신호를 기다렸다.

마침내 만전의 상태가 된 펠릭스가 제 검을 뽑았다. 날카롭게 갈린 검이 아타나스의 심장을 겨누었다.

"신이시여, 여기에 당신의 자식들을 해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펠릭스가 가장 강력한 시동어를 내뱉자, 아홉 개의 검이 동시에 발광했다. 사제들은 환희에 찬 눈빛으로 검을 단단히 잡았다.

"그러자 루멘께서 말씀하시길, 그자를 결코 산 채로 돌려보내지 말지어다."

환한 빛이 아타나스의 위로 쏟아졌다. 그의 형체를 가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아타나스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자를 속박하라."

사제 셋이 동시에 같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들의 검에서 뻗어 나간 빛이 밧줄처럼 아타나스를 단단히 결박했다.

"그자의 육신을 불태워라."

또 다른 사제 셋이 엄숙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화르륵-. 그들의 검광이 순식간에 불길이 되어 아타나스에게 옮겨 붙었다. 이내 아타나스는 불꽃에 완전히 뒤덮였다.

"헉, 아, 아타나스 사제님!"

부제들이 놀란 목소리로 그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남은 사제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그자의 영혼을 정화하라."

세 개의 검이 매섭게 불길을 갈랐다. 그 자리를 따라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임은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래도 나는 깔끔하게 죽여 줬잖아? 저렇게 죽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로베르는 수많은 악마가 거쳐 갔을 정화 의식을 가만히 지켜봤다.

비록 열 명이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모습이 멋없긴 했지만, 그것이 약자들이 싸우는 방식이었다.

펠릭스를 제외한 사제들은 혼자서는 하급 악마의 상대도 되지 못했으나, 지금은 상급 악마도 너끈히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증폭 주문이 걸린 상급 아티팩트, 수적인 우세함,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들이기에 보일 수 있는 단합력.

아타나스가 방심하는 사이, 그들은 모든 유리한 요소를 동원했다.

이날만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단순한 구경꾼인 로베르마저 알 것 같았다.

'엄청 자신만만하더니....'

그사이 펠릭스는 아티팩트에 모든 힘을 쏟아 넣었다. 검이 힘껏 솟아올라 천장을 겨누었다.

"정화의 불꽃으로 악마를 몰아내소서."

승리를 확신한 펠릭스의 얼굴에 순수한 기쁨이 번졌다.

"끝이다, 아타나시오!"

펠릭스는 그대로 뛰어올라, 불길의 정중앙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검을 따라 푸른 불길이 파도처럼 깔끔하게 갈라졌다.

"펠릭스 님,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그 공격을 받아 낼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사제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이게 무슨...."

반면, 펠릭스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봐서는 안 될 광경을 가장 먼저 보게 된 탓이었다.

"보셨죠, 황자님. 정화 의식은 보통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의 음성에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뒤이어 불길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사방으로 튀어 나간 작은 불씨는 결계에 막혀 완전히 스러졌다.

"이제 내 차례인가?"

다시 나타난 아타나스는 작은 생채기조차 없는 잘난 얼굴을 들고 사제들을 내려다봤다. 그 입가에는 옅은 조소가 걸린 채였다.

"...."

사제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아주 오래도록 갈고닦은 펠릭스의 검은, 아타나스를 둘러싼 막에 가로막혀 그에게 닿지조차 않았다.

펠릭스는 온몸의 체중을 실어 검을 계속 박아넣었으나, 막을 부수기는커녕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크윽, 대체 이게 뭐냐고!"

"충분했나요?"

아타나스는 절규하는 펠릭스를 등지고 로베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래. 내가 잠시 터무니없는 의심을 했다."

엄청 자신만만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로베르는 진즉부터 아타나스에게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계약자가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받으면, 나한테도 느낌이 오니까.'

그러나 조금 전에는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탓에 상대편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일반적인 정화 의식을 복습해 볼까요."

아타나스는 벌레를 내쫓는 것처럼 손을 휘저어 펠릭스의 검을 치워 버렸다.

쨍-. 아티팩트가 펠릭스의 목을 스쳐 뒤편의 결계에 부딪혔다.

"으악!"

결계에 바싹 붙어 결투를 지켜보던 부제 몇몇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쾅! 뒤이어 거대한 힘에 떠밀려 온 펠릭스가 그들의 코앞에 쓰러졌다.

"사, 사제님...."

부제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느낀 펠릭스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아타나스는 여전히 펠릭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정화 의식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주문이었던 '속박'."

그가 속박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결계 곳곳에서 심연이 열리기 시작했다.

철컹-. 그곳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이 순식간에 원 안의 모든 사제들을 포박했다.

"이, 이봐, 아타나스!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이런 건 본 적도 없다고...."

"속박에 걸린 대상은 힘을 아예 쓸 수 없거나, 제한을 받습니다. 물론 대상과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면 쓸모는 없지만."

아타나스는 사제들의 반발을 무시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두 번째는 공격 주문이었습니다. 이건 빙의자에게는 절대 쓰지 않고, 주로 악마의 본체를 상대할 때 씁니다. 이들도 사람에게 써 본 건 제가 처음이겠죠. 대상을 죽일 수도 있는 주문이니까."

그의 싸늘한 눈동자가 망설임 없이 공격 주문을 외웠던 세 명의 사제를 훑었다.

"아악! 그, 그만해!"

사슬이 몸을 부서뜨릴 듯이 조여 오자 그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펠릭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아타나스를 올려다봤다.

"너, 넌 어차피 이 정도로 안 죽잖아!"

"죽었다면? 승리에 정신이 팔려서 머리가 박살 난 모양인데, 아카키 황자님이나 글로리아 사제였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우리가 그분들에게 이렇게까지 했을 리가 없...."

펠릭스는 지금 하는 말이 그를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으리라는 걸 깨닫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지는 머리가 굴러가서 다행이네."

아타나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끝으로, 영혼에서 마기를 완전히 몰아내는 '정화'. 이 주문은 주로 빙의자에게 쓰지만, 가장 순수한 힘을 담을 수 있기에 마지막 일격으로 쓸 만하죠."

"으, 으아아악!"

그가 정화라는 단어를 내뱉기 무섭게 사제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이 사제라면, 신성력의 충돌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 여기부터 완전히 망가져서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될지도요."

"헉, 허억-."

아타나스가 이마를 짚으며 설명하는 사이, 사제들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놓아 버렸다.

"사, 사제님...."

부제들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타나스는 겁에 질린 어린 부제들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아직도 내게 훈련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따로 찾아오렴."

"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부제들은 뒷걸음질 치며 결계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제들이 모두 연무장을 나간 것을 보고서야 아직 의식이 있는 펠릭스에게 다가갔다.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이 크게 울렸다. 그와 함께 사지가 떨릴 정도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빠직-. 신성한 힘이 넘쳐흐르는 발아래에서 펠릭스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다. 펠릭스는 깊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만 봤다.

짝짝짝, 로베르는 성의 없이 손뼉을 쳤다.

"이렇게 무시무시하고 효과 좋은 수업은 처음 본다, 스승님. 그러니까 나더러 저걸 하라는 거지?"

"아니요, 방금 보여 드린 대로 시동어와 기도문을 생략하고 곧바로 주문을 사용하는 경지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아타나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답하며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펠릭스의 턱을 가격했다.

퍽-. 강한 파열음과 함께 펠릭스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커헉...."

펠릭스는 볼품없이 쓰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사슬이 출렁이며 펠릭스를 다시 아타나스의 앞에 꿇어앉혔다.

"비록, 이 쓰레기 같은 작자는 신학교에서 십 년을 배우고도 도달하지 못했지만."

퍽, 퍽, 퍽. 신성력이 실린 구둣발이 펠릭스를 짓밟았다. 부러진 이가 바닥으로 튀어나왔다.

"그다음으로는 무언 주문과 고유 주문이 있는데, 아직 거기까지 배우기는 이른 듯하네요."

"질문. 아무리 그래도 결계를 유지하면서 이만한 힘을 내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슨 유용한 주문이라도 있나?"

로베르는 아타나스를 말리기는커녕 정말 수업이라도 듣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 뭘...."

얼굴이 곤죽이 된 펠릭스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아, 그걸 안 가르쳐 줬네. 제 고유 주문이 시공간과 관련이 있거든요."

"시공간이라니, 너무 광범위하잖아."

"직접 보여 드릴까요? 가장 간단하게는 이런 식으로 결계를 펼칠 수 있습니다."

아타나스는 손가락을 까딱여 저를 감싼 막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펠릭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공간의 벽'이 제 성역입니다. 이 안에서는 힘을 얼마나 소모했든 즉시 만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또한 외부의 공격은 벽에 가로막혀 제게 닿지 못하고요."

"...내가 참 우스웠겠어."

자신이 패배한 이유를 단번에 깨달은 펠릭스가 치욕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널 꺾는 일에 가문의 명예와 긍지를 모두 걸었는데...."

"푸핫!"

그 말에 아타나스가 크게 코웃음 쳤다. 펠릭스의 얼굴이 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우, 웃어...?

"아, 미안. 그런데 우습긴 하잖아. 신의 이름으로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짓밟아 놓고 가문의 명예니 긍지니...."

"...."

"말해 봐. 이딴 쓰레기 같은 게임으로 대체 몇 사람을 짓밟았지?"

아타나스가 주먹을 움켜쥐자 보이지 않는 압력이 펠릭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컥, 커헉-."

펠릭스는 굶주린 짐승처럼 침을 줄줄 흘리며 경련했다.

로베르는 팔짱을 낀 채 진즉 비슷한 꼴이 된 사제들을 둘러봤다. 아타나스의 힘을 목도하자 새삼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내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는 이미 목표를 이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불리한 계약을 자처해 가며 마왕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어 보였다.

킥. 그때, 뒤편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르는 가장 먼저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서 마침내 의문을 해결할 열쇠를 찾아냈다.

사악한 얼굴을 한 젊은 추기경의 곁에 서서 아타나스를 노려보고 있는 자는 분명 교황이었다.

'교황은 신성력이 한 줌도 없다지 않았나?'

아카키의 말과 달리 교황에게서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과거 신성 영웅으로부터 느꼈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힘의 근원은 교황이 아니라 교황이 지닌 어떤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타나시오."

교황의 음성이 울리자, 아타나스가 무언가에 붙들린 듯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급히 교황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 순간, 로베르는 교황이 지닌 물건이 자신의 계약자를 속박하고 있는 무언가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 그러니까 이중 계약을 하셨다?'

대가는 없고 책임만 있는 종신 계약.

어떤 멍청한 놈이 그런 계약을 하나 했더니, 그건 아무래도 아타나스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타나스의 소원은 분명 그와 관련이 있었다.

[26]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6화. 교황청의 사제들 (4)

오늘 로베르가 교황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루시안은 미리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교황이 제 손으로 저주받은 황자에게 무엇을 쥐여 준 건지 깨닫게 하는 것.

그를 위해 펠릭스를 아티팩트 보관실 근처 연무장으로 보냈고, 교황을 찾아가 억지를 쓰며 알현을 청했다.

"아타나시오를 밖에 세워 두는 일이 그렇게 즐거우냐. 대체 언제까지 이리 유치하게 굴 셈이야."

교황은 루시안의 행동을 질 나쁜 장난 정도로 이해했다. 루시안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장단을 맞추어 주신 걸 보면 성하께서도 그를 길들이는 일이 즐거우신 게 분명합니다."

"길들이다니. 나는 그 아이가 제 사명대로 살도록 키워 낸 것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마치고 아타나스를 불러들였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다.

아타나스는 교황을 기다리는 대신 황자를 데리고 아티팩트 보관실로 간 뒤였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황자를 보관실에 데려갔다고?"

교황은 그 사소한 행동에 대단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굴었다.

"황자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아티팩트부터 받으려 한 것이겠죠. 너무 노여워 마세요, 순서를 바꾸어 처리한다고 일이 잘못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황자의 면을 살려 주려 내 뜻을 거슬렀다니, 나는 그 아이에게 그런 판단을 맡긴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직접 가셔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어떠세요. 물론 그는 성하의 사람이니,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만."

"...그래, 직접 가 봐야겠다."

교황은 생각보다 쉽게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덕분에 루시안은 자신이 원했고 교황은 원치 않았을 광경을 보이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더 거하게 일을 치르셨군.'

교황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일을 벌인 보람이 있었다.

킥. 루시안은 처참하게 짓밟힌 형제들 앞에서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타나시오."

교황의 분노 서린 음성이 울리자 아타나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본능처럼 머리부터 숙였다.

'등신, 빌빌거리긴.'

루시안은 장난스레 휘파람을 불며 그에게 다가갔다.

"힘 자랑 제대로 했네, 너답지 않게. 누가 널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결계는 루시안을 쉽게 안으로 들였다. 널브러져 있던 펠릭스가 퉁퉁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젊은 추기경을 바라봤다.

"예, 예하. 죄송합니다, 저를 믿어 주셨는데...."

"펠릭스 형제님,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제 모든 믿음은 오직 루멘님을 위한 것이랍니다."

"...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아타나스는 얼핏 허술한 함정처럼 보이던 상황들이 누구의 짓이었는지 깨달았다.

"루시안, 또 너야?"

"하하, 이건 좀 풀어 주지 그래. 두 분께서 보기에 좋은 풍경은 아니잖아?"

루시안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며 교황과 그 옆에 선 로베르를 가리켰다.

'이게 목적이었나.'

아타나스는 곧바로 결계를 접었다. 사슬에 묶여 있던 사제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방 먹었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친구."

루시안이 키득거리며 아타나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타나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경박하게 굴지 마라, 루시안 추기경. 손님을 모셔 놓고 이게 무슨 추태냐."

교황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막내 황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황자."

"...."

로베르는 인사를 나누는 대신 교황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교황의 눈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예의 있게 굴라니까, 망할 마왕 놈.'

무엇 때문인지 로베르는 인사에 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타나스는 다급히 교황의 앞으로 가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성하. 제가...."

그때, 교황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로베르를 바라봤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여는 이 없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침묵이었다.

"황자님? 언제까지 저희를 기다리게 하실 겁니까."

"아."

보다 못한 루시안이 주의를 주자 그제야 로베르에게서 반응이 돌아왔다.

"기다림이야말로 이곳에서 통하는 미덕이 아니던가요. 아무튼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베르가 대충 둘러대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루시안이 피식 웃었고, 아타나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교황은 그 손을 마주 잡는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황자가 기다림에 지치지 않도록 제 아이가 힘쓴 듯한데,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신의 대리자에게 함부로 닿으려 하다니요. 그건 황제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을 기억하시길."

지금껏 암묵적인 금기를 어기고 교황에게 고개 숙이는 대신 악수를 청한 황족은 파토르가 유일했다.

"참 비싼 손이군요."

지금 막 그 뒤를 이은 로베르는 언젠가 대공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손을 거뒀다.

대공과 전혀 닮지 않은 황자에게서 같은 불쾌감을 느낀 교황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네가 나를 욕되게 하는구나, 아타나시오야. 황자에게도 형제들에게도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네가 그 옷을 입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지?"

"...죄송합니다."

아타나스는 아무런 변명 없이 사죄부터 내놓았다.

반면 그를 통해 자신까지 꾸중하는 의도를 눈치챈 로베르는 못마땅한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교황은 계속 로베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동안 황자에게 무엇을 가르친 건지, 신이 주신 힘으로 형제들을 다치게 한 이유는 뭔지 알아야겠다."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타나스가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교황이 짧게 혀를 찼다.

"죄를 밝힌다고 그 무게가 덜어지는 것이 아님을 잊었느냐. 악마를 가까이하는 네가 기도에 소홀하니 기어코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지. 아직도 이리 믿음이 적은 널 어째야 할까. 응?"

"아타나시오 사제가 기도에 소홀하다니요. 무려 교황 성하께서 지켜보는 앞에서 회개 기도를 올리는 유일한 자가 아닙니까."

루시안이 슬쩍 말을 얹자 교황의 표정이 티 나게 누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아타나스는 주먹을 세게 틀어쥐었다.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건 교황청 놈들 종특인가.'

로베르가 그런 생각이나 하던 그때, 일순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정지한 시공간 속에서 아타나스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죠. 아무래도 성녀님은 다음에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보여 드렸으니 협조한다는 약속은 지키시는 겁니다."

아타나스는 교황과의 관계에 대해 감춘 주제에 대가부터 요구해 왔다. 로베르는 기가 찬 탓에 헛웃음을 흘렸다.

"성녀는 둘째 치고 이중 계약 건부터 따져야겠는데. 너, 신과의 서약을 깨고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날 끌어들인 거지?"

"...알아보셨군요. 하지만 저는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듣도 보도 못 한 상황을 만든 주제에, 뭐? 이 건방진 계약자 놈이 그걸 말이라고...."

발끈한 로베르가 그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저는 이제 교황과 기도실에 가야 합니다. 제발,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아티팩트만 받아서 돌아가세요."

탁. 그 말을 끝으로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자유를 되찾은 로베르는 곧바로 아타나스의 쪽을 돌아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를 해명하려는 시도가 더 큰 죄가 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미흡한 제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성하."

아타나스는 교황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굴종했다.

루시안은 맥이 풀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교황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먼저 황자를 모셔 놓고 홀대하는 모양새가 되어 유감이지만, 제게는 제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루시안 추기경이 저를 대신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아, 예. 교황 성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베르는 마지못해 답하고는 자신 못지않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루시안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로베르는 루시안과 남은 일정을 함께하게 되었다.

"가능하다면 순회 전에 한 번은 더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전하."

아타나스는 의미심장한 인사를 남기고는 교황의 뒤를 따라 어딘가에 있을 기도실로 사라졌다.

* * *

'나를 저주받은 황자로 만들었다는 여자 얼굴이나 보나 했더니, 웬 불쾌한 사내놈이랑 단둘이 남겨질 줄이야.'

로베르는 보관실로 향하는 내내 루시안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는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아타나시오와 다시 만나니 어떠십니까? 그래도 우리 중에는 그가 황자님을 제일 챙겼던 것 같은데요."

"글쎄요, 어릴 때 일이라."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도 황자님을 꽤 좋아했습니다. 저는 위로 누님 한 분만 있는지라 남동생을 가진 아카키가 참 부러웠거든요."

루시안의 누님이라면, 하론의 약혼자인 에리카 공작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타나스는 루시안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루시안은 하론보다 아카키와 더 친밀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교류한 사이면 나도 저놈과 만난 적 있나? 딱히 그런 말은 없었는데.'

로베르는 확신이 서지 않는 탓에 침묵을 지켰다. 그사이 루시안은 낯선 복도로 망설임 없이 발을 디뎠다.

"아카키가 너무 황자님을 싫어하니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잘해 드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몰래 이것저것 선물해 드리긴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말했다시피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잘."

루시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복도 끝의 벽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곳에는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험난한 생의 흔적과도 같은 흉터가 가득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그림과 험악한 생김새가 어우러져 우중충한 분위기를 냈다.

그러나 유독 선명하게 그려진 눈만큼은 여전히 무엇이든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 눈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사제의 눈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탓에, 로베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국을 구한 신성 영웅이시죠."

내 목을 벤 인간 중 하나고.

영웅들의 얼굴은 간신히 익혔지만, 아직 이름까지는 외우지 못한 로베르가 대충 답을 얼버무렸다.

"하하, 맞습니다. 여기 그려진 에버그린 남작은 위대한 영웅이었죠. 아카키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형님이 누군가를 존경하기도 한다는 게 놀랍군, 요."

"에버그린 남작은 당시 황실 위에 군림하려는 교황의 행태에 반발한 몇 안 되는 영웅이거든요. 자, 여기가 입구입니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루시안은 두 손을 모으고 짧은 주문을 외웠다.

"신의 명을 받은 그분의 자식이 악마를 물리칠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니 오랜 분노를 거두시고 저희를 기쁘게 반겨 주소서."

기도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특유의 불량한 인상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신실해 보였다.

그의 목걸이에 달린 작은 성검이 빛을 냈다.

쿠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초상화가 옆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액자 뒤에 숨겨져 있던 벽면이 드러났다.

[내가 흘린 피를 기억하라]

그곳에는 피로 쓴 것처럼 붉은 신성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내 문자들이 흩어지며 벽이 그들을 향해 열렸다.

"윽...."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너머에서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히 따라오세요, 황자님. 여기서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루시안은 제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작은 성검이 등불처럼 길을 밝혀 주었다.

두 사람은 그 작은 빛에 의지한 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러기를 잠시, 금방 굳게 닫힌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안은 작게 난 열쇠 구멍에 목걸이를 가져갔다.

"보셨듯 이곳은 허락받은 자들만이 들 수 있는 공간입니다. 황자님이 여기에 온 것도, 제가 황자님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참 신기하지 않나요."

끼이익-.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환한 빛이 쏟아지며 안쪽의 공간을 밝혔다.

원형 공간을 둘러싼 진열장에는 수많은 아티팩트와 마도구, 마계의 술과 눈에 익은 악마들의 뿔이 전시되어 있었다.

"저건 뭐지?"

로베르는 그리운 마계의 술병들마저 뒤로하고 홀린 듯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유리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신성함으로 무장한 공간에서, 홀로 칠흑같이 새카만 검이 하늘을 겨눈 채였다.

화려한 은색 장식이 날렵하게 뻗은 검신을 감쌌다. 손잡이에 박힌 투명한 보석이 로베르의 눈을 비추었다.

"이곳의 주인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검이자, 그를 죽인 검이죠."

"뭔가 끌리네. 이걸로 하면 좋겠는데요."

"그런 종류의 아티팩트는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직접 주인으로 선택받아야...."

쿠우웅-! 투명한 보석에 자색 빛이 차오른 순간, 검이 크게 진동했다.

"황자님, 뒤로 물러서세요!"

루시안이 다급히 손을 올려 제 머리를 감쌌다.

쨍그랑! 뒤이어 검을 가두고 있던 진열장이 산산이 조각났다.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검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천장을 뚫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혀 순식간에 추락했다.

쾅! 굉음이 울리며 검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로베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검을 쥐었다.

그러자 검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아티팩트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은색 브로치가 로베르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하하, 검이 새로운 주인을 알아보는군요.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인데...."

루시안이 당혹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성 영웅의 죽음 이후, 줄곧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검의 새로운 주인이 등장했다.

'막내 황자가 자꾸 골치 아픈 변수를 만들어. 아니, 어쩌면 이 황자가 변수 그 자체일지도.'

그러나 그조차도 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유언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의 뜻을 이어받아 이 검을 완성하는 자, 감히 신이 되려 한 인간들의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다.]

[27]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7화. 교황청의 사제들 (5)

로베르는 손에 들어온 영롱한 브로치를 세게 쥐었다. 날카로운 은장식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걸 꼭 가져야겠어.'

검을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만으로 검을 가져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피부가 찢겨 브로치에 핏자국이 남는 걸 보면서도 로베르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안이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황자님을 위해 준비된 검은 그게 아닙니다. 다른 검을 가져가려면 교황 성하의 허가가 필요한데, 지금은 그분의 대리자인 제게 달린 일이겠죠."

"내가 가져도 된다는 뜻인가, 요?"

"그 검을 꼭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으신가 봅니다. 왜일까요? 사용법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유물일 뿐인데."

'저주 검'이라는 이명을 가진 그 아티팩트는 신성 영웅인 에버그린 남작의 유작이었다.

전쟁 이후 악마 토벌이 한창이던 시절, 에버그린 남작은 피를 나눈 동료들을 차례대로 잃으며 허무주의에 빠졌다.

그는 이 끝없는 싸움을 끝내려면 마계와의 경계를 다시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를 가능케 하기 위한 아티팩트 개발에 주력했다.

그러나 아티팩트의 재료로 악마의 심장까지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는 한순간에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당시 교황은 그의 연구를 중단시키고 아티팩트들을 전부 몰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자신을 잡으러 온 동료들의 앞에서, 에버그린 남작은 그 검으로 목숨을 끊었다.

[내 인생을 바치고도 완성치 못한 검을 쥐게 될 자 누구인가. 신이 되려는 어리석은 자들은 결코 가질 수 없으리라.]

그의 동료들이 전한 유언대로, 지난 수십 년간 누구도 검의 봉인을 풀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고 무슨 힘을 가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저 신성 영웅의 삶을 망친 '저주의 검'으로 남았을 뿐이죠."

"저주 검이라, 그야말로 내게 딱 맞는 무기군요."

로베르는 검에 얽힌 긴 이야기를 시큰둥한 한 마디로 일축했다.

아하하! 그 말에 루시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온몸을 들썩이며 웃어젖혔다.

'아까부터 뭘 자꾸 처웃는 거야. 기분 나쁘게.'

어린 소년 같은 면이 남아 있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모습은 어딘가 기괴해 보였다.

로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루시안은 애써 웃음기를 거두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역시 그 검은 황자님이 가져가는 게 좋겠어요. 교황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과 달리 저는 도박을 꽤 즐기거든요."

행운마저 나의 편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신의 가장 큰 사랑을 느낄 수 있답니다.

루시안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뒤늦게 회수하려 한다면 그땐 늦습니다."

로베르는 그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다시금 못을 박으려 했다.

"설마 그런 치졸한 짓을 할 리가요. 그 검은 이미 황자님의 것입니다."

'저주가 깨졌는데도 억지를 부려 날 순회에 끼워 넣은 것만으로 이미 치졸함이 도를 넘지 않았나.'

그러니 그가 흔쾌히 무기를 내어주는 게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루시안이 장갑을 벗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약속이라도 하면 믿으실까요."

"됐습니다,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배워서."

아타나스의 경고를 떠올린 로베르는 단칼에 루시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루시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누구한테 배웠는지 알 만하군요. 황자님의 스승 되는 자는 약속이란 걸 할 때마다 인생을 말아먹었으니...."

그는 아타나스에 관해 제법 많은 걸 아는 눈치였다.

'은근히 티를 내는 걸 보면 나한테 정보를 흘리고 싶은 모양이군. 그놈을 엿 먹이려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정보가 필요한 제게는 나쁠 게 없었다. 로베르는 모르는 척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했다.

"스승님이 인생을 말아먹었다니요? 사실 이상하긴 했습니다. 분명 귀족들마저 고개 숙이는 고귀한 사제라고 들었는데, 정작 교황청에서의 취급은 그렇지 않은 듯하여...."

"아타나시오 사제는 바깥에서는 이 성전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영웅이어야 하고, 여기서는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노예여야 하니까요. 전부 이곳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입니다."

비천한 출신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진 아타나스를 특권 사제로 만든 것은 오로지 악마를 사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타나스의 명성은 전부 교황청의 것으로 삼고, 내부에서는 출신을 문제 삼으며 위치를 거듭 각인시킨다.

쉽게 그들의 방식을 파악한 로베르는 상상 이상의 교활함에 혀를 내둘렀다.

"주인은 그렇다 치고, 그도 그걸 원한답니까? 대체 왜?"

로베르의 질문에 루시안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가 뭘 원하는지가 중요한가요, 지난 약속들로 그의 영혼과 육신은 이미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아는 척 떠들더니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놈한테 협박당해서 내가 그걸 강제로 나눠 가지게 된 건 어떻게 설명할래?'

로베르의 눈에서 못마땅한 기색을 읽어 낸 루시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황자님이 같은 처지가 될 일은 없으니, 저와 이곳 사람들을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황자께서는 원하신다면 언제든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진창을 구르며 쓰레기나 주워 먹던 전쟁고아와는 다르게."

루시안은 아타나스와 사제 관계에 있는 황자 앞에서도 서슴없이 그런 말들을 내뱉었다.

로베르는 그가 아타나스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우습게 여기고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괘씸하게....'

앞으로 그와 같은 인간들을 수없이 마주칠 생각을 하자 벌써 골치가 아팠다.

"황자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황자님은 편한 길을 두고도 외나무다리로 향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때, 루시안이 뜬금없이 물어 왔다. 로베르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모르겠고, 가장 편한 길로 갈 방법이나 알고 싶네요."

"하하! 그런 분이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잠시만 여기 계시겠어요? 아직 황자님께 드릴 물건들이 많이 남았거든요."

루시안은 그 답이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계속 실실 웃으며 보관실 곳곳을 쏘다니더니, 손수 보급품들을 찾아 로베르의 앞에 대령했다.

"이건 보호구입니다. 아타나시오가 곁에 있으니 딱히 필요는 없겠지만,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지니고 계세요."

로베르는 투명한 방울이 촘촘히 달린 팔찌를 건네받았다.

"이건 구마 의식에 쓰이는 기본 아티팩트이고, 이건 통신구입니다. 보관할 곳이 필요할 때는 여기 두시면 됩니다."

루시안은 뒤이어 작은 성검이 달린 목걸이와 귀에 거는 형태의 통신구, 신성 문자가 쓰인 가죽 주머니를 전해 주었다.

"이제 끝인가요?"

"그렇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이번 순회를 위한 기도를 올리셔야 하는데, 그건 아타나스가 대신 하지 않겠어요?"

"기도에 충실한 사제라니, 알아서 하겠죠."

로베르는 주머니를 열어 저주 검을 포함한 모든 아티팩트를 집어넣었다.

아직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남은 탓에 찝찝하긴 했지만, 당장 이 불쾌한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기도라...."

루시안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편한 길로 가고 싶다고 하셨죠. 제가 그 방법을 일러 드리지는 못해도, 충고 정도는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아타나시오의 눈을 멀게 하세요. 그럼 그는 더 이상 황자께 위협이 되지 못할 겁니다."

루시안의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로베르는 이번만큼은 그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제게 위협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타나시오는 주인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상대를 반드시 패하게 할 지나치게 좋은 카드니까요. 그런 그가 지금 황자님 곁에 있으나 황자님 손에 있지는 않으니, 가장 큰 위협이 아니겠어요."

"...그런가."

"만약 저라면, 단번에 게임을 끝낼 카드가 내 손에 없다면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빼앗을 겁니다. 혹은 쓸 수 없게 찢어 놓거나. 황자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실 건가요?"

"확실하게 빼앗아야지, 요."

루시안이 한 충고는 막내 황자의 위기의식을 자극하려던 원래 목적과 다르게 작용했다.

'그렇게 좋은 게 나한테 거저 굴러왔단 말이지?'

신과의 이중 계약이라는 듣도 보도 못 한 상황을 만든 계약자의 처우에 대한 마왕의 고민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신의 속박 따위 심장만 쌩쌩해지면 바로 깨트려 주지. 하지만 자유를 원했다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아타나스. 이제부터는 오직 내게만 승리를 안겨 주도록 해라.'

이미 아타나스는 신을 등지고 마왕을 찾아와 계약했다. 그 순간부터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을 상대로 제 승리를 확신한 로베르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 * *

순회 전에 찾아뵙겠다는 말과 달리, 아타나스는 일주일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직접 쓴 편지 하나가 자수정궁으로 도착했다.

"한 번은 오겠다더니, 대체 뭐가 그리 바쁘시길래."

로베르는 교황청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찢고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제국의 지도와 순회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신성 제국은 중앙 수도와 교황령 이외에 아홉 개의 주요 지방으로 나뉘었다.

황실에 직속된 백작령이 넷, 비교적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는 공작령이 셋.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들이 다스리는 주교령이 둘.

마계와 인접한 북부의 변경백령과 남부의 대공령이 각각 주교령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그 탓에 두 영지는 다른 귀족들의 영지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제국 순회는 악마의 출현이 거의 없는 교황령과 주교령들을 제외한 세습 귀족들의 영지 위주로 이루어진다. 이거, 인간들이 황제보다 교황을 따르는 이유가 있었군."

악마가 침략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영토는 제국 전체에 신의 힘을 공인하는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축복받기 위해서는 신을 섬겨야 한다는 제국민들의 믿음이 더욱 강해졌고, 교황청과 충돌하는 황실의 지지자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추신, 순회에 나서는 날까지 매일 주문을 연습해 두세요. 악마의 권능과 작동 원리는 비슷한 듯하니 금방 할 수 있을 겁니다? 명색이 스승이라는 놈이 성의하고는."

로베르는 코웃음 치며 편지를 구겨 버렸다. 그러고는 밀린 여흥을 즐기며 당분간 오지 않을 평화로운 나날을 만끽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순회에 나서는 당일이 되었다.

"황자님, 이제 슬슬 나설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는 날, 자수정궁의 궁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기상해 로베르의 시중을 들었다.

로베르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평소처럼 세안하고 옷시중을 받았다.

특권 사제의 법복과 비슷하게 디자인된 의복은 황실의 것과 달리 단출했다. 하녀 메리는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옷을 입혀 주었다.

"저야 그렇다 쳐도, 앤디 님조차 따라가지 못한다니. 그럼 우리 황자님 시중은 누가 들어 줄까요."

"제 말이요. 풀린 구두끈조차 시종의 손을 빌려야 하는 분인데...."

앤디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로베르는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앤디 너라도 같이 갈래? 아타나스를 잘 구슬리면 한 명쯤은 끼워 줄 것도 같은데. 아니면 몰래 따라와도 되고."

"아, 아니요? 감히 그럴 수는 없지요. 사제님들을 속이는 것은 루멘님을 능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앤디가 파드득 몸을 떨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뒤늦게 로베르의 눈치를 살폈다.

"너도 참 웃기는 인간이라니까."

로베르는 고개를 젓고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인간계에 왔음을 단번에 알게 했던 푸르른 하늘이 펼쳐졌다.

저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로운 줄로 알았건만, 그건 사실이 아닌 듯했다.

'당분간 내 인생도 그렇겠지. 더럽게 가기 싫다....'

새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탓에 로베르는 가만히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고, 멀리서 빌어먹을 신성한 기운이 스며오기 시작했다.

이곳과 홀로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는 아타나스가 자수정궁으로 들어섰다.

"아타나시오 사제!"

그때, 저편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복을 미처 다 갖추지 않은 황제가 다급히 아타나스를 불러세웠다. 다른 황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로베르는 멍하니 각자 다른 얼굴을 한 가족들을 살피다가, 주머니를 챙겨 일어섰다.

"나 다녀온다. 다들 집 잘 지키고 있어."

"네? 그래도 입구까지 저희가 함께...."

"이쪽이 더 빠른데, 뭣 하러."

로베르는 앤디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바람을 가르며 안뜰 위에 깔끔하게 착지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도요."

아타나스는 막 황제와 인사를 나누던 중이었다. 로베르는 아타나스의 인사에 편승하며 곧장 그와 나란히 섰다.

"로, 로베르? 갑자기 어디서...."

조너선을 비롯한 황족들이 흠칫 놀라며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반면 아타나스는 태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일찍 나오셨군요, 황자님."

"너는 너무 늦었고. 그나저나 다들 저를 배웅해 주러 오신 겁니까? 영광이네요."

로베르는 건성으로 답하며 가족들을 둘러봤다.

아쉬운 얼굴을 한 황제 조너선. 무표정한 황후 유리아와 평소처럼 가식적인 웃음을 띤 하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율란까지.

이 중에 진짜 로베르를 죽이려 했던 범인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지만, 코어에 남겨진 로베르의 영혼 조각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먼 길을 떠나는 자신을 배웅하러 와 주었다는 사실 만으로 미약하게나마 기쁨이 느껴지는 걸 보면.

'역시 너는 참 우스운 놈이구나, 로베르.'

그 사실이 불쾌한 지금의 로베르가 시선을 거두려던 차에, 시야 한구석이 붉어졌다.

"어이, 거기. 형제를 두고 먼저 가면 쓰나."

붉은 머리를 가진 둘째 황자가 로베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불길하게도, 아카키는 평소와 달리 법복을 차려입고 로베르의 것과 비슷한 주머니를 허리춤에 멘 채였다.

마치 그들과 함께 순회를 떠나는 사람처럼.

"망할 사제 놈아. 이런 말 없었잖아."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요. 왜 당신 형님이 여기서 나옵니까?"

아타나스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되물었을 때, 로베르는 직감했다.

이건 정말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음을.

아카키는 그런 그들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어 보였다.

[28]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8화. 말할 수 없는 비밀 (1)

며칠 전, 무작정 순회를 미루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카키 앞으로 대공의 전갈이 도착했다.

거칠게 눌러쓴 글자마다 뒤늦게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파토르의 분노가 엿보였다.

아카키는 처음으로 대공령에서는 통신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교황령과 영지전이라도 벌이고 싶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참아야겠지.

네 사촌 세라는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서, 당분간 내가 곁에 있어야 할 듯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공령에도 여러 문제가 생겼더구나. 급한 불을 끄고 이곳을 안정화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그래서 말인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아카키 네가 로베르 쪽에 합류해서 순회를 함께할 수는 없을까.

아타나시오 사제는 네가 아끼던 동료를 죽이고 너까지 죽이려 한 전적이 있는 놈이지.

교황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진즉 사형당했을 놈이 아직도 제국을 쏘다니며 신성 영웅으로 추앙받는 게 얼마나 한탄스러운지 모른다.

로베르를 그런 놈의 손아귀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이건 대공이기 이전에 너희들의 숙부로서 하는 부탁이다.]

로베르의 곁에서 아타나스를 저지하며 시간을 끌어 달라는 것이 긴 편지의 요지였다. 아카키는 펜을 들고 짧은 답장을 썼다.

[음, 봐서요.]

교황청에서 자신이 두 사람의 동행에 끼어드는 것을 반길 리가 없었다.

'일단 아타나스 그놈부터가 격렬히 반대할 텐데.'

아카키는 아타나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터였다. 그건 교황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숙부의 간절한 부탁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탓에, 아카키는 특권 사제들을 담당하는 루시안 추기경에게 요청을 넣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뜻밖에도 허가가 떨어졌다.

"...허가한다고? 루시안, 설마 네 독단이냐? 뒷일은 어쩌려고 그래?"

"무슨 소리야, 아카키. 그런 엄청난 요구를 해 놓고. 내가 너의 친우라는 이유로 뒤를 봐주고는 있지만, 이번 건은 당연히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어. 교황께서 직접 허가하신 일이야."

"교황이 허락했다니, 그게 사실이야?"

"그래, 성하가 아무리 날 아끼셔도 대놓고 그분 뜻을 거스를 수는 없어. 이미 멋대로 로베르 황자에게 저주 검을 내준 일로 엄청나게 혼났는걸."

"로베르가 저주 검을 가졌다는 거야? 에버그린 님이 남긴 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그래, 아카키오 사제님.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예전의 황자가 아니더라. 분발해야겠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카키는 비로소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사제가 된 뒤 처음으로 순회를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감추어 뒀던 오랜 비밀을 고백할 그날을.

"로베르, 아마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아카키는 하론에게 조소를 흘리고는 로베르의 앞에 섰다. 로베르는 대놓고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기다렸는데?"

"나도 정식으로 순회에 끼게 됐거든. 당분간 잘 부탁한다, 아우님."

아카키의 말에 황족들이 일제히 놀란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 당황한 듯 보였다.

"...교황 성하의 허가 없이는 불가한 일입니다."

못지않게 당황한 얼굴을 한 아타나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그 말에 하론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럼 그렇지. 아카키오, 너는 왜 항상 이렇게 제멋대로니. 이제 사제님까지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아카키는 하론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타나스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정말 교황의 뜻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새 주인에게 버림받았냐? 그간 바친 충성의 대가로는 가혹하네."

"설마 교황께서 허락했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바로 그거야."

"하...."

아타나스는 순간 증오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쉽게 드러내지 않는 진심 어린 얼굴을 엿본 아카키는 그것이 누구를 향한 감정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일단 알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죠."

"엥? 진짜 같이 간다고?"

아타나스의 격렬한 반대를 예상했던 로베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면, 뜻밖의 소식에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구나! 로베르를 혼자 보내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아카키 황자가 함께 간다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돼."

조너선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황후가 못마땅한 기색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교황께서 2황자의 동행을 허락하신 게 사실인가요?"

"2황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저희는 형제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타나스는 언제 동요했냐는 듯 차분하게 대꾸했다.

아카키가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는 동안, 하론과 율란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그러면 아타나스가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이제라도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하시면...."

아타나스는 황녀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전하."

"아, 그, 그렇군요...."

율란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론은 달래듯 율란의 어깨를 쓸어 주고 대신 말을 이어 갔다.

"교황께서 아타나시오 사제를 특히 아끼시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말씀이라도 한번 전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철없는 제 아우들이 사제님에게 방해가 될까 우려스러워 그렇습니다."

"두 분 역시 루멘님의 부름을 받아 길을 나서는 것인데, 방해라니요. 누구도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아타나스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 황자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하론의 눈에 싸늘한 빛이 서렸다.

"정 그러시다면 보탤 말은 없겠군요."

"황자님의 배웅에 감사드립니다."

하론은 이를 악물고 황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다녀오렴, 로베르. 그리고 아카키오."

"예, 뭐."

"두 번이나 인사를 하고 그러세요, 황송하게."

로베르와 아카키가 차례대로 답했다. 슬슬 배웅이 마무리되던 차에, 황제가 두 황자에게 손짓했다.

"잠깐, 이리 와 보거라."

조너선은 가까이 다가온 두 아들의 손을 맞잡아 쥐었다. 두 사람이 질색하며 손을 빼내려 하자, 떨리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는 못난 아비라는 건 안다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너희들이 무사히 귀환하는 것이야. 알겠지?"

로베르는 위협 앞에 아들을 두고 홀로 물러서는 모습도, 아침부터 배웅을 나와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전부 조너선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이라는 놈들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아들을 걱정한다면 위협 앞에 내버려 두지 말아야 했고, 버렸다면 뒤돌아보지도 않아야 하는 것을.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로베르를 아끼는 조너선의 마음이 느껴진 탓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너무 마음... 아, 모르겠다. 아무튼 잘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로베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내놓은 말에 조너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너선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 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잘 다녀오거라, 로베르."

상황을 지켜보던 아카키는 기가 차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뭐 하는 짓인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비난임을 알아차린 조너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도 잘 다녀오라는 말은 진심이야. 다시는 다치지 말고, 응?"

"...예."

아카키는 짧게 답한 뒤 먼저 뒤돌았다.

"황자님들은 제가 잘 모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폐하."

아타나스는 황족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아카키를 뒤따랐다.

로베르는 일행을 따라가려다 말고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황후를 빤히 쳐다봤다.

"황후, 우리 아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처음으로 먼 길을 떠나게 되지 않았습니까."

로베르의 시선을 느낀 조너선이 먼저 말문을 터 주었다. 그러나 황후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앞서간 아카키가 로베르를 재촉했다.

"야, 뭐 하고 섰어! 안 가냐?"

"갑니다."

"...다녀오거라."

로베르가 하는 수 없이 떠나려던 순간, 유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먼저 등을 돌렸다.

로베르는 그새 익숙해진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제 일행에게로 향했다.

"설마 이대로 궁 밖까지 걸어서 나가야 하나? 마차가 안 되면 말이라도 타고 가면 되잖아."

고작 몇 걸음 가지 않아 금세 걷는 것이 귀찮아진 로베르가 투덜거렸다.

"다른 영지로 이동할 때마다 이동 스크롤을 써야 해서 말은 방해됩니다. 앞으로 짧은 거리는 걸어서 이동할 테니 익숙해지세요."

"걱정하지 마라, 아우님. 다행히 오늘 갈 그레이 백작령의 주인은 황족이라면 껌뻑 죽는 인사거든. 그쪽 가문 마차를 빌리면 그만이야."

"아, 아타나스!"

그때, 뒤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그들을 쫓아온 율란이 제 오라버니들을 지나쳐 아타나스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 아타나스가 움찔 놀라며 몸을 비틀어 그녀와 떨어졌다.

"조심해라, 율란. 이 자식은 뭔 병이라도 있는 놈처럼 여자랑 닿기만 해도 발작하니까. 여자 앞에서는 장갑도 안 벗는 걸 보면 몰라?"

"무슨 그런 병이 있대? 반대라면 모를까."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황자를 뒤로하고 아타나스가 성가신 표정으로 율란을 내려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황녀님."

율란은 싸늘한 반응을 예상했는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꼭 드리고 싶어서요."

손수건의 귀퉁이에 은방울꽃이 수놓여 있었다. 자수가 서툴고 조잡한 탓에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 티가 났다.

"이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황녀님의 선물에 매번 악마의 피를 묻혀야 하는 제 입장도 이해해 주세요."

"아, 그, 그럴게요. 그래도 늘 받아 주시니까 기뻐서.... 이번까지만 받아 주시면 안 되나요?"

율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아타나스는 뒤통수에 두 황자의 따가운 시선이 내리꽂히는 걸 느꼈다.

아카키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고, 로베르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하."

'황녀의 선물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도 이해해 주면 얼마나 좋을지.'

아타나스는 애써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손수건을 품에 넣었다.

그의 속내를 까맣게 모르는 율란은 수줍은 표정으로 진심 어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타나스. 늘 아타나스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저 또한 황녀님을 포함한 제국민들을 위해 살 수 있어 기쁩니다."

"야, 네 눈에 오라버니들은 보이지도 않냐? 교황네 개 앞에서 쪽을 주는 걸로 모자라서 이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네."

아카키가 심사가 뒤틀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율란은 못마땅한 눈으로 제 형제들을 번갈아 봤다.

"잘 다녀오든지 말든지."

도저히 인사 같지 않은 한 마디를 남기고 율란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 *

그들은 최대한 조용히 길을 나서기 위해 황궁의 뒷문을 이용해 빠르게 성벽 밖으로 향했다.

"하여튼 유일한 여자 형제라고 오냐오냐했더니, 하는 짓 봤지?"

아카키는 가는 내내 율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금방 성문 앞에 도달했다.

두 황자를 발견한 뒷문의 기사들이 힘차게 경례했다.

"부디 건투를 빕니다, 황자님들! 위대한 에피파네스 황가를 위하여!"

"그래, 수고."

아카키는 익숙하게 답해 준 뒤 가장 먼저 성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로브를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황자님도 입으세요."

이미 한참 전에 로브로 모습을 가린 아타나스가 비슷한 옷을 내밀었다.

"왜 이런 걸 입어야 하는데? 답답하게."

"순회 중에는 늘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움직여야 하니까요."

로베르는 마지못해 느릿느릿 로브를 둘렀다. 그사이 아카키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아무튼 누가 걔 성질머리를 평생 감당하고 살지 모르겠다니까. 제발 나타나 달라고 매일 기도라도 올려야겠어."

"왜, 이 사제 놈이 율란 옆에 주저앉을 수도 있지."

로베르가 아타나스를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 주기라도 하지...."

아타나스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하고는 이어지는 말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서로 전혀 예의를 차리지 않는 모습은 아카키가 생각한 사제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달갑지 않은 과거를 떠올린 아카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아우님, 그새 그놈이랑 친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내가 분명 친히 찾아가서 경고해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타나스를 믿지 마라. 기억하고 있어. 근데 상황이 좀 우습게 돌아가서, 지금은 그나마 믿을 만한 놈이 이 사제밖에 없게 돼 버렸거든."

"대체 어떤 장단에 놀아났길래 저 새끼가 믿을 만한 놈이 된 건지, 똑바로 설명해라."

아카키는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로베르를 추궁하려 들었다.

'이 형님, 상당히 성가시게 구네.'

로베르는 아타나스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대신 처리하라는 신호를 알아들은 아타나스가 마지못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 전에, 다른 말부터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말에 아카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푸른 눈이 이글거리는 분노로 타올랐다.

"너, 그때 그걸로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은 줄 알지."

"아닌가요?"

"잠깐잠깐. 갑자기 둘이서 뭔 소리를 하는 건데?"

앞선 상황을 모르는 로베르가 뒤늦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카키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말도 안 했나 봐? 로베르를 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더니, 결국 내 약점을 잡으려는 것뿐이었구나. 너란 새끼는 정말 발전이 없어."

"...."

"그런데 어쩌지, 난 너 같은 새끼랑은 다르게 죄짓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이제라도 알게 된 이상, 다 밝힐 생각으로 왔거든. 로베르, 네 신성력 말인데. 그거...."

모든 진실이 밝혀지려는 찰나, 어디선가 불길한 빛이 일렁였다.

오래전 아카키의 코어에 새겨진 신성 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아타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 입 다물어...."

"율란이 신성력 각성... 커헉!"

신성 문자가 사슬이 되어 코어와 목을 동시에 조였다. 아카키는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켁, 쿨럭, 이게 뭐...."

그러고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목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레 기침했다.

"방금 율란이라고 한 거지? 왜 말을 하다 말아, 내 신성력이 뭐."

그러거나 말거나 로베르는 답을 재촉하기 바빴다. 아타나스는 혀를 차며 그런 로베르를 뒤로 밀어냈다.

"물러서 계세요."

"왜?"

펑! 그 순간 아카키의 코어에서 폭발이 일었다.

후두둑. 주저앉은 아카키의 밑으로 검붉은 피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아카키는 멍하니 바닥을 징그럽게 수놓은 자국들을 바라봤다.

"신을 두고 한 맹약을 어기셨군요, 황자님. 덕분에 참회할 유일한 기회를 잃으셨네요."

아타나스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29]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9화. 말할 수 없는 비밀 (2)

신의 이름을 빌려 하는 말에는 힘이 깃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책임이 뒤따른다.

사제는 언어로 맺어진 맹약을 통해 신에게 닿을 수 있는 자들인 동시에, 그 맹약에 사로잡힌 볼모이기도 한 것이다.

맹약을 깨트릴 시 발생하는 반동은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켁, 커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맹약을 어긴 아카키는 그 반동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다.

그는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선혈이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빌어먹을...."

아카키는 신성력을 코어에 응집해 타격을 막아 보려 했으나, 이미 제어권을 잃은 뒤였다.

"뭐야, 왜 그래? 어이, 사제. 형님이 갑자기 왜 피를 토하는 거지?"

로베르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타나스는 잠자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께서 황자님의 코어를 봉인한 범인과 무슨 약속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지금은 그 약속을 깨려 한 대가를 받으시는 중이고."

"...역시 네 예상이 맞았나. 이왕이면 아니길 바랐는데."

정말 아카키가 자신을 위협하는 무리 중 하나였다는 걸 확인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황자님, 혹시... 아닙니다."

아타나스는 무언가 물으려다 아카키를 의식해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아카키는 핏발이 선 눈으로 아타나스를 올려다봤다.

"쿨럭! 그게, 뭔 소리야. 봉인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건가. 하여간 쓸모없긴...."

딱. 동시에 아타나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카키의 코어를 부서뜨릴 듯이 조여 가던 사슬의 움직임이 멎었다.

"신체의 시간을 멈춰 뒀으니 당장은 반동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덕분에 편하게 진실을 듣기도 글렀고, 더 움직이지도 못하겠네요. 우선 오늘은 가까운 숙소를 찾아가 쉬도록 하죠."

"...."

퉤. 아카키는 말없이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아타나스의 말대로, 그는 의도와 상관없이 순회 첫날을 완전히 망쳐 놓았다.

무섭게 급소를 조여 오던 압박감이 가시자 수치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카키는 감히 로베르를 마주 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아타나스는 간단한 처치를 끝낸 뒤 그에게 율란이 준 손수건을 건넸다.

"닦으세요, 온 세상에 황자님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으시다면."

"넌 선물을 이딴 식으로 취급하냐? 꺼져, 새끼야."

아카키는 옷소매로 피를 대충 문질러 닦으며 일어섰다.

"따라와. 이 근처에 머물 만한 곳은 내가 꿰고 있으니까."

그는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뒤늦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로베르를 힐끗거렸다.

"내 의사가 중요하긴 한가? 가자."

그렇게 그들은 아카키가 자주 들른다는 수도 외곽의 한 여관으로 향했다.

* * *

부유한 여행객들을 위해 지어진 고급 여관은 외관부터 넓고 화려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남녀들이 술과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가지고 복도를 오갔다. 환한 창문 틈새로 들뜬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으로 늘 이런 곳에서 먹고 자는 건가? 시끄러운 것만 빼면 나쁘지 않군."

나름대로 만족한 로베르와 달리 아타나스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자와 사제들이 머물기 좋은 숙소는 아닐 텐데요. 순회 중에 들를 곳은 더더욱 아니고."

"난들 오늘 안에 교구청으로 못 갈 줄 알았겠냐? 오히려 이런 곳이 눈속임으로 좋다고. 무슨 문제가 생겨서 경로를 틀었다고는 생각 못 할 테니까."

"아이고, 오셨습니까요. 미리 언질 주셨으면 제일 좋은 방으로 준비해 뒀을 텐데...."

그때, 멀리서 목소리만으로 아카키를 알아본 여관 주인이 다급히 달려 나왔다.

"아니, 어쩐 일로 사제님까지 오셨습니까? 그렇다는 건 이분이 바로 그...."

아타나스에 이어 로베르를 마주한 여관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베르는 성가신 표정으로 로브를 더 눌러썼다.

아카키는 말이 길어지기 전에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내놓았다.

"내 방이랑 그 옆방 두 개. 안내는 필요 없고, 누가 문을 두드리는 일도 없게.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오늘도 이용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쇼."

늘 그렇듯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웃돈을 얹어 받은 여관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열쇠를 내주었다.

그들은 조용히 위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를수록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하, 진짜 뒈지겠네."

비로소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복도에 다다랐을 때, 아카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뭐야, 내가 유달리 체력이 나쁜 게 아니었잖아."

못지않게 지친 얼굴을 한 로베르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타나스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맹약을 어긴 반동은 칼로 급소를 여러 번 관통당하는 것과 비슷한 타격을 줍니다. 한마디로 황자님 체력은 죽기 직전의 치명상을 입은 아카키 황자님과 간신히 맞먹는다는 얘기죠."

"쳇, 너도 온전치 못한 심... 코어로 살아 보든가. 숨 쉬는 것만으로 지쳐서 체력 단련 따위 꿈도 못 꿀 거다."

사실 지금은 상태가 꽤 좋아졌고, 단순히 귀찮아서 하기 싫었던 거지만.

로베르가 대충 둘러댄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아카키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아타나스는 한숨을 내쉬며 아카키의 손에서 열쇠를 가로채 로베르에게 건네주었다.

"이쪽 문제를 해결하고 들를 테니 황자님은 먼저 방에 가 계세요. 혹시 그사이에 술을 마시거나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아, 이런 곳은 방마다 술이 있나 보지? 좋은 정보 고맙다."

로베르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짜증 나는 에피파네스 놈들."

아타나스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아카키를 억지로 일으켰다.

"황자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입조심해, 황실 모독죄는 사형이다."

"교황 모독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키의 경고에 아타나스가 냉소적으로 응수했다. 그러고는 그를 질질 끌고 방으로 향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깊은 정적이 흘렀다. 아타나스는 아카키를 침대 위로 던져 놓고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는 이제 아타나스의 행실을 지적할 힘조차 남지 않은 탓에 힘겨운 숨만 몰아쉬었다.

아타나스는 목걸이를 풀어 아카키에게 던져 주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목걸이 줄을 잡았다.

"뭐냐?"

"황자님도 본인이 한 맹약에 대해 모르시는 듯하여 우선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을 아끼시고 제가 알아들을 수만 있게 답하세요."

아타나스가 목걸이에 달린 작은 검과 새하얀 벽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아카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벽에 너만 알아볼 수 있는 답을 새기라는 거지. 이런 장난질로 맹약을 피해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라는 거 아닙니까. 방법은 기억하시겠죠? 해와 달이 좋겠군요."

과거 아타나스는 수없는 시도 끝에 맹약의 허점을 찾아냈다. 맹약 역시 그 본질은 신성 주문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모든 신성 주문은 더 강력한 신성 주문으로 상쇄할 수 있다.

맹약을 깨트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속박을 피해 그 상대와 내용에 대한 실마리를 전달하는 것쯤은 가능했다.

단 한 사람, 자신조차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자와의 맹약을 제외하면.

"혹시 상대가 교황일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타나스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기만을 바라며 먼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치익-. 아카키는 의아한 표정으로 벽에 보름달을 그렸다. 그러고는 만월 형태에서만 드러나는 달 가장자리의 반점을 표시했다.

세상을 밝히는 태양과 달리 어두운 밤에 뜨는 달은 부정을 상징했다. 끝까지 차오른 달은 완전한 부정 표현으로, 상대가 교황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오늘 시체를 치우는 일은 없겠군.'

아타나스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왜 그런 걸...."

"질문은 저만 합니다. 신성력이 전혀 없는 일반인과의 약속이 때로는 더욱 강한 맹약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아카키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이미 그려 놓은 달 위에 검을 꽂았다. 그 사실을 처음 듣는 눈치였다.

'맹약에 대해 자세히 아는 자는 극소수고, 아카키 황자에겐 정보를 제한했으니 정말 몰랐을 수도.'

그 사실을 아는 교황청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맹약을 맺었는지, 간절한 약속이 우연히 맹약으로 작용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확인된 건 하론 이외에 공모자가 있을 가능성 정도였다.

아타나스는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는 상황이 답답한 탓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 황자님의 코어가 봉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 소린데. 봉인이라니?"

아카키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 내어 되물었다. 그러나 아카키의 코어에 새겨진 신성 문자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 사건에 관해 중요한 걸 알고 있음에도, 정작 봉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무엇인지 모를 그 비밀을 지켜 달라고 황자님께 사정한 이가 모든 일의 범인입니다."

"그러니까 로베르가 이제야 신성력 각성자로 발현한 게, 그때 내가...."

그가 충격을 받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 하자 신성 문자가 다시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허억-."

아카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통스레 가슴을 부여잡았다.

"확인은 여기까지 하죠. 이제부터 맹약을 어기기 전으로 황자님 신체의 시간을 되돌려 반동을 끝내겠습니다."

아타나스는 한숨을 내쉬며 기도를 위해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아카키가 목걸이를 세게 집어 던졌다.

텅-. 목걸이가 아타나스를 둘러싼 장막에 튕겨 나왔다. 아카키는 발치에 떨어진 작은 검을 노려봤다.

"나는 이미 맹약을 어겼다. 그런데 네 고유 주문으로 시간을 돌려 버리면, 그 반동이 고스란히 너한테 가잖아?"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너한테 빚지는 게 기분 더럽다고...."

아카키가 해묵은 증오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걸어 놓은 주문이나 풀고 꺼져."

"하하, 그랬다가 당신 숙부한테 무슨 꼴을 당하라고요."

"여기서 숙부가 왜 나와?"

아타나스는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그대로 교차시켰다.

쿠구궁-. 방 안의 공간이 그 움직임을 따라 뒤틀리기 시작했다.

"큭, 커헉-."

거대한 압력이 아카키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는 온몸이 일그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철없고 쓸모도 없는 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당신을, 제국의 황자라는 이유로 리스크를 감수해 가며 살려야 하는 제 기분이 훨씬 더럽지 않겠어요."

"끄윽, 너 이 새끼...."

"그러니까 좀 참고 사세요, 저처럼. 이제 누가 황자님이 애새끼같이 구는 걸 받아 준다고."

"...."

반항할 의지조차 잃은 아카키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곧이어 사방의 울림이 멎었다.

아타나스는 침대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 다시 목에 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이곳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식이 있습니다."

시동어와 함께 아카키의 위로 거대한 신성 문자가 씌어졌다.

"그러자 루멘께서 말씀하셨다. 구원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으니, 나의 이름으로 그 어리석고 가여운 자를 구하라."

아타나스의 태연한 음성을 들으며, 아카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로베르는 테이블에 놓인 보드카를 홀짝이며 드물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 형님 입에서 율란의 이름이 나왔었지.'

그렇다는 건 전혀 의심치 않던 율란 역시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형제들은 전부 제 코어를 봉인하고 저를 죽이려 한 범인이거나 그와 한패이고, 어머니는 자신을 증오하며 아버지는 비겁하고 무능했다.

유일하게 믿을 만한 숙부는 그에게 더 중요한 곳으로 돌아간 뒤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로베르로 살기로 한 건 그냥 편하게 놀고먹기 위해서였는데. 이건 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잖아."

어느 날 달갑지 않은 진실을 들고 나타나 자신을 협박하는 아타나스와 계약할 때까지만 해도, 진실의 무게를 실감하지는 못했다.

그저 해결할 방법이 있다니 방법대로 살아남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카키를 통해 저를 둘러싼 황궁의 진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자 마음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범인은 둘째 치고, 우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

처음으로, 자신이 이 몸에 들기 전 로베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 안에 지금의 혼란을 잠재울 열쇠가 있을 터였다.

로베르는 그 방법으로 자신의 고유 권능인 '침범'을 떠올렸다.

"성기사 결투 때 잠깐 발동이 되는 건 확인했으니, 군단장급 악마를 하나만 더 잡아도 인간을 상대로 쓸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침범의 권능을 되찾으면 직접 아카키의 의식에 구축된 시간선으로 들어가 진실을 파헤칠 수 있었다.

로베르가 군단장급 악마가 어느 정도 생존했을지 셈해 보던 그때,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황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보통 그걸 문을 따면서 말하냐?"

"대답이 어떻든 어차피 들어갈 거라서요."

뒤이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타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늘 넘쳐흐르던 신성한 기운이 사그라진 채였다.

아타나스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어느새 바닥이 드러난 술병을 힐끗 보더니 로베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카키 황자님에 관해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합니다. 직접 들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로 돌아왔네요."

"아, 지나간 일은 됐고."

로베르는 손을 휘저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에 바임이 네 사냥감이었다고 했지. 남은 사냥감 중에 군단장급 악마가 더 있나?"

"있긴 합니다만,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아무나 한 놈 잡아서 내 심장을 좀 더 채우려고. 그럼 내가 아카키 형님 머리를 강제로 열어 볼 수 있거든."

"아카키 황자님은 맹약에 걸려 계셔서...."

"그런 건 무시할 수 있어. 난 마왕이잖아? 내가 궁금한 건 상급 악마의 위치와 심장이 강해져도 지금의 코어가 버틸 수 있는지야."

아타나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카키 황자님의 머릿속을 본다는 건 쉽게 가능한 겁니까?"

"고유 권능만 되찾으면 바로 가능해. 네 능력으로 협조하면 정말 순식간에 끝날지도."

"좋습니다, 그럼 해 보죠."

아타나스는 제국 지도를 꺼내더니 엑스 자가 표시된 북부 지역을 가리켰다.

"여기, 변경백령 근처에 악마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내일 잠시 그곳에 들르죠. 군단장들의 거처에 접근하다 보면 몇 놈쯤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운이 없다면 거기서 며칠 정도 묵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난 운이 더럽게 좋거든."

로베르가 잔을 깔끔하게 비우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타나스는 빈 잔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덧붙였다.

"아, 그리고 볼일이 끝나면 아카키 황자님은 거기에 버리고 올 겁니다."

"...엉?"

악마의 숲에다 뭘 버린다고? 로베르는 잘못 들었나 싶어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아타나스는 제대로 들었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3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30화. 말할 수 없는 비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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