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0화. 그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다 (2)
벨페고르의 가장 충직한 심복, 이슈타르는 누누이 말했다.
"마왕님의 모가지 위에 달린 그것은 장식인가요? 쓰지도 않을 거, 그냥 떼 버리시는 게 어떨지. 굳이 무거운 것을 계속 달고 다닐 요량이시라면,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하세요."
그럴 때마다 벨페고르는 생각했다.
네가 대신 해 줄 텐데, 굳이?
그러나 지금, 로베르의 곁에는 이슈타르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그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선 정리를 좀 해 보자.'
마력을 숨기기 위해 얼떨결에 신성력을 각성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이토록 큰 파란을 몰고 왔다.
미리 알았더라면 끝까지 잡아뗐겠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사실 신성력이 아니었네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힘이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생겼으니까,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분명 대공의 손에 죽을 테니까.
그 서슬 퍼런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가의 실세이자 사실상 황제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대공, 파토르는 누구보다 황권의 부활을 바라는 듯했다.
대공을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로베르는 그 선택지가 내키지 않았다.
교황에게 넘어간 패권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분명 길고 험난한 과정을 넘어야 할 터였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고행길을 택하겠는가?
"아악!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건데! 난 마왕이라고!"
물론 지금은 황자이니 황실의 승리가 더 기꺼운 일이겠으나,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이루고 싶지는 않았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탓에 로베르는 머리를 감싸 쥐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인간들은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로베르를 괴롭히고 싶어 작정한 것처럼 굴었다.
며칠 뒤, 황제의 시종장이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자수정궁을 방문했다.
"폐하께서 특별히 황자님을 위해 저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연회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은 로베르를 연회의 주인공에 걸맞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대가 모든 걸 알아서 준비할 수는 없는 거겠지?"
로베르의 시큰둥한 반응도 그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양팔을 벌려 주세요."
어느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여자가 손수 로베르의 신체 사이즈를 쟀다. 기록을 받아 본 시종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보다 살이 더 빠지셨군요. 적어도 연회까지는 지금 상태를 유지해 주셔야 합니다."
"왜지? 그렇게 먹기만 했는데."
"혹시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닙니까? 연회가 코앞인데 큰일입니다! 이보게, 당장 황궁의를 불러와!"
시종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마치 로베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과한 반응이었다.
'죽더라도 연회가 끝나고 죽으라고 다시 살릴 기세군.'
로베르는 두통이 더욱 심해지는 탓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 곳이 많지만, 의사는 필요 없어. 이미 원인과 치료법을 모두 아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말씀만 해 주시면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주면 된다. 문은 저쪽."
로베르의 손가락이 문을 가리켰다.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처방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시종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컨대 꾀병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마저 진행하겠습니다. 여기, 황자님께 디자인북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툼한 책이 코앞에 들이밀렸다. 디자이너는 엇비슷한 디자인으로 가득한 책장을 넘기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여러 의상을 준비해 왔으니 우선 입어 보시죠. 어떤 느낌이 황자님께 어울리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뭐?"
"어서 황자님의 환복을 도와드려라."
로베르는 인간들이 고작 옷 따위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모든 의복의 옷감과 원하는 디자인, 색상, 심지어는 카라의 크기와 단추 같은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정해야 했다.
그들이 가져온 의상을 입고 벗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자, 점점 열감이 오르고 숨이 찼다.
'몸이 왜 이러지? 더위를 먹었나.'
자꾸 시야가 일그러졌다. 로베르는 눈을 세게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황자님, 힘내십시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러나 이미 꾀병 환자로 낙인찍힌 로베르를 걱정해 주는 이는 없었다.
더는 입어 볼 옷이 없어졌을 즈음에야 환복이 끝났다.
"헉, 허억-. 이제 된 거지?"
로베르는 몸에 힘이 풀려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인들이 로베르의 곁에서 부채질을 해 주었다.
아무리 시원한 바람을 맞아도 속을 가득 채운 열기가 도무지 가시지를 않았다.
"네,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멋진 결과물이 나오겠군요."
시종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를 닫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아, 그리고 황자님의 초상화를 새로 그려야 하는데, 연회에 맞추려면 시일이 촉박합니다. 우선 오늘은 스케치만 하고, 의상이 나오면 그때 더...."
제발, 다 관두고 꺼져.
로베르가 치를 떨며 몸을 일으킨 때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 황자님. 피, 피가!"
"어?"
무심코 입술을 닦자 정말로 피가 묻어 나왔다. 로베르는 멍하니 손등을 내려다봤다.
"그러게, 아프다고 했잖아. 이 개새끼들아...."
정신이 아득해지고, 순식간에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 쿵-. 로베르의 몸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황자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로베르 황자님!"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무슨 일입니까!"
"황, 황자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어서 황궁의를!"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완연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마치 긴 죽음에서 깨어나기 전으로 되돌아온 듯했다.
'이제 이런 건 지겨운데.'
번쩍! 그 순간 스파크가 일며 작은 빛이 눈앞을 밝혔다. 로베르는 무심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그 틈새로 낯선 장면이 흘러나왔다.
'세라, 로베르 황자에게 사과해라. 어서!'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얼굴을 한 파토르가 웬 여자아이를 혼내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내 깨달았다. 아마도 그건, 원래 로베르의 기억인 것 같았다.
어린 로베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자아이와 꽤 격렬하게 다툰 뒤였다.
내려다보이는 팔다리 곳곳에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일로 파토르가 아이를 혼내는 상황이었다.
그때, 아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 파토르의 뒤에 선 저를 가리켰다.
'쟤가 나더러 근본도 없는 고아래. 내가 아빠 인생을 망쳤다고 했단 말이야!'
'세라, 어떻게 감히 황족을 모함하느냐!'
파토르가 고함치자 아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쟤 말이 맞아? 난 황족이 아니야? 아빠는 내 아빠가 아니고, 나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한 애고.... 으아앙,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아이는 기어코 애써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파토르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 이유를 찾았는지 로베르를 돌아보았다.
'로베르, 직접 말해라. 세라 말이 사실이야?'
'저는 그냥, 그러니까, 숙부가 제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는데....'
'너....'
로베르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감정을 내비쳤다.
'네게 실망했다, 로베르.'
파토르는 기어코 입을 열어 쐐기를 박았다.
쿵!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 순간 로베르가 느낀 공포가 시공간을 넘어 지금의 로베르에게 전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공간이 소용돌이치더니, 틈새가 닫혔다. 뒤이어 또다시 시야가 점멸했다.
"허억-."
이윽고 눈을 떴을 때는 앤디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로베르 황자님, 정신이 드세요?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시종장님이 황궁의를 부르셨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로베르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앤디를 멍하니 바라봤다.
"...앤디, 숙부한테 딸이 있댔지. 그 딸 이름이 뭐라고?"
"대공 전하 따님이면, 세라 공녀 말씀이세요?"
세라, 분명 파토르는 그 여자아이를 그렇게 불렀다.
역시 방금 본 장면은 로베르의 어릴 적 기억이 확실했다.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앤디야. 아무래도 신이 나를 돕는 것 같다."
어째서 자신이 로베르의 기억을 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꼭 계시처럼 내려온 기억 속에서 이 상황을 해결할 힌트를 얻어 냈다는 게 중요했다.
'대공을 돕지 않아도, 이 모든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
실망한 대공이 직접 저를 버리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깽판 치고 망쳐 놓으면, 대공도 포기하겠지. 신성력이고 나발이고 다시는 내 얼굴도 보기 싫게 만들어 주마.'
우선, 다가오는 연회를 망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로베르는 어서 귀찮은 궁인들을 돌려보내고 자세한 계획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앤디는 물론이고 시종장까지 합세해 로베르를 방해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금방 깨어난 걸 보면 몰라?"
단순한 과로로 잠시 쓰러진 것뿐이라는 주장에도, 시종장은 기어코 고집을 부려 황궁의를 데려왔다.
시종장이 곁에 딱 붙어 서서 감시하는 탓에 로베르는 결국 얌전히 진찰받아야 했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로베르의 상태를 살피더니, 각성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굳어 있던 코어로 갑작스레 많은 신성력을 운용한 탓에 내상을 입은 듯하다고.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 봅니다. 제가 알기로 신성력과 같은 이로운 힘은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법인데...."
그야 신성력이 아니라 마력이니까.
의사가 모르는 병의 원인을 알아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마력이 너무 과했나? 쓰레기 같은 몸에, 심장도 온전치 않은 상태로 너무 까불긴 했지. 정말 기사들처럼 단련이라도 해야 하나.'
누워서 빈둥거릴 시간을 아껴 단련을 해야 한다니.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아무튼 당분간 신성력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든 힘에는 그에 맞는 연공법이 있으니까요."
"그게 다인가? 이미 몸을 다치셨으니 치료가 필요하지 않겠어?"
"달리 치료법은 없고, 신성력을 잘 운용하시다 보면 저절로 회복될 겁니다."
'당분간 사려야 한다는 거지? 그럼 무슨 수로 연회를 거하게 망친담?'
환자의 몸으로도 로베르는 그것부터 궁리하기 바빴다.
반면 시종장은 떠나려는 의사를 붙잡고 각성통의 증상과 기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제게 물으셔도.... 아, 교황청에 자문을 구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저보다는 사제들이 훨씬 잘 알 겁니다."
"그건 안 될 말일세! 자네도 오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해야 할 것이야."
황실파 귀족들이 로베르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교황청에서는 분명 어떻게든 훼방을 놓으려 할 것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작은 빌미도 주지 않아야 했다.
"의사로서의 소견일 뿐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에피파네스 황가를 위해 일하니까요."
시종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했네."
"아닙니다. 부디 쾌차하시어 제국을 빛내소서, 전하."
두 사람의 충심 덕에 막내 황자가 연회를 준비하다 앓아누웠다는 소식은 극비에 부쳐졌다.
짧은 휴식을 취하자 로베르의 상태는 금세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로베르는 각성통 핑계를 대며 연회 준비를 소홀히 했다.
대신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
"앤디, 연회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뭐라고 생각하냐? 떠오르는 대로 다 읊어 봐."
"네? 그야...."
"메리, 너도 이리 와서 함께 의견을 나누어 줘. 가능한 한 많이."
로베르는 우선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연회를 망치는 방법을 묻고 다녔다.
'뭐가 잘못될까 봐 불안해서 그러시는구나. 첫 연회를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시겠지. 불쌍한 황자님.'
일련의 사건들로 궁인들 사이에서 로베르를 동정하는 여론이 생겨난 뒤였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시커먼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돕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로베르는 그들의 의견을 모아 연회에서 할 행동 목록을 작성했다.
1) 인사 오는 귀족들 이름 잘못 부르기. 특히 적대 세력 가문 이름을 서로 헷갈리면 효과가 두 배.
2) 안부 인사에 외모 평가를 섞기. 남성에게는 머리가 빠졌다고, 여성에게는 살이 쪘다고 할 것.
3) 눈치 없이 정부나 혼외자 소식도 함께 묻기. 무조건 배우자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함.
4) 저주를 농담거리처럼 마구 언급하기. 어느 쪽 세력이든 굉장히 껄끄러워할 것임.
이외에도 음식 게걸스럽게 먹기, 술에 진탕 취해 말실수하기, 하인들 쟁반을 엎어 놓고 적반하장으로 화내기 등등.
마력 없이도 연회를 망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다.
로베르는 가능한 한 많은 행동을 실천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이 수치를 모르는 왕 같으니!'
어디선가 악마들의 통탄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인간들에게 정확히 같은 반응을 얻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저건 운 좋게 신성력을 각성한 것 말고는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구나.
그 사실을 증명해 내어 그들이 결코 그를 원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조카를 위해 빨리 포기해 주시죠, 숙부."
단번에 되지 않는다면 파토르가 만들어 주는 사교 모임에서 같은 짓을 반복할 테다.
결심한 로베르는 연회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는 시간에는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일기장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러다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11]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1화. 그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다 (3)
로베르의 일기장은 암울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매일 죽고 싶다고 쓸 거면 굳이 왜 살았던 건지. 아, 자살이 엄청난 죄라고 했던가?"
자살은 악마와의 계약과 더불어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타락시키는 중죄였다.
그러나 죽고 싶은 것이 죄라면, 그렇게 만든 자들 또한 같은 죄인이 아닌가.
로베르는 어렵지 않게 죄인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제 나의 일이기도 하니, 확실히 해 둘 필요는 있겠어.'
의외로 가족들에 대해서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다. 꼼꼼히 읽어 봐도 사소한 정보밖에 얻을 수 없었다.
율란이 가끔 찾아와 줘서 기쁘다.
하론 형님께서는 항상 나를 잘 챙겨 주신다.
아카키 형님이 날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아버지께선 늘 내게 미안해하신다.
어머니를 이해한다.
정작 대공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기장에는 간간이 종이가 찢겨 나간 흔적이 있었는데, 그중 대공에 관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대공을 아버지처럼 생각한 모양이던데,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아직도 기억을 엿보는 동안 느낀 감정이 생생했다.
그때 로베르는 인간 로베르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마치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건 '아버지'를 모르는 악마에겐 아주 생소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가족들을 저주하는 말 한마디 없는 일기장 역시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어서 끝을 봐야겠어.'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이 모든 감각을 잊고 평온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들과 단절된 채로 궁에 유폐된 생활을 하는 막내 황자의 일상으로.
시종장은 그 후로도 여러 일로 그를 귀찮게 했다.
그래도 혹여나 건강이 더 나빠질까 우려되긴 했는지 일정을 최소한으로 줄여 주었다.
로베르의 새 초상화가 완성된 날, 시종장은 감격한 얼굴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외모가 훨씬 수려해지셨습니다. 황후께 물려받으신 자안은 또 얼마나 신비로운지. 망할 예언만 아니었어도 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저주의 표식처럼 여겨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게, 그깟 색이 뭐라고. 악마들의 상판이 얼마나 다채로운데.'
그는 제 머리카락을 만지며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깟 색이나 한마디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우스웠고, 그 믿음이 로베르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게 가장 우스웠다.
'그래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나 덕분에 저주가 끝났잖아.'
비록 간신히 회복한 평판 역시 나로 인해 다시 바닥을 치겠지만.
그는 사후세계에 있을 진짜 로베르의 영혼에게 미리 유감을 표했다.
그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연회 당일이 되었다.
연회를 앞두고 자수정궁으로 몇 번의 수선 끝에 완성된 연회복이 전달되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군."
하얀 바탕색에 금색 장식을 수놓은 정복이었다.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은색 단추가 은은한 빛을 냈다.
로베르는 프릴 없이 반듯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허리에 두꺼운 벨트를 찼다. 긴 재킷까지 입자 앤디가 발밑으로 구두를 놓아주었다.
"신겨 드리겠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고, 참...."
앤디는 구두를 신기는 내내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마셨다.
로베르는 앤디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구두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너 우냐?"
"훌쩍, 아닙니다. 그저 황자님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 실감이 되어 그럽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틋한 사이던가."
그런 것 치곤, 내 일기에 네게 당한 수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던데.
일기에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은 뜻밖에도 앤디였다.
화이트 백작의 정부에게서 태어난 앤디는 황궁으로 오기 직전,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백작가의 다른 공자들 대신 막내 황자의 시종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제껏 앤디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대접도 받지 못하는 황자의 밑에서 일하는 서러움을 로베르에게 풀어 온 듯했다.
'내 위상이 높아지면, 시종인 앤디의 권한도 커진다. 그게 기쁜 거겠지, 눈물까지 흘릴 만큼.'
주인보다 제 욕망을 먼저 앞세우는 자는 언제든 다시 주인을 물 수 있는 법이었다.
"다들 나가 있어, 앤디만 빼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우면, 다스릴 수밖에 없겠지. 죄가 있다면 벌을 주고, 위험한 욕망은 제거하면 될 일이다.
"황자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의복을 마저 갖추고 머리도 손질하셔야 합니다."
"금방 끝나."
"정말 짧게 끝내셔야 합니다."
궁인들은 거듭 당부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황자님...."
앤디는 로베르가 위로라도 할 줄 알았는지 대단히 감동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로베르는 코웃음 치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에, 나더러 여기 궁인들은 죄다 내 저주가 옮아서 불행해졌다고 했지? 그런데 이 정도도 못 참아 주냐고, 그깟 보석 하나도 못 주냐고도 했고."
영원히 묻힐 줄만 알았던 만행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앤디는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로베르를 올려다봤다.
로베르는 앤디를 지나쳐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석함에서 자수정이 박힌 커프스 단추를 꺼냈다.
"하루 준다. 자수정궁의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되돌려 놔."
그러나 그것이 여태껏 앤디의 손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 그건요, 황자님. 그때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습니다. 황자님께서 담아 두고 계신 줄은 미처...."
"황족을 모독하고 황궁 재산까지 훔쳤으니, 최소 사형이겠군.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지 않아?"
"화, 황자님...."
앤디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로베르의 발밑으로 기어 오더니,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주,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불쌍하고 병든 제 노모를 홀로 책임지려다 보니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앤디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로베르는 성의 없이 귀를 후볐다.
"나는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어. 전부 되돌려 놓으라고 했지. 하루를 준 것이 네게 베풀 유일한 자비다."
"황자님. 제,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죽으라는 것만 빼고 다 할 테니 제발.... 제가 죽으면 저희 어머니도 죽습니다. 네?"
로베르는 소매에 단추를 끼워 넣으며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앤디의 손을 세게 짓밟았다.
앤디는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신음을 참았다.
"앤디, 내가 흰옷을 입고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황자님, 제발...."
"정말 뭐든 할래?"
선심 쓰듯 한 줄기 희망을 내려 주자 앤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앤디의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에 담긴 의미는 처음 흐르던 순간과 달라졌으나, 로베르는 그것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앤디는 오직 앤디 자신을 위해서만 울었다.
악마가 신뢰하는 것은 스스로를 너무나도 애틋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었다.
그런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테니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라도?"
"황자님께서 원하신다면."
로베르는 웃음을 흘리며 발을 치웠다. 붉게 달아오른 앤디의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너는 나와 계약하는 것이다."
"예? 제, 제가 미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잘 들을 테니 다시 한 번만...."
앤디는 그것이 고대 마계어라는 것도, 마력이 실린 주문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로베르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발만 동동거렸다.
"앞으로 내게 절대로 복종하는 충실한 종으로 살아가겠다 맹세해. 대가는 너의 목숨이다."
"...맹세합니다. 황자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가장 충실한 종이 되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네 입으로 뱉은 말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너는 살 거다."
앤디의 손등에 남은 상처를 따라 계약의 표식이 새겨졌다.
그러나 앤디는 거듭 고개를 조아리기 바빠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완성된 표식은 자색 빛을 내뿜으며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빛이 있던 자리에는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 * *
에피파네스 황도로 귀족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어느 때보다 긴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광장에 거대한 인파가 모여들었다.
"오늘 광장에서는 어떠한 행사도 열리지 않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미리 파견된 근위대가 그들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밀치며 앞자리를 선점하려 했다.
"3황자님을 위한 연회가 열린다고? 신문 기사를 보고도 믿지를 못했는데, 정말 사실이었어."
"그럼 저주받은 황자가 신성력을 각성한 것도 사실이란 말이야?"
"이놈아, 저주받은 몸에 어찌 신성한 힘이 깃들 수 있어. 성녀님의 예언이 틀릴 리 없지 않나."
인파 곳곳에서 비슷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들은 대부분 황실의 행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대공이 황실을 지키고자 무리한 발악을 하는 거지. 우리 주교님의 말씀대로, 대공은 참으로 오만방자한 자야."
"내 생각도 같아. 제국을 지켜 낸 건 황실이 아니라 교황청의 영웅들이잖아. 어째서 자꾸 교황청과 척을 지려 하는 건지.... 이러다 주신의 분노를 살까 봐 걱정스러워."
그들이 기어코 로베르에 이어 대공까지 비난하자, 근위대 병사들이 표정을 굳혔다.
"뭘 안다고 감히 대공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이야! 두고 보게, 대공께서 반드시 위대한 에피파네스 황가의 부흥을 이끄실 테니!"
근위대장이 불호령을 치고 나서야 소란이 한풀 꺾였다.
이 연회가 정말 황실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 될지, 아니면 완전한 몰락의 시발점이 될지.
모든 제국민의 이목이 쏠린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 역시 같은 의문을 품은 채였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겠어요."
넓은 연회장이 금세 손님들로 가득 찼다. 막 도착한 귀족들은 서로를 반기며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언뜻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 형님께서는 초대장을 받지 못해 섭섭해하더이다. 헤이스같은 일개 장사치보다 이번 소식을 늦게 알았다고요."
"황가를 위해 일하지 않는 이들까지 황가의 연회에 초대할 필요는 없지요."
"하하, 안 그래도 일러두었습니다. 추기경 예하께서 굳이 귀한 발걸음을 하실 필요는 없을 듯하다고."
악의를 감추되 뜻을 전하는 귀족들의 대화가 오갔다.
그들은 몇 번 공격을 주고받은 뒤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같은 파벌끼리 모여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유난히 수도에 오래 계시는 듯한데, 세라 공녀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황실파 귀족들의 종착지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은 대공이었다.
파토르는 성가신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들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 주었다.
"수도에는 언제까지 머무실 계획인가요?"
"로베르 황자에 관한 일을 전부 해결할 때까지 있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물론 저야 제국의 얼굴을 자주 뵐 수 있어 기쁘지만, 대공령에도 전하가 필요한 일이 있을 듯한데요."
자작 하나가 지나가듯 한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파토르는 자작에게 무심한 시선을 주었다.
"제국의 얼굴이라, 적절치 못한 표현이군요.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폐하이십니다."
"저, 저는 그저 제국에서 제일가는 미남이라는 뜻에서...."
아주 사소한 말이었으나, 자칫 황제를 모독한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자작은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면서 억지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공, 너무 짓궂으십니다."
그때, 지켜보던 그레이 백작이 슬쩍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간신히 대공의 시야에서 벗어난 자작은 잽싸게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쯧. 파토르가 말없이 혀를 찼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백작은 기분을 풀어 주려 애썼다.
"원래부터 신의보다는 제 이익을 중시하는 자가 아닙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내 영지를 들먹이며 떠보려 하는 꼴이 괘씸해 그랬습니다. 그곳에 내가 필요한 줄을 몰라 여기 있겠습니까. 여기서 할 일이 있으니 억지로 버티고 있는 거지요."
"대공령은 괜찮을 겁니다. 유능한 대리인도 있고, 공녀까지 계시니...."
백작이 무심코 세라를 언급하자 파토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백작은 그제야 그의 심기가 불편한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공녀를 홀로 두고 온 것이 걱정되시는군요. 왜, 함께 오지 않으시고요."
"저와 같이 기차를 타느니 차라리 죽겠답니다."
"하하.... 공녀께서도 곧 성년이 되시지요? 한창 부모 품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아닙니까."
"내 자식만 그런 건지, 아이가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더군요. 이렇게 오래 머물 줄 알았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온통 골치 아픈 일뿐입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두통이 이는 수많은 문제가 파토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저를 벌레 보듯 하는 딸, 세라였다.
대공의 한탄이 길어지던 무렵, 반대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애초에 신성력을 각성한 건 맞고요? 그 몸에 깃든 악마의 힘인지 알게 뭡니까!"
"감히 황궁에서 전하를 비방하다니, 언행을 삼가세요!"
"저주받은 황자를 내세워 신을 모독한 당신들은 어떻고요!"
구석에서 시작된 언쟁이 순식간에 번지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로베르를 향한 불손한 말들이 두 사람의 귀까지 들어왔다.
"저, 저런...."
분개한 백작이 한마디 하려 몸을 돌렸다.
정작 파토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의 다툼을 지켜만 봤다.
'멋대로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제 끝이군.'
때마침 한동안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대공은 그 너머에 있을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끼이익- 쾅!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근위대 정예 기사들이 경직된 걸음으로 들어와 열을 맞추어 섰다.
"위대한 신성 제국의 해와 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 부부가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웅성거림이 멎고, 장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황제가 아닌, 아직 문 너머에 선 로베르 황자를.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어.'
그는 덥수룩한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더는 감출 필요가 없어진 자색 눈동자를 전부 드러냈다.
윤곽이 선명해진 얼굴은 의외로 수려했다. 그 때문인지 황실의 정복이 제 것처럼 잘 어울렸다.
늘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치켜든 모습은 살짝 불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야, 왜 나만 쳐다봐?'
대기 중이던 로베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시선이 모인 곳을 깨달은 하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베르, 모두가 너를 주시하고 있구나. 그럴수록 처신을 바르게 해야겠지."
"아니요, 저는 오늘 열과 성을 다해 처신을 못 할 예정입니다."
"...뭐?"
"두고 보세요."
로베르가 입맛을 다시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 황자가 오늘 얼마나 여러 번 그들을 놀라게 할 것인지, 그곳의 누구도 미처 알지 못했다.
[12]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2화. 그 황자는 저주받지 않았다 (4)
교황청의 허가 없이는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카키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이 모두 입장을 마쳤다.
그들은 익숙한 얼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단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황제가 앞으로 나와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황실의 경사를 전하려 하오. 소식을 들었겠지만, 로베르 황자가 주신 루멘의 가호를 받는 신성한 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년의 나이에 각성은 드문 일인 만큼, 황자에게 축하의 말을 아끼지 마시라 부탁하고 싶소."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옆에 앉은 로베르를 바라봤다.
막내아들을 보는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속에 한 줄기 순수한 기쁨이 드리운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도 기쁘긴 한가 보군. 누구랑은 다르게.'
황후는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짙은 그늘이 졌다.
황제는 차마 황후에게 발언권을 넘기지 못하고 홀로 축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황자, 이 연회는 오로지 너를 위한 자리이다.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도록 충분히 즐기도록 해라."
"예,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로베르가 씩 웃으며 답했다.
긴 박수가 한동안 이어졌다. 뒤이어 음악이 흘러나오고, 술잔이 오갔다.
귀족들은 서로 어우러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황후와 하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율란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뒤따라 일어났다.
'좋아, 어디부터 가 볼까.'
로베르 역시 귀족들을 훑으며 막 일어서던 참이었다.
"황자, 황녀. 잠시 내게 시간을 좀 내주렴."
뜻밖에도 황제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로베르와 율란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말했듯 너희들이 아직도 약혼조차 하지 않은 것이 걱정이다. 오늘에야말로 결론을 내야겠어."
이제껏 두 사람에게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마땅한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다.
저주받은 황자와 그 쌍둥이 황녀를 원하는 귀족 가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과의 혼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죄다 황제보다 나이가 많거나, 요란한 소송 끝에 이혼했거나, 정부를 여럿 둔 상대뿐이었다.
조너선은 죽어도 그들에게 제 자식을 보낼 수는 없기에 거듭 혼담을 미뤄 왔다.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괜찮은 상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 혼사를 진행할 테니, 이런 기회에 상대를 봐 두거라."
"싫습니다."
로베르가 딱 잘라 말하자, 율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황제는 언성을 높여 가며 로베르를 설득하려 들었다.
"왜 싫다는 것이야. 저번에는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혼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싫다고!'
정략혼은 로베르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세력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성년이 되도록 혼담 한번 오가지 않던 황자가 황위 계승권을 되찾자마자 서둘러 결혼한다.
마치 황태자가 되기 위한 포석을 까는 것으로 보일 법했다.
"하론 형님이 황태자가 되고 나면 그때 하겠습니다. 그 전에 하면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요."
뜻밖의 말에 황제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내가 미처 너의 뜻을 몰라주었구나. 한창일 나이에 여인의 손 한번 못 잡아 보고 궁에만 머무르는 것이 괴로울 텐데, 형과 이 황실을 위해 희생하겠다니.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했어."
로베르의 의도를 단단히 오해한 황제가 감격한 목소리로 그를 칭찬했다.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손은 무슨. 질리도록 즐겼으니 앞으로 몇 년은 쉬어도 거뜬해. 특히 릴리스 성에서 참 재밌었는데, 그때 그건 인간계에서는 불가능하겠지?'
로베르가 잠시 추억에 젖은 사이, 눈치를 보던 율란이 말을 보탰다.
"저도 로베르와 생각이 같아요. 결혼은 천천히 하고 싶어요, 폐하."
조너선은 여전히 감격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하론도, 너희들도 똑같이 중하단다. 또다시 너희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당장 결혼이 갑작스럽다면 약혼부터 하거라. 우선 오늘 연회에서 후보를 한 명 이상 정하도록. 이건 황명이다."
황제는 자식들이 젊음을 허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드물게 황명까지 운운하며 뜻을 밀어붙였다.
제 애정이 자식들의 뜻과 정반대로 흐르고 있음을 미처 모르는 채로.
율란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폐하."
"로베르 황자도 대답하거라."
"오늘 이후로 들어오는 혼담이 있을지를 걱정하셔야 할 텐데...."
정작 로베르는 절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로베르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파토르가 제 테이블로 그를 불렀다.
"로베르 황자, 이리 와서 인사하거라."
곁에서 황실의 충실한 가신으로 유명한 그레이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화이트 백작."
"아... 황자님을 뵙습니다."
로베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난데없이 황자의 입에서 교회파 귀족의 이름이 불리자 그레이 백작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파토르가 다급히 로베르를 꾸중했다.
"황자, 이분은 그레이 가문의 백작이시다. 어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어."
"아, 그런가요? 제가 헷갈렸나 봅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그만, 하하. 그나저나 팔이 좀 아픈데요."
사과는커녕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고 도리어 백작의 태도를 탓하는 안하무인. 완벽하다.
쉽게 목적을 달성한 로베르는 씩 웃으며 손을 백작의 코앞에 대고 흔들었다.
"황자!"
"허허, 제 답이 너무 느렸지요? 송구합니다."
그레이 백작은 간신히 미소를 유지한 채 로베르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분노한 대공을 향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베르는 아예 이 테이블에서 내쫓기기 위해 다음 공격을 고민했다.
'그레이 백작이라. 특권 사제가 된 딸이 하나 있다고 했지. 이름이... 글로리아?'
그녀는 다 된 혼사를 직전에 파투 내고 특권 사제 서품을 받은 사교계의 전설이었다.
백작은 딸이 수녀도 아닌 사제가 된 것에, 심지어 악마 사냥을 하는 특권 사제가 된 것에 격분하여 그녀를 내쫓았다고 했다.
"참, 백작. 글로리아 사제는 잘 지내십니까?"
금기나 다름없는 이름이 언급되자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싸해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레이 백작이 멍하니 되물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특권 사제란 제국을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하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백작에겐 분명 대단히 자랑스러운 딸일 듯하여 일부러 물은 것인데, 무슨 문제라도?"
파토르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화도 내지 못하고 로베르를 바라보기만 했다.
"...딸자식과는 연을 끊은 지 오래되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백작이 이를 악물고 간신히 답했다. 핏대가 솟은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로베르는 실실 웃으며 마지막 타격을 날리려 했다.
"연을 끊었다니, 영애가 걱정되지는...."
"로베르!"
파토르가 다급히 그를 제지했다.
"...황자, 우리가 황자를 너무 오래 잡아 두었구나. 다른 테이블로도 인사를 가는 게 좋겠다.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대공은 눈앞의 파국을 막고 백작을 진정시키기 위해 악수를 두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로베르는 냉큼 답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다음 목적지는 진짜 화이트 백작이 있는 교회파 귀족들의 테이블이었다.
'앤디가 이 화이트 백작의 사생아라는 거지. 생긴 건 안 닮았군.'
마침 화이트 백작은 부인과 함께 있었다. 로베르는 재빨리 부부에게 다가가 차례대로 인사했다.
"참, 아드님이 제 시종으로 있는 건 아시지요? 저기 구석에 있는 듯한데, 부를까요?"
멀리서 하인들을 통솔하고 있는 앤디를 향해 손을 들자, 백작이 다급히 만류했다.
"아- 아닙니다! 변변치 않은 놈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작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을 힐끗거리며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럴 리가요. 앤디 공자가 얼마나 유능한데요. 유서 깊은 가문의 지식인 두 분 사이에 난 자식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당신 덕에 제가 별소리를 다 듣는군요."
"제가 혹시 무언가 실수라도...?"
로베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황자님께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실수라면 입으로는 신학을 논하며 아래로는 미를 탐하는 제 남편 되는 분이 하셨지요."
"그, 그게 아내가 남편에게 할 소린가! 황자님 앞에서 무슨 추태야!"
부인이 사정없이 비꼬자 백작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로베르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꾸며 낸 채 싸움을 구경했다.
"저, 그, 황자님. 앤디 영식은 입적된 공자로, 그의 친모는 다른 여인입니다. 부인 앞에서는 말씀을 삼가심이...."
보다 못한 다른 귀족 하나가 귀띔해 주었다. 덕분에 기회를 잡은 로베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늙고 병들었다는 그 여인 말이지요?"
"늙고 병들긴요? 그놈의 어미는 내 자식 또래 나이에 내 남편 아이를 밴 아주 어리고 맹랑한 여자인걸요!"
"그만 좀 하래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앤디는 그 와중에 거짓을 꾸며 내어 상황을 모면하려 한 모양이었다.
'맹랑하긴 자식이 더하군. 계약으로 묶어 두길 잘했어.'
졸지에 크게 망신당한 백작은 멀리 있는 앤디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황자님, 이 사람이 많이 흥분한 듯하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주신 루멘의 영광과 함께하시길."
화이트 백작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부인을 강제로 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또 어느 테이블로 인사하러 가 볼까."
로베르는 휘파람을 불며 테이블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축하 대신 비난이 오가고, 고성이 난무했다.
그렇게 정성들여 제 축하 연회를 망치는 모습에, 누군가는 웃었고 또 누군가는 분노하고 있었다.
파토르는 그에게 가려다 몇 번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발목이 붙잡혔다.
"율란 황녀, 제발 네 쌍둥이를 기절이라도 시키거라. 내가 갈 때까지 아무런 사고도 칠 수 없게 해."
결국 지령을 받은 율란이 로베르에게 향했다.
그가 있는 테이블에 가까워지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로베르는 칼릭스 공작에게 모발의 안부를 묻는 중이었다.
"공작의 모발에도 루멘의 축복이...."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율란은 드레스 자락을 틀어쥐고 다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우선 입부터 틀어막으려 손을 뻗었다.
탁! 로베르는 여전히 앞을 응시한 채로 그녀의 손을 세게 쳐 냈다. 그녀는 거대한 힘에 떠밀려 나가떨어졌다.
"아...."
일순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로베르가 다른 손에 든 술잔을 홀짝이며 뒤돌았다.
"어떤 쥐새끼가 겁도 없이, 뭐야, 너였어?"
그는 그제야 율란을 알아보고 살기를 거두었다. 율란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로베르를 올려다봤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것 아닌가? 황궁의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뒤이어 황녀를 걱정하는 이들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의 곁으로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 속에서, 로베르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냐? 미안하다. 너인 줄 몰랐어."
"...어?"
"미안하다고."
로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율란을 일으켜 주었다.
율란은 자신을 걱정하는 귀족들에게 웃어 보이고는 로베르를 끌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어디 가?"
"조용한 곳. 숙부가 너 좀 붙잡고 있으래."
"나랑 그럴 시간이 있어? 너의 피앙새 후보를 찾기도 모자랄 텐데."
그 말에 그녀가 절뚝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난 결혼하기 싫어."
"그래? 일단은 나도."
"...이유는 안 물어?"
율란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별로 안 궁금한데, 굳이?"
로베르의 시선은 이미 그녀를 벗어나 가까이 있는 거대한 샴페인 타워에 가 있었다.
배열을 맞추어 놓인 수많은 유리잔 안에서 옅은 금빛 액체가 일렁였다.
맑은 탑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거다.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딱 좋겠어.'
율란은 로베르의 두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도는 것을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테이블 위로 높이 쌓인 샴페인 타워가 있었다.
"야, 너 잠깐...."
그녀가 입을 열던 차에, 그는 긴 다리로 정확히 그 테이블을 걷어찼다.
쾅! 테이블이 뒤로 밀려나며 잔들이 위태롭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은 타워가 앞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꺄아악!"
율란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황녀가 낸 소리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봤다.
"아, 안 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 시작한 그 순간.
눈이 멀 것처럼 환한 빛이 일었다.
로베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찰나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방금 뭐였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멀쩡히 서 있는 유리잔들이었다.
잔에 담긴 희고 빛나는 술이 저를 비웃듯 일렁였다.
같은 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어느새 그 앞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베르 황자 전하. 교황님을 대신해 왔습니다."
사제, 아타나시오가 그에게 고개 숙였다.
[13]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3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샴페인 타워는 붕괴가 시작되기 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되돌아갔다. 그것을 무너뜨리려 했던 로베르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가 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베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구?"
"아타나시오라고 합니다, 전하."
"이름이 뭐라고?"
"아타나시오입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이름만 다섯 글자? 풀네임은 훨씬 길겠지. 제국 놈들은 이름을 쓸데없이 길게 짓는군.'
로베르 율리오 드 에피파네스라는 자신의 풀네임을 들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되살아났다.
"아타나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런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아타나스가 덧붙였다.
"아타나시오 사제님?"
이내 두 사람을 가리던 빛이 완전히 걷히고, 모두가 아타나스의 출현을 알게 되었다.
"아타나시오 사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황궁 연회에서 뵐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셨으면 저희부터 찾지 않으시고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근처에 있던 교회파 귀족들이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사제? 뭐가 됐든 안 엮이는 게 좋겠어.'
로베르는 그 틈을 타 슬금슬금 빠져나가려 했다.
퍽-. 그러다 율란을 보지 못하고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아, 실수. 괜찮냐?"
"...."
율란은 완전히 넋을 놓은 채 아타나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베르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살짝 풀린 동공과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는 끈질긴 시선에서 아주 명확한 감정이 읽혔다.
"야, 너 쟤 좋아하지."
로베르가 귓가에 속삭이자 율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는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아, 아니야!"
"아니긴. 결혼이 싫은 것도 이미 푹 빠진 남자가 있어서였네. 어디가 좋은데? 얼굴?"
그는 큰 키와 잘 빚은 조각상처럼 완벽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단출한 검은색 법복을 입고 허리에 자색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연회를 위해 치장한 누구보다 훨씬 화려한 인상을 주었다.
고운 실 같은 백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어우러져 신성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악마들도 환장하게 생기긴 했네. 근데 어쩌냐, 하필 사제라서. 주신과의 삼각관계라니.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누이."
"아니라고 했잖아. 난 아타나스를 안 좋아해."
"근데 왜 사랑에 빠진 눈으로 봐? 모른 척해 주기도 힘들 정도야. 늘 그런 식으로 그를 봤던 거라면, 이미 본인도 눈치챘을걸."
로베르가 히죽거리며 끝도 없이 떠들어 댔다. 정곡을 찔린 율란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적 없어! 난 아타나스가 싫다고, 알아들어? 결혼이 싫은 것도 아타나스 때문이 아니란 말이야!"
율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사방을 울렸다.
덕분에 아타나스와 결혼이 아주 싫다는 황녀의 고백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사람들은 애써 율란의 눈을 피했다.
"하하... 일이 너무 커져 버렸네."
본의 아니게 율란에게 제대로 망신을 준 로베르는 민망한 웃음만 흘렸다.
정작 아타나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진정한 율란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로베르, 넌 진짜... 내 인생을 망치려고 태어난 악마 새끼 같아. 너랑 한배에서 나왔다는 게 소름 끼쳐."
"뭘 또 그렇게까지...."
"어머니 말이 맞아.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제발 어디 가서 조용히 죽어 버려."
율란은 충혈된 눈으로 로베르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사람들은 알아서 비켜서며 길을 터 주었다. 그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그녀를 따라붙었다.
"황녀!"
"율란, 돌아오렴!"
뒤늦게 인파를 헤치고 소란의 중심으로 나온 황제 부부가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나섰다.
"하아.... 황자는 연회가 끝난 뒤에 따로 좀 보자."
대공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통보했다. 그러고는 그보다 훨씬 차가운 눈으로 아타나스를 내려다봤다.
"사제가 여긴 어쩐 일이지? 교황청으로는 초대장이 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신의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은 없습니다, 전하."
"...그러니까 지금 말은, 그대가 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주신 루멘의 대리자이신 교황 성하의 명을 받아 왔으니, 다르지 않습니다."
아타나스는 대공을 앞에 두고도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파토르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 대단한 신의 대리자께서는 무슨 명을 내리시던가? 로베르 황자의 신성력 각성을 어떻게든 부정해 연회를 망치고 오라고?"
"성하께서는 단지 모든 일을 확실히 하고자 하십니다. 저는 그를 위해 왔습니다."
아타나스가 잠시 말을 멈추고 로베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빛이 바랜 듯한 회색 눈동자가 저를 향한 순간,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이 자식, 뭘 보고 있는 거야?'
마치 그 눈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아타나스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로베르의 신성력 각성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신 루멘의 선택을 받으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전하. 앞으로 언제나 신의 가호가 함께할 것입니다."
교황의 직속 사제인 아타나시오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로베르의 신성력 각성을 인정했다.
당분간 로베르 황자의 복권을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리라는 모두의 예상이 단번에 깨진 것이다.
"그, 그렇다는 건, 로베르가 정말...."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황자님께선 예언의 저주받은 자가 아니십니다. 주신의 힘을 나누어 받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
황제는 감격에 젖어 말을 잇지 못했다. 대공 역시 같은 얼굴이었다. 황후도 이번만큼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긴장했군. 정말 신이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나?'
그런데, 마냥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복권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다음 황태자가 되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론 황자님 이외의 선택지가 생긴 것이지. 그 세력에서 이탈한 귀족들이 로베르 황자님에게 붙지 않을까 싶네."
아타나스의 행동은 로베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귀족들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상황은 쉽게 잊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왜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 것 같지? 설마 온종일 체면 구겨 가며 고생한 게 헛수고가 된 거야? 이런 개 같은!'
역시 샴페인 타워를 부수고 연회에서 쫓겨나야 했다.
아타나스의 등장으로 괜히 자신이 공들여 지은 탑만 무너진 꼴이었다.
로베르는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때, 그가 먼저 제게 말을 걸어왔다.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더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제 막 신성력을 각성하셨으니, 제가 도울 일이 있을 듯해서요."
"...좋습니다. 단둘이 보면 더욱 좋겠군요."
울면서 교황에게 돌아가 내 만행을 고자질하도록 만들어 주지.
로베르는 이를 갈며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용한 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진 대화에서 로베르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아타나스가 의외로 너무 좋은 인간인 탓이었다.
"상급 악마를 대면하기 전에는 어떤 조짐도 느낀 적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기적 같은 일이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루멘께서 황자님을 유달리 아끼시나 봅니다."
"지금 비꼬는 건가?"
"아니요, 진심입니다."
멋대로 말을 놓아도, 시비조로 답하면서 생트집을 잡아 봐도, 아타나스는 변함없이 예의를 차렸다.
로베르가 참다못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황자님께서 교황청에 적의를 가지시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대신 사죄드립니다. 황자님이 겪으신 수모를 보상해 드릴 방법은 없겠지만, 제가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어, 엉? 뭐 그럴 것까지는...."
"주신의 이름에 대고 맹세합니다."
아타나스가 사죄니 보상이니 하는 것들을 너무 쉽게 내어주는 탓에 불타던 전의가 한풀 꺾였다.
"각성통을 앓고 계신 듯한데, 제가 봐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강한 신성력은 그만한 고통을 불러옵니다. 지금의 제국에는 고통을 아는 자가 적어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만큼 강한가?"
"물론입니다. 지금의 상태로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이십니다."
아타나스는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선 로베르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로베르는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
"흠, 그럼 한번 봐주면 좋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타나스가 로베르의 옷소매를 걷더니 맥을 짚었다. 손목을 감싸 쥔 그의 손끝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그러자 내내 찌뿌둥하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지고, 두통 역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뜨겁던 속까지 한결 편안해졌다.
"사제가 돈을 많이 버나? 황궁의로 취직이나 하지."
로베르가 무심코 흘린 한마디에 또다시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특권 사제는 귀족의 비밀 의뢰를 자주 받기에 제법 수완이 좋답니다.
"꼭 돈 때문에 그 일을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황자님은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뭘 하고 싶냐니.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받아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 것치고 로베르는 늘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생 마음 편하게 놀고먹기만 하는 삶을 원해. 그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겠지."
"...그러시군요.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너도 그러길 바란다."
악마의 축복이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싱겁게도 그날의 대면은 그렇게 끝이 났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로베르의 연회를 빛내 준 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 * *
우여곡절 끝에 연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비록 직접 로베르와 대면한 귀족들은 악감정을 품게 되었으나,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로 여겨졌다.
한편, 시종장의 발길이 끊기며 자수정궁은 이전의 평화를 되찾았다.
"그래, 이거지. 그리웠다, 내 침대.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로베르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에 파묻힌 채 여유를 즐겼다.
연회를 훌륭히 망치지 못한 일을 어떻게 만회할 것인지는 잠시 제쳐 두고.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은 앤디는 온종일 침실 앞을 지키며 궁인들을 돌려보냈다.
'인간들은 꼭 무서운 게 있어야 충실해진다니까. 자유보다 복종이 어울리는 놈들이야.'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한가로운 생각을 하던 때였다.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화, 황자님! 안 됩니다! 저희 황자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셨다니까요!"
"이게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비켜."
"비킬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밟고 가십시오!"
퍽-. 강한 파열음과 함께 앤디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뒤이어 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양손에 술병을 든 아카키가 나타났다.
그 뒤로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대는 앤디가 보였다.
"아우님, 팔자 좋다? 담배는 또 언제 배웠대."
"끄으윽, 아, 안 돼...."
앤디는 로베르의 눈치를 살피며 끝까지 아카키를 붙잡으려 했다.
"앤디, 됐으니 문이나 닫아. 형님은 말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시거든."
대놓고 자신을 욕해도 아카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잘 아네. 네 시종에게도 확실히 일러둬라. 다음에 또 내 길을 막으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고."
"부,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황자님."
애처로운 사죄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형님."
"형님이 아우를 보러 오는 데 용건씩이나 필요한가."
"딱히 없으면 나가 주시죠. 보다시피 좀 바빠서요."
로베르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뻔뻔스레 말했다.
아카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손에 쥔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쪽도 바쁜 용건이라."
"어, 그건...."
로베르는 홀린 듯이 다가가 술병을 살폈다. 그건 분명, 릴리스 성에서 제조하던 마계의 술이었다.
"처음 보지? 릴리스 00년산. 내가 제국 전 지방을 순회하며 안 먹어 본 술이 없는데, 이것만한 걸 아직도 찾지 못했어."
"이, 이 귀한 걸 어디서...."
"교황청에 신성 전쟁의 전리품을 보관하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훔쳤다."
"...사제가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겁니까?"
"밀렸던 회포를 풀려면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 할 듯해서. 마음에 드냐?"
"제가 말했던가요?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형님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계의 술은 둘 사이의 벽을 쉽게 허물었다. 로베르는 기쁨에 취해 오찬에서의 원한은 금세 잊어버렸다.
"네가 이토록 말이 잘 통하는 놈인 줄 몰랐다! 진즉 자리를 가질 걸 그랬어. 편하게 대해라, 이참에 말도 놓고."
"그래, 형님. 앞으로도 방탕하게 살아.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아껴서 어디다 쓰게."
"나는 신을 모시는 몸이니 술 담배도 하지 말고, 여자도 만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
"뭐라고 떠들든 무시하면 그만이지. 안 들키면 죄가 아니라고. 자, 마음껏 피워!"
아카키는 시위라도 하듯 연신 파이프를 빨아 대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래, 네 말대로다. 정작 그놈들은 다 늙어서도 정부를 셋씩은 끼고 살거든."
"혼자서 여럿을? 상도덕이 없군, 음욕의 악마들보다 더한 놈들."
"그뿐이냐? 알게 모르게 새끼도 까서 제 자식이 가문을 잇게 해. 그러면서 평민 사제들이 여자랑 스치기라도 하면 파문해 버린다고."
"파문당하면 어떻게 되는데?"
"죽느니만도 못하게 사는 거지. 실체 없는 예언 하나로 황자까지 죽이려던 놈들인데, 파문 사제를 가만히 둘 리가 없잖냐."
"사제도 할 짓이 못 되는군. 아타나스한테 들은 거랑 다르네."
무심코 아타나스의 이야기를 꺼내자, 들뜬 목소리가 뚝 끊겼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아타나스가 강하니 어쩌니 했었지. 서로 아는 사이인가.'
아카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술병을 두드렸다.
쨍, 하는 소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마치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새끼가 뭐라던?"
"뭐든 좋은 말만. 좋은 인간 같던데."
"좋은 인간은 무슨. 다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야."
아카키가 낮게 중얼거렸다. 술에 젖은 얼굴이 해묵은 증오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건 뭐, 홧김에 죽여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로베르는 그 사실이 의아했다. 자신이 본 아타나스는 누군가에게 그런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눈은 대개 그런 쪽으로는 정확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카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털어놓지 않았다.
"아타나스를 믿지 마라. 넌 그냥 그것만 기억해, 나처럼 되기 싫으면."
그저 완전히 곯아떨어지기 직전까지 그 말만 반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타나스를 절대 믿지 말라고.
[14]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4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여느 날처럼 평화롭던 오후, 대공이 예고 없이 자수정궁을 찾았다.
"뭐? 숙부가 갑자기 왜 와!"
"황자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시던데요. 어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롭게 단장한 식당에서 오찬을 즐기던 로베르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다급히 응접실로 향했다.
"수, 숙부. 여긴 어쩐 일로...."
파토르는 언뜻 보기에도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로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기를 무섭게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 이게 다 무엇인지 설명해 보거라."
그가 들고 있던 노트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연회를 망치는 방법이 가득 적힌 페이지를 본 순간 로베르는 아찔해졌다.
'젠장, 어쩌지?'
노트를 테이블 위에 떡하니 두었던 과거의 자신을 두들겨 패기라도 하고 싶었다.
결국 연회를 무사히 마쳤으니, 대공이 따로 찾아오는 일도 없을 줄 알고 방심한 것이었다.
"로베르, 대답해라!"
"그것이...."
로베르는 파토르의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다행히 그는 장식 하나 달리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고, 검을 들고 오지도 않은 듯했다.
결국, 로베르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예, 제가 연회를 망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허...."
변명은커녕 도리어 당당한 태도로 나가자, 대공은 순간 할 말을 잃고 헛웃음만 흘렸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로베르, 연회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지 아느냐?"
"그,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저주를 농담거리처럼 언급하겠다고? 그렇게 너의 인생과 너를 위해 힘쓴 모든 이들을 우습게 만들어서 얻는 게 뭐지?"
"아니, 그건...."
"그건 너를 위한 연회였다! 네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그리 멍청하게 굴 수 있어!"
파토르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로베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속에 있는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럼 바랄 때나 주지 그러셨습니까."
"뭐라고?"
"흔한 탄신연 한번 열어 준 적 없으면서, 제가 필요해지니 아주 쉽고 빠르게 연회가 열리더군요. 그것만 알면 됐지, 다른 이들의 수고까지 알아줘야 합니까?"
"...."
"저를 우습게 만든 사람은 대공입니다. 그건 대공과 황실을 위한 연회이지, 저를 위한 게 아니죠. 저를 위해 힘쓴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다고요."
대공의 말을 반박하다 보니, 어느샌가 진짜 로베르가 된 것처럼 떠들고 있었다.
'가만.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대공이 나한테 실망하면 좋은 거잖아.'
로베르는 도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듯한 파토르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튼 저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바라는 건 그것뿐인데, 좀 도와주세요. 이런 일로 얼굴 붉히지 말자고요."
기세를 몰아 아예 쐐기를 박으려던 차에, 파토르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이 말부터 해야겠구나. 미안하다."
"예, 예?"
전혀 기대치 않던 사과를 받게 되자 로베르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대공은 자신이 엉뚱한 곳에 사과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채 사과를 이어 갔다.
"황실을 위한 연회였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위하는 황실에는 언제나 너도 포함되어 있단다. 이번 연회도 결국은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너를 지켜 주지 못한 것도, 네 의사를 전혀 묻지 않은 것도 모두 내 잘못이다. 진심으로 미안해. 다만, 지금 당장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가 없다."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대공이 제 평온한 삶을 되찾아 주기를 기대했던 로베르는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파토르가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삼 년. 그 안에 반드시 하론을 황태자로 만들고 황권을 회복하겠다 약속한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그동안만 황실을 위해 살아 줄 수 없을까?"
"그러고 나면, 삼 년 후에는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지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로베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파토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출궁할 때 받는 돈은 생각보다 적단다. 그렇기에 어떤 영지와 작위를 받는지가 매우 중요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지."
"영지 운영이라, 듣기만 해도 귀찮은데...."
"따로 관리인을 두면 될 일이다. 네가 원한다면 유능한 이를 소개해 주마. 너는 그저 네 저택에서 한가롭게 지내면 되는 거야."
...괜찮은데?
마왕성의 시종으로 일하기를 수십 년, 마왕의 계승자가 되어 벨페고르로 거듭난 지는 자그마치 수백 년이 지났다.
긴 세월 누려 보지 못한 평안을 이 삶에서 찾았는데, 웬 인간들의 사정에 휘말려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런 로베르에게 대공의 제안은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대공이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 기약 없이 발버둥 치느냐.
딱 삼 년만 고생하고 대공의 그늘 밑에서 호의호식하느냐.
'삼 년. 나한테는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니지.'
로베르는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자신이 얻게 될 것들을 셈해 보고는 빠르게 결론 내렸다.
"숙부, 저는 사람을 꽤 잘 봅니다."
"어?"
"계약 따위 하지 않아도 숙부가 약속을 지킬 사람이라는 걸 안다고요. 서로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잘해 봅시다!"
로베르는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다투었던 일은 없는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믿어 줘서 고맙구나. 삼 년 동안에도 네가 다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겠다."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으셔야 합니다."
"노력해 보지."
파토르는 결심한 얼굴로 그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제국의 거대한 갈등에서 빠져나가겠다는 로베르의 계획은 잠시 보류되었다.
* * *
그 시각, 아타나스는 교황의 집무실에서 그를 대면하는 중이었다.
"살다 보면, 다음 수를 위해서 한발 물러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래서 일부러 너를 보낸 것이었다. 알고 있느냐?"
"저 따위가 무슨 수로 성하의 뜻을 알겠습니까. 감히 짐작만 할 뿐이지요."
"너의 영민함이 그새 많이 무뎌진 듯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자를 인정해 주다니. 이제 아무도 그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어."
교황 측에서 로베르를 인정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일말의 의심까지 나서서 지워 줄 요량은 아니었다.
"로베르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남아야 한다. 절대 제국민들이 그를 동정해서는 안 돼. 그런데 네가 도리어 그 마음을 부추긴 꼴이구나."
"송구합니다. 그러나 신의 대리자로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께서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네가 그토록 신실하니, 내 손수 너를 키운 보람이 있다."
고저 없이 평온한 음성에 못마땅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타나스는 고개를 숙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들었다. 시야에 제 옷과 대조되게 흰 교황의 옷자락이 들어왔다.
고급 비단으로 지어진 교황의 법복은 완전한 순백의 색이었다. 작은 얼룩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사치스러워.'
아타나스는 흰 것을 계속 희게 만들기 위해 더럽혀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신도들의 믿음을 더럽히고 있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아타나시오, 듣고 있느냐?"
"듣고 있습니다, 성하."
"너를 곧 그 황자에게 보낼 것이다. 나의 눈이 되어, 가장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면 된다. 전에도 해 봤으니 어렵지 않겠지?"
교황은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의 일을 언급했다.
"아카키오는 아직도 너라면 치를 떨던데. 참 안타까운 놈이야. 신을 모시는 자라면 형제의 허물을 감싸 줄 줄도 알아야 하거늘."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텐데요."
"성녀의 전언이 있었다. 자신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으니, 저주받은 아이는 여전히 제국에 존재한다더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성녀의 예언으로 황자의 발목을 잡을 셈인가.
교황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타나스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진짜를 찾아서 신의 이름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성녀님의 말씀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아, 그 전에 성녀를 한번 만나 주렴. 그녀가 요새 부쩍 너를 찾더군. 너와 단둘이 보겠다는데, 내가 함께 가야겠느냐?"
"가지 않으셔도, 제가 보는 모든 것을 성하께서도 볼 수 있지 않으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눈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교황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지하실의 열쇠를 내주었다.
벽에 달린 등불이 길을 밝혔다. 아타나스는 그것에 의지해 끝이 보이지 않는 원형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마침내 굳게 닫힌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웬만한 사제들조차 알지 못하는 교황청의 최하층. 그곳에 성녀가 머무는 공간이 있었다.
끼이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낯선 이의 기척에도 성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영롱한 에메랄드빛 머리칼이 흘러내려 그녀의 주변을 뒤덮었다.
그 한가운데에 몸을 둥글게 말고 앉은 성녀는 바다 위에 홀로 떨어진 섬처럼 쓸쓸해 보였다.
"오셨어요."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약속했으니까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주겠다고."
그녀가 오래전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때의 기억이 함께 되살아나는 탓에 아타나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내가 아는 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이뤄 줄 자가 드디어 제국에 나타났다는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그대의 몫이지요."
"그게 누굽니까?"
그 물음에 미동도 없던 성녀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성녀는 이제 고작 스물셋이 된 아타나스의 또래로 보였다. 그것이 지하실이 품은 비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옷자락처럼 흩날리며 아타나스에게 다가왔다. 흰 비단으로 지은 슬립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드러냈다.
아타나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눈을 돌리자, 그녀가 까치발을 들더니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숭은. 이미 만나고 오셨으면서요."
"단지 확실히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부탁드린 건, 준비됐습니까?"
성녀는 대답 대신 방구석에 놓인 자루를 가리켰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그 안에서 유리병 하나가 튀어나왔다.
탁-. 아타나스는 허공에 떠오른 유리병을 잡아챘다. 투명한 성수가 넘칠 듯 출렁였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따로 바라시는 게 있으면, 다음번에 가져다드리죠."
"저도 그를 만나 보고 싶습니다. 로베르 황자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이가 로베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못 박으며 무리한 부탁을 해 왔다.
"왜 그를 만나려 하십니까?"
"재미있는 자인 것 같아서요. 이곳까지 소란스러워진 건 제법 오랜만인 것 같거든요."
"뭐, 웃기는 자이긴 합니다."
연회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타나스가 막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날은 최악의 연회로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것이다.
"바라신다면 기회를 만들어 보겠지만, 너무 기대치는 마세요. 그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그때, 성녀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황자에게 어떻게 접근할지는 생각해 두셨고요? 황실의 경계를 뚫기가 쉽지 않을 듯한데요."
"...모르십니까?"
"무엇을요?"
성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교황청에서 어떤 일을 벌이려 하는지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교황의 명분은 분명 성녀의 전언이었음에도.
"하나만 묻겠습니다. 최근 교황청에 신의 음성을 전한 적이 있으십니까?"
"들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전하겠어요?"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지금의 성녀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듣지 않은 것도 전하셔야 할 겁니다. 오래 살아남으시려면."
"제국의 성녀는 이미 지겹도록 오래 살고 있는걸요."
그녀는 아타나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아타나스는 그곳을 벗어나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15]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5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3)
주신을 섬기는 것은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제국민의 의무였다.
"연회를 마치면 반드시 감사 기도를 올리셔야 합니다. 대공께서 보는 눈이 많으니 잠깐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이제 하다 하다 신한테 기도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래, 삼 년. 삼 년만 참자."
로베르는 이를 악물고 예배당으로 향했다. 자수정궁에 새로 배정된 기사단이 그를 뒤따랐다.
황궁 사람들은 누구나 본궁의 예배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예배당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여기서부터는 따라오지 마라."
기사들이 일제히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로베르는 그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인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내부는 고요하고 어두웠다. 조명 대신 제단 위의 초들이 불을 밝혔다.
제단 한가운데에 검을 세 개는 이어 붙인 듯한 크기의 십자 성검이 걸려 있었다. 천장의 자그마한 창을 통해 그 자리에 한 줄기 빛이 내렸다.
로베르는 일렬로 맞추어진 기다란 의자 사이를 지나, 천천히 제단 앞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박제되어 빛을 잃은 듯하지만."
마왕들마저 공포에 떨게 했던 성검은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 위에 있는 게 신인가? 하긴, 그러니 인간들이 당신을 믿는 거겠지."
로베르는 속는 셈 치고 본 적도 없는 주신에게 기도했다.
자신은 정말로, 그냥 놀고먹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러니 부디 제국 놈들의 위협으로부터 제 평안한 삶을 지켜 달라고.
"삼 년? 아니, 더 짧게 끝났으면 해. 빠를수록 좋아. 하루라도 빨리 다시 놀고먹고 싶거든."
죄악에서 태어난 자가 앞으로도 죄악을 저지를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꼴이라니. 성직자들이 알면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
긴 요구 사항이 끝나 갈 즈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안에 로베르 황자님께서 계십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어째서 나를 막아설 이유가 되지? 문을 열도록 해."
문이 열리고, 하론이 걸어 들어왔다. 의복을 제대로 차려입는 유일한 황자답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이었다.
'겉은 제일 멀쩡한데 정이 안 가는 놈이군.'
로베르는 하론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고는 서둘러 기도를 마무리했다.
그사이 하론은 곧장 제단 앞으로 걸어오더니 로베르와 나란히 섰다.
"인생 첫 연회를 마친 소감이 어떠니?"
"기도 중에는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던데요."
"응?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로베르는 대답 없이 하론을 빤히 바라봤다. 하론의 태도가 황족들이 있을 때와 묘하게 다른 것이 거슬렸다.
하론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난데없이 짧은 기도문을 외웠다.
"주신, 루멘께서 이르시길. 남의 것을 탐하는 자, 고통만을 얻을 것이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좇는 자, 설 곳을 잃게 되리라."
"...예?"
"네가 갑자기 왜 세상에 나서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우야."
그건 경고였다, 황태자가 될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는.
"숙부께 이미 답을 드렸을 텐데요."
"앞으로는 대공에게 답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 답하렴."
"안 됩니다."
로베르가 단칼에 거절하자 하론의 미소에 금이 갔다. 하론은 온화한 표정과 대조되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어째서?"
"숙부님 말을 잘 듣기로 했거든요. 좀 무섭잖아요, 그분은."
"나는 네게 그런 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정확하십니다. 좋은 거 아닙니까? 저와 잘 지내고 싶으시다면서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
하론과 잘 지내야 한다는 앤디의 당부를 떠올린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론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는 친근함을 표하기 위해 하론의 어깨를 짚었다.
"그럼 저는 이만. 기도 잘하고 가세요."
그가 돌아서자 초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다시금 피어올랐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꺼트릴 방법은 없다는 것처럼.
하론은 로베르가 보지 못한 그 불꽃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
얼마 뒤, 파토르가 성녀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윈터스 대공령의 관리인이 급한 연락을 취해 왔다.
[세라 공녀가 위독하십니다. 계속 대공님을 찾으세요.]
결국 대공은 제대로 떠날 채비조차 하지 못하고 곧바로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 교황청에서 아타나스를 파견했다.
아타나스의 요청으로, 로베르는 황제의 알현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왔구나, 로베르 황자. 편하게 앉거라."
곤란한 얼굴을 한 조너선이 로베르를 반겨 주었다.
"또 보는군."
"다시 뵈니 기쁩니다, 전하. 몸은 좀 어떠신가요?"
"덕분에 멀쩡해졌어."
로베르는 아타나스의 맞은편에 앉아 미리 준비된 차를 들었다.
"황자도 자리했으니, 이제 용건을 말해 보게. 무슨 일로 이리 갑작스레 온 건가?"
하필 대공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교황청의 사제가 황궁을 방문한 것이 수상쩍었다. 조너선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그를 재촉했다.
아타나스는 미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찻잔을 내려놓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를 황자님의 스승으로 삼아 달라는 성하의 청을 전하러 왔습니다."
"뭐? 갑자기 무슨 스승이야?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성가신 기운을 감지한 로베르가 급히 소리쳤다.
"아니요, 황자님은 제가 필요하십니다."
"뭐야, 그 오만한 태도는."
"신성력을 각성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제 맞는 연공법을 찾아 단련하시고, 힘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셔야 합니다. 황궁에 그 일을 도울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당장 각성통조차 해결하지 못하신걸요."
아타나스의 논리는 완벽했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와 맞닥뜨린 조너선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동요를 눈치챈 로베르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궁에는 아카키 형님이 계신다. 형님으로 충분해!"
"그분은 궁에 오래 계실 수 없습니다. 특권 사제는 의무적으로 제국 영지를 순회하며 각 교구로 들어온 구마 의뢰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 그건.... 잠깐, 너도 특권 사제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같은 처지잖아."
"저는 황자님을 충분히 가르친 후에, 황자님과 함께 순회를 나설 예정입니다. 그때 성녀님의 예언 속 저주받은 자를 찾아 정화할 거고요."
성녀의 전언에 의하면, 제국에 전쟁을 불러올 저주받은 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타나스는 그자를 찾아 전쟁의 불씨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고, 로베르도 그 여정에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 긴 이야기의 요지였다.
"대체... 교황청은 어디까지 뻔뻔하게 나올 셈인가?"
조너선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잘못된 예언으로 황자를 괴롭힌 것을 사죄하지는 못할망정, 뭘 하라고? 설령 성녀의 전언이 사실이래도 받아들일 수 없네!"
"폐하, 성녀님은 늘 옳습니다. 그녀를 부정하시는 건, 주신 루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틀린 건 예언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얄팍하게 해석한 우리겠지요."
아타나스가 싸늘한 대꾸로 황제의 입을 쉽게 틀어막았다.
신성 제국에서 루멘에 대한 불신은 이단자라는 낙인으로 이어졌다. 그 낙인은 황제의 자리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젠장, 교황청에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언이 아닌 해석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오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예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덧붙여 황자께서 제국을 위한 일에 앞장서시는 건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황자님을 향한 제국민들의 오해도 벗길 수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이지요."
아타나스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황제를 계속 몰아붙였다.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순 사기꾼이잖아? 악마의 눈을 속이다니. 보통 놈이 아니야.'
로베르는 이러다 그에게 완전히 말리겠다는 생각에 점점 초조해졌다.
"네가 뭔데 잘난 척 떠드는 거지? 내가 뭘 할지는 내가 정한다."
그리고 내가 제국을 위한 일에 앞장서는 건 별로 당연한 일은 아니라고!
로베르는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겨우 정신을 차린 조너선이 로베르의 발언을 보충해 황실의 입장을 전했다.
"아타나시오 사제, 황자의 스승을 정하고 업무를 맡기는 건 전부 황실의 일이네. 교황청에서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지. 그러니 교황의 청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어."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이건 성하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청일 뿐이니까요."
아타나스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물러서는 척 다음 공격을 위한 포석을 깐 것에 불과했다.
"신성력을 타고난 황족은 교황청의 부름에 응한다, 는 불문율에 대해 아시겠지요. 거절하신다면, 황자님은 사제가 되셔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황실이 간섭할 수 없는 교황청의 영역에 속하시는 겁니다."
"...뭐?"
"그러나 청을 받아들이시면, 사제 서품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하십니다. 황자님이 직접 긴 저주를 끝내고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안을 받아들이면 성녀를 부정할 여지를 완전히 잃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로베르를 아카키와 같은 신세로 만들어야 했다.
조너선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황자의 뜻이 중요하겠군."
긴 침묵 끝에 황제는 결국 그 선택을 로베르에게 넘겼다. 배려가 아니라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가까웠다.
"폐하! 아니, 아버지! 뭔 아버지가 숙부만도...."
흥분한 로베르가 막말을 퍼부으려던 순간, 아타나스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이거 안 치워!"
"폐하, 황자님과 둘이서 대화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황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로베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챈 조너선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봐요!"
결국 로베르는 연행되다시피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 * *
"더 말할 것도 없어. 나는 절대로 싫다! 그런 줄 알아."
로베르는 다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반면, 아타나스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혹시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또다시 같은 질문. 심지어 이번에는 황태자보다 더한 황제였다. 로베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그를 노려봤다.
"이 인간들이 왜 자꾸 그딴 걸 묻지?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예상은 했습니다만, 제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아타나스가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로베르는 돌변한 그의 태도가 기가 차는 탓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했듯 저는 황자님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황자님께서는 자유롭고 평안한 삶을 원하시죠. 그러나 당장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고요."
"...아무튼 너는 필요 없다. 숙부로 충분해."
"아니요, 필요하십니다. 대공은 황가를 위하지만, 저는 황자님을 위할 테니까요."
어느 한쪽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니, 갈등의 중심이 된 로베르는 모두를 등지지 않아야 한다는 게 아타나스의 주장이었다.
"저와의 순회로 우선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가 될 수 있겠죠. 또한 귀족들의 의뢰를 해결하며 신뢰를 얻어 황자님을 지지해 줄 기반을 다질 수 있습니다. 대공께는 가장 빠르게 세력을 모을 방법이라고 설명하면 되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황실이 승리할 경우, 로베르는 예정대로 대공이 주는 보상을 누릴 수 있다.
교황청이 승리할 경우, 로베르는 이단으로 몰리는 대신 제국의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충분한 보상을 받으면서.
"어차피 어느 쪽이든 생존을 위해서는 지지 세력이 필요합니다. 하론 황자가 황태자가 된 뒤 황자님을 제거하려 들면 어쩌실 겁니까?"
아타나스는 벌써 로베르의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열정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너무 그럴듯해서 무서울 지경이군.'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 그가 현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대공과 대단한 신의를 쌓은 것도 아니고, 꼭 황실의 편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로베르는 그저 자신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친절하게 설명해 줘서 고맙다. 참고해서 앞으로도 잘 살아남아 보지. 근데, 너는 필요 없어. 너무 꺼림칙하달까."
그럼에도 로베르는 끝내 그를 거절했다.
아타나스를 믿지 마라.
그 말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악마의 눈은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 거울에 아타나스의 상만큼은 전혀 비치지 않았다.
그의 욕망, 목적, 하다못해 어느 편에 선 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저런 인간은 위험해.'
대화를 나눌수록 그것만이 확실해졌다. 차라리 하론을 믿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결국 거절이군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유감입니다."
아타나스가 떠나려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로베르를 내려다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지만 황자님, 거절은 불가합니다. 저는 지금 황자님께 제안이 아닌, 협박을 하고 있거든요."
"뭐?"
촤아악-. 그 순간, 성수가 로베르의 위로 쏟아졌다.
"켁, 쿨럭, 이런 미친 새...."
그러나 말을 제대로 끝낼 수조차 없었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뒤이어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고통이 번졌다.
"...어?"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닦아 내도,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 얼굴을 적셨다.
'이, 이게 뭐....'
로베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아타나스를 올려다봤다. 한쪽 눈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며 악마의 것임을 드러냈다.
"우선 어떻게 그 몸에 들었는지부터 털어놓도록 할까, 마왕."
아타나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16]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6화. 악마와의 계약 (1)
사실 아타나스는 첫눈에 로베르의 정체를 알아봤다.
"아타나시오 사제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로베르 황자가 궁에 침입한 상급 악마를 무찔렀답니다."
"로베르? 아카키 황자님이 아니라?"
"그렇다니까요, 영문 모를 일이죠. 궁에는 벌써 로베르 황자가 신성력을 각성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소문 속의 로베르는 자신이 기억하는 막내 황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과거 아카키를 따라 궁을 드나들던 시절, 그는 종종 로베르와 마주쳤다.
로베르는 다른 황자들이 검술 훈련을 받을 때마다 괜히 연무장 주변을 서성거렸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형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구석에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황자님,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 나는 그냥...."
그 모습이 처량해 보여 물으면, 로베르는 허둥거리다가 꼭 무언가 사고를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 어, 죄, 죄송...."
요란하게 넘어지거나 훈련 장비들을 쏟은 것 정도는 황자에게 별일도 아닐 텐데, 로베르는 언제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로베르,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하론은 늘 괜찮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베르를 달래 주었다. 그러면 로베르는 하론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쯧. 아타나스, 저 모자란 놈한테 말 걸지 말라니까."
아카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발길을 돌렸다. 끝까지 로베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서로를 혐오하는 형제들 사이에서 로베르는 유일하게 다른 것을 바라는 황자였다.
'오래 살아남지는 못하겠네. 제국에는 잘된 일인가.'
그게 로베르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에 로베르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뒤, 아타나스는 소문의 진위를 파악해 오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척을 숨긴 채 성기사 결투를 지켜봤다.
"그래서, 누구부터 상대하면 되나?"
"...."
찰나의 빛이 걷히고 로베르가 성기사단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타나스는 도저히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주받은 황자의 몸에 악마가 들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은 각성과 동시에 '신성안'을 부분 개방한다. 그때부터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혼의 기운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타나스는 현 제국에서 유일하게 신성안의 완전 개방에 성공한 자였다.
그건 신성력이나 오러, 마기 따위를 단지 느끼는 데 지나지 않고 힘의 근원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신성력과 마력을 구분하지 못한 다른 인간들과 달리, 그의 눈에는 로베르가 가진 악마의 심장이 보였다.
마계와 인접한 변경백령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그가 신성력 코어와 악마의 심장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상급 악마를 소멸시킨 건 로베르가 아니라 그 몸에 든 더한 악마였다.
"다들 보셨습니까! 이제 다시는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로베르는 결투 내내 상대를 칼등으로만 제압했다. 그는 얼핏 황자의 은혜로 보이는 행동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그 악마는 상대를 오래 가지고 놀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즉사라도 하면 그대로 결투가 끝날 테니까.
제국을 무너뜨릴 악마의 출현.
전대 성녀가 남긴 예언이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방향이었으면 했다.
'제가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겁니다, 성하.'
교황마저 로베르를 믿게 하는 동안, 아타나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사실 아타나스와 초면이 아니었다는 대목에서 로베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 뵙는다는 인사에 누구냐고 답한 순간부터 자신은 줄곧 아타나스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지? 내가 마왕이라는 것까지 알면서 모르는 척 신성력 각성자로 인정했다고?"
로베르는 피범벅이 된 채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도저히 눈앞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역시 마왕이 맞군요. 그 부분은 확신하지 못했는데."
아타나스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의 실체를 알고 나자, 그 미소가 어떤 악마들의 웃음보다 훨씬 사악해 보였다.
"뭐, 그게 뭔...?"
대화를 나눌수록 머리가 새하얘지는 탓에 로베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잠시 자수정궁에 들러 현장을 살펴봤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바임의 마력이 남아 있더군요. 제가 사냥하던 놈 중 하나라 단번에 알아봤죠."
"뭘, 뭘 한다고? 바임을 사냥? 상급 악마가 무슨 사슴이나 새 같은 건 줄 알아?"
"바임이 분노 일족의 군단장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최상급을 아주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악마라, 마왕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직접 바임을 죽였으니 사탄은 아닐 테고. 사실 굳이 소거법을 쓸 필요도 없이 바로 알겠던데요, 당신이 나태 마왕이라는 것 정도는."
"...."
"마왕이 신성 제국의 황자가 되었을 때는 복수라도 하겠다고 날뛰어야 정상인데, 바라는 게 고작 '평생 마음 편하게 놀고먹기'라니. 도저히 한 일족의 우두머리가 할 생각 같지 않아서 있던 확신도 사라질 뻔했지만요."
"...."
"이제 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볼 마음이 드십니까, 황자님. 아니, 벨페고르 마왕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그 입에서 기어코 로베르의 옛 이름까지 흘러나왔다.
여러 번 정곡을 찔린 로베르는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사이 아타나스는 품에서 새 유리병을 꺼냈다. 성수를 뒤집어쓴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로베르가 다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미리 경고하는데, 두 번은 안 당해 준다."
"설마 두 번이나 같은 방법을 쓸까요."
아타나스는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건 해독제입니다. 마시면 몸이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 인간 같지 않은 눈을 포함해서요."
아타나스가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로베르는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먹인 독을, 네가 해독해 주겠다?"
"황자님이 성수가 독이 되는 체질을 가지신 것이 제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저는 지금 황자님께 살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진짜 뭐 저런 인간이...."
뻔뻔하기로는 쉽게 져 본 적이 없는 로베르였지만, 이번만큼은 아타나스의 압승이었다.
'이슈타르, 네가 나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조금은 알겠다.'
로베르는 치를 떨며 그를 노려봤다.
몸이 욱신거리고 속이 분노로 끓을수록 도리어 머리는 차분해졌다. 그제야 비로소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나 확실한 건, 저 새끼는 내가 여기서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지.'
지금 믿을 수 있는 구석은 그것뿐이었다.
퉤. 로베르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고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정체 모를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감각이 소름 끼친 것도 잠시, 이내 피가 멎었다.
뒤이어 불길에 사로잡힌 듯 뜨겁던 속이 안정을 찾아갔다. 로베르는 다시 인간의 것으로 돌아온 제 눈을 병에 비추어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를 믿기로 하셨습니까?"
"지랄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네가 내 정체를 알고도 숨긴 데는 이유가 있겠지. 최강의 사제라는 놈이 신을 배반하고 모두를 기만하면서까지 나한테 접근한 목적이 뭐야?"
인간의 손에 죽은 일족들의 복수를 하는 게 마왕이 할 만한 일이라면, 그 마왕을 찾아내자마자 어떻게든 죽이는 게 사제의 일이었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건 아타나스도 매한가지라는 뜻이었다. 우선 그의 저의를 알아내야 했다. 대응은 그다음 순서였다.
로베르가 예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자 아타나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머리를 쓸 줄 아시는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네겐 불행에 가깝겠지."
"오해하신 모양인데, 제가 황자님을 마냥 이용만 하려는 건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황자님께 가장 필요한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방금 이 해독제처럼 말이지. 매번 이런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널 죽이는 게 나은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일순 로베르의 말이 뚝 끊기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말 그편이 낫지 않나? 저놈을 내버려 두는 게 더 위험하잖아.'
문은 잠겼고, 방 안에는 둘뿐이고, 바닥은 로베르의 피로 젖어 있다. 잘만 이용한다면 이곳에서 상황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아타나스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기회만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로베르의 싸늘한 눈동자가 아타나스를 천천히 훑었다. 상대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내고 싶어 안달이 난 눈이었다.
아타나스는 아무런 동요 없이 찻잔을 들었다. 잠시 그의 얼굴 위로 성가신 기색이 스쳤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오셨으면, 제가 굳이 황자님을 협박할 일도 없었을 텐데요."
"내가 마왕다운 일을 해 주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뭐?"
가볍게 던진 말에 예상치 못한 대꾸가 돌아오자, 로베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쨍-. 아타나스는 찻잔을 대충 비우더니 테이블 위로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예법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듯한 다소 투박한 움직임이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 제국이, 특히 교황청이 아주 처참하게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제 숙원을 이뤄 줄 존재인 줄 알았죠. 그날 연회에서 그 멍청한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허?"
말문이 트이자, 아타나스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본심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비록 기대와는 달랐지만, 저는 당신이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황자의 몸에 든 마왕이라니, 존재만으로 언제든 신성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아냐?"
그 입에서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 흘러나왔다. 로베르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여의찮더군요. 협조를 구한다고 순순히 협조할 위인도 아닌 듯하고. 마왕을 살리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당신을 끌어내려면 이 방법뿐이었습니다."
"무슨, 누가 누굴 살려?"
"제가 가진 패는 충분히 깐 것 같으니,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 보죠. 방법은 차치하고, 대체 왜 코어를 가진 인간의 몸에 들었습니까? 악마에겐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텐데요."
"...내가 뭘 했다고?"
그러니까, 로베르가 진짜 신성력 각성자였다고?
시한폭탄은 자신이 아니라 아타나스의 혀인 듯했다. 로베르는 대체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아니, 말도 안 되지. 그랬다면 내가 진즉 이상한 걸 눈치챘을... 어라?'
여태껏 무심코 지나쳤던 나쁜 징조들이 로베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상할 정도로 나쁜 몸 상태, 어딘가 문제가 생긴 듯한 심장, 갑작스레 쓰러진 날 원래 로베르의 기억을 보게 된 일까지.
"지금 당신 몸에는 악마의 심장과 신성력 코어가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집어삼킬 듯한 모양새로요. 설마, 정말 몰랐습니까?"
아타나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의사들이 쓸 법한 나긋한 음성으로 진단을 내렸다.
"아직은 악마의 심장 쪽이 강하군요. 성수를 직접 마시는 것도 생각보다 효과가 덜한가 봅니다."
"같은 방법을 두 번 쓰진 않는다며, 개새끼야...."
한마디로, 지금 내가 시한부라는 거지? 로베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7]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7화. 악마와의 계약 (2)
아타나스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정보 하나, 원래 로베르는 신성력 각성자였다.
둘, 그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코어를 봉인하고 망가뜨리려 했다.
셋, 그러나 벨페고르가 그의 몸 안에서 부활하며 코어의 봉인이 풀렸다.
새롭게 얻은 바임의 마력이 불안정한 코어를 공격하면서 빠른 속도로 몸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로베르 황자님이 목숨을 걸고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네요. 그렇다면 문제가 꽤 복잡해지는데...."
"그럴 리가, 난 로베르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이거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해?"
로베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타나스에게 정체를 들킨 것쯤이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여겨졌다.
"전례 없는 일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합니다. 심장과 코어의 균형을 유지하면 되는 겁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러니 우선 코어를 완성하고 신성력을 단련해야 했다. 어느 경지에 오르면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성수에 반응하는 일은 없어질 터였다.
"그 부분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심장 쪽인데, 코어와 공존하는 채로 힘을 유지하려면 훨씬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할 겁니다."
"마력은 문제 될 거 없어. 다른 놈들의 마력을 빼앗으면 그만이니까."
필요할 때마다 악마를 사냥해 마력을 채워 넣는 건 성가신 일이 되겠지만,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날 방법치고는 간단한 편이었다.
'더 성가신 건 내 코어를 봉인한 인간 쪽이군.'
그 인간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더라도 분명 지금 상황을 의심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인간의 정체조차 모르는데, 그놈은 언제라도 나를 위협할 수 있다니. 이런 건 재미없는데."
"가장 의문스러운 건, 저 역시 황자님을 직접 진찰해 보고서야 코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겁니다."
"아까는 신성안인지 뭔지가 있어서 다 보인다며?"
"힘의 근원을 볼 수 있는 것뿐 만능은 아니라서요. 봉인된 코어에는 힘이 들어 있지도 않았을 테니. 눈치채지 못한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기사 결투 당시에는 이미 코어의 봉인이 풀린 후였다는 게 문제죠. 그때 악마의 심장에 정신이 팔려서 놓친 건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코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이미 마기에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아타나스는 오늘 성수로 겨우 정화하기 전까지 그것이 도저히 코어로 보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잠깐, 잠깐. 성수는 둘째 치고, 마기에 잠식돼 있었다는 게 뭔 소리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황자님에게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요."
그건 로베르의 코어를 봉인한 범인이 곁에서 그를 서서히 죽여 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혹은 악마로 만들려 했거나.
'이쯤 되니 의심이 드는군. 내가 이 몸에서 부활한 게 정말 우연인가?'
정보를 종합해 보면, 누군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벨페고르가 로베르의 몸에서 눈을 뜨는 일은 결코 없었을 터였다.
범인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로베르의 육체를 악마가 들 수 있는 몸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로베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그놈을 찾아야겠어."
범인은 분명 로베르를 살해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로베르가 먼저 그 인간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죽여 버려야겠지."
"그럴 수 있는 상대라면,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아타나스가 비꼬듯 답했다.
로베르는 이를 악물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사제를 노려봤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이겼어. 스승, 그거 하라고."
아타나스도 그 인간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임은 틀림없었지만, 지금은 더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
범인을 찾는 일은 물론이고 당장 생존을 위해서라도 아타나스가 필요했다.
'나를 이용하겠다고? 나야말로 널 철저히 써먹어 주지.'
그런 로베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타나스의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협박 정도는 해야 간신히 먹히는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너는 나와 계약하는 것이다."
로베르가 코웃음 치며 마계어로 주문을 발동했다.
두 사람의 발밑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새겨졌다. 아타나스는 복잡한 문양을 빤히 보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너 설마 마계어도 알아듣냐?"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마법진의 종류를 구분할 줄 아는 것뿐이니까요."
"일족마다 고유 마법진이 달라서 악마들도 헷갈리는데, 그걸 무슨 수로?"
"교황청에 있는 기록서를 전부 외웠거든요."
수백 년에 걸쳐 수집된 자료를 전부 외웠다니. 무서울 정도로 지독한 인간이었다.
"너 같은 인간이 내 계약자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로베르는 짜증스레 대꾸하며 재킷의 브로치를 뜯어냈다. 그러고는 아타나스의 앞으로 툭 던졌다.
"그럼 어떻게 하는지도 알겠네. 그어."
아타나스는 순순히 브로치를 집더니 장식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제 목을 그었다.
살결에 반듯한 선이 그어지고, 붉은 핏줄기가 흘렀다.
아타나스는 피를 손으로 받아 내어 마법진에 흘려보냈다. 일상적인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제 손으로 목을 긋는 놈은 또 처음 보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악마와 계약하겠습니까."
신성한 피를 머금은 마법진에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는 내 정체를 절대 함구하고, 나의 충실한 종이 되어 어떤 순간에도 내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제 피와 영혼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지?"
"무엇이든 가능한 겁니까? 이를테면, 당신이 소유한 마몬의 금광 일부를 넘겨받는 것도?"
"뭐?"
아타나스는 뜻밖의 대목에서 또다시 로베르를 당황케 했다.
마몬은 탐욕 일족의 마왕으로, 마계와 인간계를 가로지르는 '마르지 않는 금광'의 소유자였다.
신성 전쟁 당시 각 일족의 마왕들은 탐욕 일족을 보호하는 대가로 금광 일부를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지금, 웬 인간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 로베르는 그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그걸 어떻게...."
"상급 악마들을 여럿 사냥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습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레퍼토리에 늘 등장하던데요."
"그래서, 사제라는 놈이 마왕을 협박해서 악마들의 금광에 손을 뻗겠다?"
이 계약에서 도대체 어느 쪽이 악마인 건지. 로베르는 정체성의 혼란마저 느꼈다.
"기껏해야 백 년쯤 사는 미물 주제에, 금광까지 바라는 이유가 뭐야?"
"어머니께 효도하려고요."
"...너는 그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냐?"
아타나스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로베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집어치우고, 아무튼 그게 네가 바라는 대가라는 거지? 안됐지만, 내 금광 열쇠는 이슈타르가 가지고 있어. 아마 죽었을 거고."
"그렇군요, 아쉽게 됐네요. 그럼 대가는 언젠가 제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는 걸로 대신하죠."
아타나스가 너무도 쉽게 금광을 포기한 순간, 로베르는 처음부터 그가 원하는 게 따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처럼 속이 시커먼 인간이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저는 단지 자유를 바랍니다. 이다음은 지금부터 당신이 찾아 주시면 좋겠군요. 사정이 있어서 제 입으로 밝힐 수가 없거든요."
"웃기시네.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는데?"
"원하지 않으시면 모르는 채로 두셔도 됩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테고, 당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이뤄 줄 수 있고, 결코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소원만 빌 수 있다는 걸 조건으로 걸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이거, 너무 일방적으로 나한테만 유리한 계약 아닌가?
정체를 건 협박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음에도 아타나스는 자신이 불리한 조건까지 전부 받아들였다.
로베르는 그 사실이 의아했으나, 제게는 좋은 일이었기에 서둘러 계약을 마무리하려 했다.
"좋아, 알아 두지. 네 입으로 뱉은 말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너는 원하는 걸 얻을 거다."
어긴다면,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장 고통스럽게 죽겠지만.
로베르의 말이 끝나자 아타나스의 목에 표식이 새겨졌다. 뒤이어 마법진의 빛이 그 위로 옮겨 갔다.
"악마와 계약한 걸 축하한다, 아타나시오 사제."
마침내 완성된 계약의 표식이 불길하게 타올랐다.
* * *
그 시각, 교황의 집무실에서는 세 사람의 은밀한 회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라 공녀 쪽은 잘 처리했습니다. 공녀가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대공은 당분간 제 영지에 묶여 있을 겁니다."
임무 수행을 마친 눅스가 교황에게 대공령의 소식을 전했다.
대공령에서는 통신구를 포함한 모든 아티팩트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 탓에 파토르는 아직 수도의 상황을 전달받지 못했다.
"하하, 신을 부정하고 제멋대로 군 대가를 이렇게 돌려받는군. 다른 소식통 역시 전부 막아 두었겠지?"
"궁인들과 상단 쪽은 처리했으나, 귀족들에게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하여... 새어 나가는 이야기를 완전히 막기는 힘들 듯합니다. 송구합니다, 성하."
교황이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자 눅스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막을 수 없다면, 대공의 귀를 어둡게 만들면 그만이지요."
그때, 소파에 늘어져 있던 젊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발렌시아 공작가 출신의 추기경, 루시안이었다.
"제 누님께서 황실파 귀족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두었으니, 그쪽에도 혼선이 있을 겁니다."
대공은 긴급 의회가 소집된 사실을 알지 못하나, 의회의 귀족들은 이미 대공의 불참 의사를 전달받은 뒤였다.
그리고 대공을 대신해 에리카 발렌시아 공작이 임시 의장직을 맡았다.
"대공에게 소식이 닿을 즈음이면 이미 안건이 의회를 통과한 후일 겁니다. 그때 가서 대공이 뭘 어쩌겠나요, 그는 신이 아닌 것을."
"훌륭하다, 루시안."
교황의 엄숙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루시안은 화답하듯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성하의 뜻대로입니다. 아타나시오가 맡은 일을 잘해 내기만 한다면."
"그쪽은 걱정할 것 없다. 그 아이는 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거든."
"과연 그럴까요?"
루시안이 교황의 확언에 의문으로 답하자 일순 집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루시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둥글게 휜 눈가가 싸늘한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교황은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저, 가끔은 성하께서 그를 너무 믿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지 않나요, 눅스 경."
"아타나스는 충실한 자입니다, 오래된 친우인 예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눅스가 제 말에 동조하기는커녕 오히려 아타나스를 옹호하자 루시안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그는 제 수족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친우가 될 수는 없지요."
"루시안, 너는 아직 그 자리에 걸맞게 자라지 못한 듯하다. 죄 없는 형제를 그렇게 미워해서야 되겠느냐."
"결코 신에게 인정받지 못할 부정한 자가 신성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중죄가 아닌가요."
"부정한 자라, 그 아이의 비천한 태생을 문제 삼는 네게 하나만 묻겠다. 그렇다면 네가 직접 제국을 순회하며 악마들을 잡고 싶으냐."
아타나스를 대신할 능력이 있느냐고 비꼬는 말이었다. 루시안은 괜한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짜증 나는 늙은이.... 당신 하나쯤 죽일 능력은 있어.'
루시안은 본심을 삼킨 채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루시안. 그저 생각을 달리해 보라는 것이지. 아타나시오가 비천한 존재인 건 너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란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타나시오가 손에 악마의 피를 묻히는 동안, 너는 이곳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으냐."
신성 전쟁은 끝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마계의 문은 여전히 제국을 향해 열려 있었다.
왕을 잃은 악마들은 결속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언제든 제국을 다시 전쟁의 공포에 잠기게 할 만큼 강했다.
지난 수십 년간 악마들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습격을 일으켰다.
신성 영웅들은 승전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또다시 악마와 싸워야 했다.
그러자 제국민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빵 한 덩어리 살 돈까지 아껴 헌금을 바치고, 무너진 집보다 신을 섬길 성전을 먼저 지었다. 에피파네스 황가를 잊고 교황을 섬겼다.
그리하여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지금의 교황청이 완성되는 동안, 신성 영웅들은 악마의 곁에서 서서히 죽어 갔다.
그들의 죽음으로 완성된 영광을 대신 누린 건 교황청의 주인이었다.
"나의 시대에는, 아타나시오가 바로 그 영웅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아이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뿐이었지.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가 버렸다는 걸,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 테니.
그건 아타나스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저주였다. 그렇기에 교황은 아타나스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막, 악마와의 계약으로 오래된 저주가 깨어지고 있었다.
[18]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8화. 악마와의 계약 (3)
계약을 마친 로베르는 아타나스에게 이제껏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적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당신은 코스 요리를 먹고 낮잠이나 자다가 죽었는데. 깨어나 보니 백 년이 넘게 지났고, 당신은 로베르 황자가 되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타나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문제 있어? 전쟁 통에도 배는 고픈 법이다."
"...낮잠은 왜 잤습니까? 악마에게는 수면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 배웠는데요."
"누워 있으면 졸린 건 똑같아. 잘 수 있는데, 왜 참아야 하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타나스는 이 자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싶은 얼굴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로베르가 되었다는 쪽이야. 나는 그게 이 몸의 코어를 봉인한 인간과 관련이 있을 것 같거든."
"지금으로선 그것까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당신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부터 의문인데요."
"방법을 묻는 거라면, 그건 간단해. 누가 로베르의 몸에 내 심장을 넣은 거다."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와 달리, 악마는 마력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래서 악마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마력의 근원인 심장이 모든 힘을 잃는 순간, 소멸할 뿐이었다.
"악마가 인간의 몸에 깃든 케이스는 여럿 봤지만, 설마 그런 방법으로 완전한 부활이 가능한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라면 안 되는 게 맞아. 영혼을 도려내지 않고서야 인간의 몸은 악마의 심장을 받아들일 수 없거든. 그게 마왕의 심장이라면 더더욱."
빙의 역시 악마가 마력으로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켜 제 분신으로 만드는 일에 불과했다. 그건 부활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악마는 결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불문율이 어긋났다. 이게 내게만 해당되는 건지, 악마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인간들이 여럿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묻겠는데, 전쟁이 끝나고 마왕들의 심장을 어떻게 처리했지?"
"역사에는 그저 신성 영웅들이 일곱 마왕을 전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베어 거리에 걸어 놓고 육신은 화형식을 열어 태웠다고요. 의식의 마무리로 성수를 붓자 남은 재까지 깔끔하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타나스는 당사자 앞에서 그 처참한 최후에 대해 잘도 늘어놓았다.
'너무 자세히 들으니 묘하게 불쾌하군. 딱히 상관은 없지만.'
로베르는 이미 타 버린 것에 미련을 가지는 성정이 못 되었다. 그는 금방 찜찜함을 털어 버리고 말을 이었다.
"이상하네. 그랬다면 심장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정황상 당신은 폭사한 것으로 보이니, 시신이 온전치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옮기는 과정에서 심장을 빠트렸을 가능성이 있죠."
"심장을 빠트릴 거면 시신을 뭐 하러 옮겨?"
"사제와 성기사들은 그저 신성한 힘으로 마기를 정화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정화에 성공하면 자연히 마기의 중심인 심장도 소멸한다고요. 당시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단순한 실수였다면 다른 마왕들이 부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나....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다른 마왕들은 로베르와 다르다. 부활하는 즉시 일족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뛸 것이 분명했다.
이미 충분히 멀어진 평온한 삶이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안 돼. 하루라도 빨리 코어를 봉인한 놈을 찾아야겠어. 그러면 무슨 실마리가 잡히겠지."
"순서가 틀렸습니다. 일단 살아야 그다음이 있겠지요. 그러니 우선 순회 준비를...."
"어이, 아니지. 결정은 내가 한다. 보아하니 넌 대가리 굴리는 게 보통이 아닌 놈인데, 덕 좀 봐야겠어. 네가 생각하는 범인은 누구지?"
황궁 밖은 로베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아타나스를 따라나서기 전에,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목줄을 잡은 쪽은 아타나스가 아니라 로베르라는 것.
로베르의 물음에 답하지 않자 피로 물든 목에 새겨진 계약의 표식이 선명해졌다. 아타나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뭡니까?"
"계약자 관리. 계약자가 조건을 어기면 거기로 내 마력이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거든. 그렇게 빛나는 걸 보니, 지금 조건을 어기고 있나 봐?"
"이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라면, 드려야죠."
로베르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타나스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코어를 봉인할 만큼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 마력을 수급할 수 있는 자, 오랫동안 곁에서 황자님을 지켜봐 온 자. 그자가 범인입니다. 그리고 저는 범인이 황실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거 설마...."
"황실에서 모든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자면, 아카키 황자와 파토르 대공이겠네요."
쿵.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로베르가 된 뒤로 종종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그 둘이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맞아도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생각과 달리 불쾌한 감각은 여전했다.
"다만 두 분은 이렇다 할 동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동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봐도 하론 황자뿐이네요."
아타나스가 두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꺼내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찝찝함이 가셨다.
"저주받은 황자의 탄생으로 황제는 더욱 약해졌고, 황후는 제국민들의 미움을 샀죠. 아카키 황자는 끝내 특권 사제가 되어야 했습니다. 율란 황녀 역시 저주받은 쌍둥이라는 이명으로 고통받았고요. 그리고 대공은...."
"처음부터 로베르를 살리려고 했지. 로베르의 각성에 가장 기뻐했고."
한결 마음이 편해진 로베르는 자신의 각성을 별로 기뻐하지 않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황후와 1황자 하론, 그리고 황녀 율란.
그러나 황후와 율란은 로베르의 신성력을 봉인하기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봉인을 통해 무언가를 얻을 만한 사람은 하론뿐이었다.
"조건에 맞는 자는 동기가 없고, 동기를 가진 놈은 조건에 안 맞는다. 그래서 결론은 뭔데? 결국 모르겠다는 거야?"
"동기를 가진 자가 조건에 맞는 자를 이용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혹은 협력 관계이거나."
"하론이 아카키 형님을 이용했다? 그래, 그러면 말이 되네."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셨을까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범인은 머지않아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범인과 그 뒤의 세력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때까지 로베르가 할 일은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들을 쓸어버릴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좋아. 그래서, 내게 뭐부터 가르칠 생각이지?"
로베르는 마지못해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할 일이 많지만, 우선 급한 신성력 훈련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성녀님이 직접 내린 성수를 마셨으니 다음 방문까지 코어가 완성되겠죠. 방해가 될 테니 술은 마시지 마세요."
"허. 그럼 뭘 마시란 거야?"
"...."
아타나스는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베르를 내려다봤다.
"경계를 푸는 게 너무 빠르시군요. 협조해 주시는 건 기쁘지만, 방심하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푸핫, 널 뭐 하러 경계해? 넌 이미 내 손바닥 안인데."
로베르가 우습다는 듯 아타나스의 목을 가리켰다. 희미해진 표식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그거, 아까 내가 봐줘서 몰랐나 본데 생각보다 위험한 거다. 네가 까불면 펑, 터지면서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날릴걸."
사지가 터져 죽는 끔찍한 죽음을 장난스럽게 묘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악마의 것이었다.
"물론 너 같은 놈들은 그 정도로 안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나한테 신호가 와. 직접 와서 대가를 받아 가라고."
"...이렇게 친절히 설명해 주시는 이유는, 제가 겁먹고 알아서 충성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거고요."
"그래, 그건 아주 간단하고 강력한 저주에 걸린 소환 마법진이야. 그러니까 그걸 발동시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로베르 황자님."
아타나스는 이내 표식이 흔적을 감춘 것을 확인하고는 목깃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사방에 남은 핏자국을 신성력으로 깔끔하게 씻어 내렸다.
용도를 다한 마법진이 완전히 스러지며, 그 방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게 할 만한 단서는 전부 지워졌다.
그저 로베르가 아타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간결한 한 마디만이 황제의 집무실로 전해졌을 뿐이었다.
"...그렇군. 황자가 원한다면, 안 될 이유가 없지."
조너선은 어떤 이견도 달지 않고 로베르의 뜻을 받아들였다.
황제의 승인으로 아타나스는 십여 년 전 궁을 떠난 황실 교사의 뒤를 이어 로베르의 스승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국 순회 역시 공식적인 사안이 되어 의회로 넘겨졌다.
자리를 비운 파토르를 대신해 하론의 약혼자인 에리카 공작이 임시로 의장을 맡았다.
"윈터스 대공과 에드먼드 변경백 외에는 결원이 없으니, 이 건은 바로 투표에 부치면 될 듯하네요. 교황 성하와 황제께서 이미 뜻을 모은 일에 과연 이견이 있을까 싶지만."
그날 그곳에 모인 성직 귀족과 세습 귀족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진 채 만장일치로 두 사람의 제국 순회에 찬성표를 던졌다.
"호외요, 호외! 로베르 황자가 직접 예언의 저주받은 아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답니다!"
소식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제국 곳곳으로 퍼지며 모든 제국민들이 로베르의 이름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저주받은 황자'가 드디어 본래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 * *
늦은 밤, 황제 조너선은 자신의 서재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폐하, 그만 드십시오.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시종장은 안절부절못하며 황제를 말렸다. 그러나 조너선은 침울한 얼굴로 다시 잔을 채웠다.
"교황청과의 일로 아카키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아느냐. 가족 모임이 아니면 내게 얼굴 한번 보여 주지를 않아. 차라리 전처럼 화라도 내면 좋을 것을...."
"폐하...."
조너선은 어린 아카키를 제 어머니의 품에서 억지로 떼어 놓던 날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아카키는 신성력을 각성했고, 제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한 교황청에 끌려가 사제가 되었다.
"제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악마를 죽이는 일보다 더 지긋지긋한 게 뭔지 아세요? 교황청에 빌빌거리기만 하는 이 황실이고, 무엇 하나 제 손으로 지켜 낼 줄 모르는 당신이야."
언젠가 아카키가 크게 다쳤던 날, 그는 조너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 후로는 먼저 말 한마디 건네는 일조차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지. 하론은 내가 아닌 황후를 부모로 생각하고, 율란은 나를 어려워하기만 해. 그리고 로베르는... 그래, 요즘 들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 건 그 애밖에 없군."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베르는 아카키 다음으로 자신을 가장 미워하는 자식이 될 것이었다.
로베르의 각성에 기뻐했던 자신이 멍청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마치 이번에는 다를 것처럼, 지켜 낼 수 있다는 듯이.
"어쩐 일로 이리 늦으시나 했더니, 여기 계셨습니까."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황후 유리아가 문가에 서 있었다.
조너선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흰 가운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은 그들의 첫 만남을 연상케 했다.
"내가 왔으니, 이만 나가 보게."
그녀는 시종장을 물리고 조너선의 곁으로 와 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술을 따라 주었다.
"폐하, 황자들은 당연히 폐하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섬길 겁니다. 황궁에서 자란 아이들이 표현에 서투른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하하, 그럴 리가. 나처럼 한심한 놈을 누가 섬기겠어?"
"제국의 황제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군요."
"누가 나를 황제라고 생각하지? 처음부터 아무도 내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어, 심지어 나조차도. 차라리 파토르가 황제가 되어야 했는데...."
유리아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취기가 오른 조너선은 그런 그녀를 살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파토르가 함께 있으면, 다들 저도 모르게 파토르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더군. 그들도 아는 거지, 군주의 자격은 그에게 있다는 걸. 유리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리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경직된 황후의 얼굴 대신 솔직한 표정을 드러냈다.
"조너선."
"...응."
"불쌍한 조너선. 모든 게 변했는데, 너만 홀로 과거에 사로잡혀 있구나. 지금의 파토르를 봐. 사랑받던 황자는 이제 없어. 교황의 눈 밖에 난 대공만 남았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위선자. 그렇게 만든 게 당신이잖아. 덕분에 날 가졌으면서, 좋은 형 노릇까지 하고 싶어?"
조너선이 죄책감 어린 눈으로 유리아를 바라봤다. 유리아는 웃으며 조너선의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황제는 당신이야, 조너선. 그게 내가 파토르를 버리고 당신을 선택한 이유였어.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걸 지켜 줘. 황태자는 하론이 될 거야. 그렇지?"
하지만 유리아, 그건 누구를 위해서지?
조너선은 끝내 묻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19]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19화. 신성력 훈련 (1)
마왕, 벨페고르는 적진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쾅!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이 불길에 휩싸였다. 부서진 성벽의 파편들이 쏟아져 악마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부, 부디 자비를...."
"제, 제발 그만둬. 난 살고 싶다고!"
살려 줘!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단 말이야!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그의 일족들이 쉴 새 없이 아우성쳤다.
"뭐야,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퍽. 그 순간, 파편 하나가 벨페고르의 머리를 세게 가격했다. 얼얼한 통증이 번졌고, 그제야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마왕님, 대체 언제까지 멍하니 계실 겁니까! 일족이 전부 죽은 후에야 나서려고요? 마왕의 힘을 계승받았으면, 뭐라도 하란 말입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슈타르가 등 뒤에서 애타게 그를 불렀다.
"저놈이 벨페고르의 계승자다! 저놈의 뿔을 잘라 우리의 왕에게 바치자!"
"마몬을 위하여!"
거센 함성과 함께 탐욕 일족의 악마들이 벨페고르에게 달려들었다.
"물러서! 이미 너희들은 협정을 어겼다! 다른 일족들이 이 사태를 용납할 것 같나? 물러서라니까!"
이슈타르가 다급히 외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녀는 거대한 공격 마법진을 펼치려 했으나, 마력이 바닥난 탓에 실패했다.
"크윽...."
이슈타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녀를 포위한 악마들 사이에서 탐욕 일족의 군단장이 걸어 나왔다.
"계승에 문제가 있었다더니, 사실이었군. 한 일족의 군단장이 이토록 약해진 상태라니."
"닥쳐...."
군단장은 그녀를 비웃으며 군사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퍽, 퍽, 퍽.
벨페고르는 나서지 않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슈타르는 그런 그를 향해 끈질기게 사정했다.
"마왕님, 제발...."
그 간절한 시선이 좇는 자는 언제든 갈아 치우면 그만인 시종이 아닌, 그녀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너무 시끄럽네. 난 조용한 게 좋은데."
그러니 이쯤에서 나서 줘야겠지. 벨페고르는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돌변했다. 휘익-. 멀리서부터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권능, 지배."
그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그러기를 무섭게 모든 악마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쿵, 쿵, 쿵, 쿵.
뒤이어 그들의 무릎이 차례대로 바닥을 울렸다. 그들은 거대한 힘에 떠밀려 저도 모르게 벨페고르의 쪽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젠장...!"
억지로 지배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 강한 힘이 그들을 짓눌렀다.
"저분이 우리들의 새로운 왕이시다!"
겨우 적들에게서 해방된 나태 일족의 악마들은 전쟁터 한복판에 선 벨페고르를 우러러보며 자진해서 고개를 숙였다.
"버, 벌써 마왕의 권능을 쓸 수 있다고? 분명 계승에 문제가...."
탐욕 일족의 군단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벨페고르는 손가락을 까딱여 군단장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크윽...."
"다른 것도 할 수 있는데, 보여 줘?"
벨페고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우웅-.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자색 빛이 모여 형체를 이루었다.
그것은 금방 악마의 본체마저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구가 되었다.
"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네 주인은 절대 할 수 없는 것."
"웃기지 마라. 너 따위가 감히 그분을...."
펑!
그 순간, 군단장의 육체가 산산이 조각났다.
쏴아아-. 검은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피를 뒤집어쓴 적들의 얼굴 위로 같은 공포가 번졌다.
그들의 공포가 곧 현실에 도래했다.
벨페고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악마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권능, 약탈."
대지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곳에 발 딛고 선 수많은 악마의 마력이 전부 벨페고르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아하하, 이거 생각보다 기분 좋네."
마력에 취한 벨페고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온몸을 들썩이며 웃어젖히는 그의 주변으로 짙은 안개가 깔렸다.
죽음의 한기를 머금은 안개는 불길마저 얼어붙게 했다.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막이 하늘을 가렸다.
"아, 아...."
안개 속에서, 그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했다.
털썩-. 마지막 적까지 쓰러진 후에야 벨페고르는 힘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이슈타르에게 다가갔다.
"이슈타르, 너를 위해 했다. 이제 만족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슈타르는 힘 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보세요, 당신은 이렇게나 전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건 대체 무슨 꼴입니까?"
그녀는 더 이상 벨페고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너머의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어둠을 품은 채였다. 그 안에 비친 자신과 마주한 순간,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저는 당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 맹세는 벨페고르를 위한 것이지, 로베르를 향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날카로운 절규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벨페고르는 휘청이며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녀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검은 눈물은 꼭 악마들의 피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너를 저주한다, 로베르. 그러니 반드시 벨페고르로 살아남아. 네 안에 자리 잡은 신성한 것을 부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게 널 죽일 거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베르가 누군데?'
벨페고르는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쿠궁, 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가 알던 하늘과 땅이 완전히 뒤집혔다.
"어, 어?"
어느 순간 벨페고르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는 그렇게 끝없이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졌다.
끝없는 바닥이 그를 완전히 집어삼키려던 찰나, 허공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차르륵-.
'저건 커튼을 치는 소리인데.'
동시에 그의 앞에 눈이 멀 것처럼 강한 빛이 번졌다.
"허억-. 뭐, 뭐야!"
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아타나스였다.
"로베르 황자님,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마음 편히 늦잠이나 잔 걸 보면 진즉 코어를 완성하신 모양이죠?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십 분 안에 세안을 마치고 응접실로 오세요."
아타나스는 멋대로 통보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섰다.
당장 신성력 코어를 확인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자 금방 정신이 맑아졌다.
"맞다, 로베르는 나였지. 빌어먹을...."
로베르는 멀어지는 사제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자리보다 훨씬 사나운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지난 만남에서, 아타나스는 다른 건 제쳐 두고 우선 신성력 훈련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코어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마력을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순회 전에 최대한 힘을 키워야겠죠. 다들 황자님이 대단히 강한 줄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강한 건 사실이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마력이 없는 당신은 평기사 하나 쓰러트리지 못하는 폐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아타나스가 냉정한 투로 말하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로베르는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정작 그가 꺼낸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원형 아티팩트였다. 투명한 구가 머쓱한 얼굴을 한 로베르를 비추었다.
"왜 뜬금없이 겁을 먹습니까?"
"너도 갑자기 성수를 뒤집어써 봐. 안 놀라나."
"그때 그 성수는 당신의 코어를 정화해 보겠다고 어렵게 구한 겁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구경조차 못 할 테니 안심하고, 받으세요."
로베르는 얼떨결에 그가 내미는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리고 경계 어린 눈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다 쓰는 건데?"
"신성력을 정화하는 아티팩트입니다. 악마들을 가까이서 상대하는 특권 사제들이 주로 쓰죠."
아티팩트를 통해 불순물을 걸러 내고 힘을 정화한 다음, 순도 높은 신성력을 다시 코어로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제가 증폭 주문까지 따로 걸어 놨으니 당신이 힘을 넣으면, 그 열 배의 신성력이 되돌아가 코어를 강화해 줄 겁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아타나스의 계획대로라면, 단 하루 만에 코어를 새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대뜸 시작하라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하지. 마력으로는 안 될 거 아냐?"
"...설마 아직도 신성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그런 불쾌한 게 내 안에 있다면 진즉 느낌이 왔을 거야. 그런데 평소랑 똑같아. 아, 몸은 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로베르로 인해 계획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분명 봉인은 풀렸어. 그날 마기를 다 정화했으니 지금쯤 힘이 돌기 시작해야 하는데....'
만약 그사이 코어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라면,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당신 코어에 직접 접촉해 무슨 문제인지 봐야겠습니다. 협조해 주시죠."
"코어가 들어 있는 것부터가 문제지."
그래서 그런 개꿈까지 꾼 게 분명해.
로베르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등을 내주었다. 등의 정중앙을 짚은 아타나스의 손끝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이내 로베르의 코어에 닿은 아타나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멀쩡하게 만든 줄 알았더니, 그새 마력이 흘러 들어갔군. 말 그대로 본능인 건가.'
성녀가 직접 내린 성수마저 코어를 완성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모양이었다.
미완성된 코어의 틈새로 들어간 마력이 코어를 다시 망가뜨리고 있었다.
'귀찮게 됐어. 자꾸 성수를 요구하면 그녀도 이상한 걸 눈치챌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하면, 악마의 심장은 계속해서 로베르의 코어를 공격할 것이었다. 코어가 망가지면 그 육신 역시 무사할 리 없었다.
"악마의 본능이란 건 멍청하기 짝이 없군."
"뭐?"
"당신 마력이 전보다 더 심하게 코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걸 해결 못 하면 훈련이 불가한 건 둘째 치고, 당신은 며칠 안에 죽을지도요."
"죽을지도요? 이 자식이...."
애매한 양의 성수가 자극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로베르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이라도 아타나스를 죽이려 했다.
아타나스는 순순히 멱살을 내어준 채로 말을 이었다.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든 성녀님을 만나 성수를 퍼 달라고 사정하거나. 제 신성력으로 당신 코어를 완성하거나."
"당연히 네가 직접 해결해야지. 지금 여기서, 당장."
로베르가 그의 멱살을 놓아주면서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그편이 빠르긴 하겠지만...."
아타나스는 어딘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티팩트를 손에 쥐었다.
"흔히들, 신성력에는 그 주인의 영혼이 깃든다고 합니다. 당신이 로베르 황자님의 기억을 본 것도 그 영향일지도 모르죠."
그 말에 로베르는 대놓고 아타나스를 비웃었다.
"악마와 계약한 순간부터 넌 이미 네 영혼을 판 거다. 이제 와서 망설일 이유가 없을 텐데."
"혹시 이 일로 무언가 알게 되더라도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나도 네가 얼마나 뒤가 구린 놈인지 떠들고 다닐 데가 있다면 참 좋겠군. 없으니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빨리 시작해."
"잘 조절해 보겠습니다, 실수로 당신을 죽이지 않도록."
결국 아타나스는 공들여 감추고 있던 힘의 일부를 개방했다.
"헉-."
그가 힘을 방출한 것만으로 로베르는 숨이 턱 막혀 왔다. 동시에 그를 공격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이거... 형님이나 숙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한 놈이잖아. 바임을 사냥하니 어쩌니 했던 것도 허세가 아니었어.'
그에게선 마왕마저 위협할 만한 힘이 느껴졌다. 만약 제 심장이 온전했다면, 곧바로 그를 죽이려 했으리라. 로베르는 간신히 본능을 억눌렀다.
웅-. 그사이 아티팩트가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아타나스는 영롱한 빛을 내기 시작한 아티팩트를 그대로 로베르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일단 코어의 틈을 메울 정도로만 넣겠습니다. 그 이상 넣는 것도 코어를 상하게 할 수 있어서요."
뒤이어 순도 높은 새하얀 빛이 로베르의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욱...."
몸 내부에서 두 힘이 충돌하는 느낌과 함께 깊은 고통이 번졌다. 심장이 뛸 때마다 세상이 울리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평화가 찾아왔다. 가슴 부근에 따스한 기운이 번지며 고통이 가라앉고 속이 편안해졌다.
반면, 아티팩트를 쥔 아타나스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하얗게 질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틈을 메울 만큼만 넣는다면서?"
"...그러고 있습니다."
늘 평온하던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졌다.
'이게 대체....'
웬만한 코어를 꽉 채우고도 남을 양을 흘려보냈음에도, 로베르의 코어는 계속해서 그의 힘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식은땀 한 줄기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카펫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쨍그랑! 동시에 아티팩트가 힘없이 부서졌다. 사방이 진동하며 바닥의 가구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야, 아직이냐?"
그런데도 아타나스는 여전히 로베르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로베르의 코어가 그의 힘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망할 마왕 놈. 몸 한번 제대로 골랐군.'
로베르 황자는 생각보다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던 모양이었다. 이제껏 드러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20] 마왕인데, 사제가 날 협박한다
20화. 신성력 훈련 (2)
